애석하게도 여전히 현대사회와 현대인을 규정함에 있어서 불안, 우울, 좌절, 혐오는 빠질 수 없는 단어로 자리하고 있다. 여기서 의아한 것은 불안의 원인이나 해결 방안을 사회구조나 정책, 또는 인간관계 등에서 발견되는 ‘불안정성’에 두고 있다는 것이다. 부동산과 주식, 취업률, 세대 갈등과 같은 것들이 그것이다. 문제이자 원인으로 취급되는 현상이 해결되면 인간의 불안과 우울은 모두 사라질 수 있을까? 사회의 구조를 뜯어고치면, 그 속에서 살아가는 개인의 안위와 행복은 점진적으로 높아지는가?
현 사회는 마치 그런 것처럼 계속해서 있는 정책의 강도를 높이거나 새로운 방안을 내놓고 있다. 더욱이 본격적으로 대두하고 있는 인공지능 산업의 활개는 인간적인 것, 또는 인간성에 관한 냉소적인 풍조를 가중하고 있다. 우울한 현대인은 치료받아야 할 대상이고, 더 나은 존재 생산을 위한 기준점이자 발판으로 존재하고 있을 뿐이다.
인간이 소외되고 인간성이 부정되는 시대일수록, 다시 한번, 인간에 관한 성찰이 요청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현상일지 모른다. 인간을 목적으로 하는 사유는 인간이 창조한 부산물을 통해서가 아닌 바로 인간 그 자체로부터 출발해야 한다. 한 인간으로 존재하는 것에 관해 깊게 사유한 키르케고르(Søren Kierkegaard)의 제언, “매 순간마다, 개인은 그 자신이면서 동시에 인류다”는 이번 전시를 설명하는 주요한 지점에 있다.
이를 단순히 모든 주관적 생각이 가치 있다거나, 저마다의 경험이 정당하다는 류의 주장으로 오해해서는 안 될 것이다. 이것은 하나의 상태이고, 주어진 과제라는 의미에서 모순이며, 지향점이자 목표로서 역사적 운동을 의미한다. 무엇보다 키르케고르의 흥미로운 장치는 모든 개인이 곧 인류가 아니며, 먼저 스스로가 되는 과정이 있어야 한다는 것에 있다. 이로써 개인은 자신에서의 완성과 동시에 전체, 곧 인류에 참여하게 된다.
그렇다면 자기 자신의 ‘완성’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이것은 ‘완결’이 아닌 하나의 ‘과정적 상태’이며, 분열할 수밖에 없는 개인을 종합하는 정신, 즉 ‘관계하는 것’ 그 자체를 말한다. 그런데 이 관계 맺기는 언제나 불안과 함께한다. 왜냐하면 불안은 아무것도 없는 텅 빈 무(無) 앞에서 실존이 겪는 무한의 가능성, 곧 자유의 상태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우리는 불안을 두려워하면서 사랑한다. 키르케고르에게 불안은 꿈꾸는 정신의 깨어남과 같으며, 진정으로 세상에 들어오는 것과 같다. 그리고 인간의 완성은 분열의 종합이자, 종합하는 관계 그 자체로 설명된다.
미디어 기반의 현대미술작가 6인, 손광주, 전보경, 장서영, 함혜경, 손수민, 김상하가 참여하는 영상 전시 《나의 인류》는 오늘날을 배경으로 시대와 함께 실존하는 인간이 맺어가는 관계의 양상을 보여준다. 무엇보다 이들은 불안하고 좌절하며, 의심하는 시선으로 존재하며, 자기 자신으로부터 뻗어가는 타자와의 관계를 통해 분열된 존재자의 종합을 시도한다. 이번 이야기는 인간의 내면과 정신에서부터 출발하여, 개별자를 둘러싸고 있는 공동체, 사회와의 관계 맺기의 양상들로 이어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