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월적 전체들은 흐릿하고 울퉁불퉁하다. 그것들은 셀 수 없는 많은 부분들과 관련이 있다. 이런 점이 갖는 효과는 전체를 기이하게 쭈그러진 것으로 만드는 것이다.
우리는 미술의 역할들 중 하나를 부드러운 공간으로의/공간 속으로의 입력점이나 존재와 사유의 습관적인 상태로부터 세계의 다양체로/안으로의 하나의 탈주선이라고 보고 있다. (중략) 미술은 다른 수준에서 새로운 합성물들, 새로운 배치들의 구축을 재개체화하는 매커니즘을 가리킨다.

전시장에 들어서니 귀를 간지럽히는 무언가가 들린다. 인간의 목소리가 분명하다. 그런데 음성보다는 소음에 가깝다. 몸의 감각을 최대한 곤두세우며 집중해 본다. 눈이 쌓였다 날리고, 바람이 모였다 흩어지고, 공기가 움직이다 스며드는 순간에 들을 법한 소리를 닮았다. 소리가 따르는 일정한 규칙은 없어 보이지만, 완전한 무질서도 아니다. 인위적이고 본능적이다. 인위적이지도 않고 본능적이지도 않다. 난해하다. 귓속에 머물기 전 온몸을 감싸는 소리는 낯익은 듯 낯설다.

어쩌면, 그래서 괴이한 신비로움이 배가되는 것일지도 모른다. 귀를 자극하는 진동에 익숙해질 때쯤 잠시 벽으로 시선을 돌리면, 작업의 여정이자 퍼포먼스를 위한 악보이며 그 자체로 독립된 작품인 여섯 점의 ‘스코어(Score)’ 시리즈(2024)가 보인다. 크지 않은 작품이지만 빙하를 상상할 만큼 충분한 힌트이다. 조금 더 높은 곳에는 네온으로 제작된 〈angurværð(부드러운 슬픔)〉(2024)이 빛을 발하고 있다.

바닥에 놓인 쿠션에 몸을 기대어 소리에 둘러싸인 채, 하늘의 별 같은 네온 빛 아래에서 시야에 들어오는 빙하의 사진, 숫자와 도표, 엉킨 실타래 같은 선과 글자들을 보니 알 수 없는 자연 어딘가로 공간 이동을 한 것만 같다.

전보경은 전시 《궤적을 연결하는 점들》(2024)에서 빙하-물에 감응하기를 시도한 작품들을 선보였다. 이 세상에 가장 인위적인 결과물을 만들어내는 존재 중 하나인 예술가의 머릿속에 어느날부터 갑자기 혹은 서서히, 인간의 영향으로 자연스러운 흐름이 부서지는―엄밀히 말해 파괴되고 사라지는― 것들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가장 먼저 머릿속을 채운 것은 빙하였다.

얼마 뒤 작가의 눈에 맺힌 빙하의 모습(이미지), 귀에 담긴 그것의 소리, 피부로 느껴진 대기, 눈으로 보고 또 상상하게 되는 빙하의 일대기는 작품의 부분들이 되었다. 인간 문명의 악영향 때문에 그 속도가 빨라졌다고 하지만, 빙하의 시간은 아직-여전히 다른 세계 속 존재들이 그렇듯 자연의 섭리를 따르고 있었다. 작가는 경이로움에 파묻혔다. 환희도, 전율도 있었다. 그러나 빙하가 보여주는 이미지 그리고 들려주는 소리의 종착지는 장엄한 비극에 가깝게 느껴졌다.

물은 아주 먼 옛날부터 생명과 죽음을 모두 상징해 왔고 완전한 소멸이 아니라 이어짐(순환)이라는 사실을 염두에 두어도 그 정조는 바뀌지 않았다. 잊히지 않았다. 충분한 시간이 흐른 뒤 빙하에 관한 정보와 작가의 경험과 생각, 정서는 이미지와 글씨와 드로잉으로 기록되었다.


전보경, 〈스코어〉, 2024 © 전보경

여섯 장면으로 구성된 ‘스코어’ 시리즈는 빙하의 일대기에 근거한다. 첫 장면은 눈의 결정이 형성되는 과정에서부터 시작한다. 그다음에는 주변과 영향을 주고받으며 조금씩 뭉쳐져 얼음덩어리가 되고, 수백 년 혹은 수천 년 뒤에 빙하가 되어 이동한다. 언젠가는 빙하가 깨지는 순간이 오는데, 빙하는 부서져 침몰했다가 다시 수면 위로 올라온다. 그리고 빙하의 잔해인 얼음 조각들과 그 안의 기포들은 물과 만나며 인간의 언어로는 묘사하기 어려운 오묘한 소리를 낸다.

날카롭고 강한 파열음에서부터 비명처럼 느껴지는 것에 이르기까지 다양하다. 작가는 자료를 조사하는 탐구자로, 상상하는 사람으로, 그리고 작가로서 생성했던 생각과 행위들의 흔적을 모아 기록하고 표현했다. 그러나 하나의 덩어리인 동시에 파편들인, 전체보다 거대한 조각-부분들인 빙하를 담기에 충분하지 않았다. 심지어 작품의 일부에서는 지시적이고 한정적인 영역이 발견되기도 한다.

비인간종을 다루며 인간 문명의 상징과도 같은 테크놀로지를 사용했다고 말하려는 것은 절대 아니다. 인간이 주체가 되었기 때문에 태생적으로 한계를 가질 수밖에 없다는 근원적인 부분을 거론하려는 것도 아니다. 예를 들어 ‘스코어’ 시리즈의 제목 “모서리가 여섯인 눈송이에 대해, 압축과 팽창, 얼어붙은 기억, 빙하의 노래, 푸른 낙하, 다크 버블즈(Dark Bubbles)”를 비롯해 ‘스코어’에 등장하는 정보들, 작가가 적은 문장들은 명시적으로 읽힐 확률이 높다.

또한 〈angurværð(부드러운 슬픔)〉의 제목과 “구름과 바람, 별과 꽃, 빙하와 눈송이-살아 있는 모든 존재나 무생물의 모든 형태가 인간의 영혼에 흔적을 남긴다”라는 문장은 작가의 생각을 친절하게, 계시적으로 전달한다. 어쩌면 기승전결의 구성을 떠올리게 하는 서사-이야기와 해석이야말로 인간적인 것일 수 있다. 이런 이유로 작가에게는 당연시되는 것들, 의심조차 할 수 없을 정도로 오랫동안 지속되어 온 경계-구획을 이탈할 수 있는 또 다른 길이 필요했다.

그러고 보니 하나의 빙하 덩어리는 하나의 세상과 닮았다. 그리고 전체는 항상 그 부분들의 합보다 더 작다. 이것이 바로 저월(subscendence)이다. “전체들은 자신의 부분들을 저월한다(subscend).” 초월이 아니다. 다른 것일 뿐이다. 이것은 부분들이 전체의 기계적 구성 요소들에 한정되지 않으며, 진정한 경이로움과 새로움, 다른 미래는 늘 가능하다는 것을 함의한다. 인간도 마찬가지다. “인류는 그것을 구성하고 있는 인간들보다 존재론적으로 더 작다!” 인간들은 인류의 부분으로만 존재하지 않는다.

그들은 많은 일을 한다. 그중에는 비인간과의 관계 형성하기도 포함된다. 그리고 인간들은 비인간들을 포함하고 있다. 결국 작가는 다수가 떠올리는 빙하의 전형인 압도적인 장관을 포기했다. 대신 인간적인 영역을 벗어나는 소리를 선택했다. ‘스코어’는 악보 혹은 ―작가와 퍼포머, 퍼포머와 퍼포머, 인간과 빙하의―교감을 위한 통로가 되었다. 빙하의 이야기는 세계의 이야기로 확장된다.

전보경은 특히 수증기가 바로 얼음으로 변해 만들어진 거대한 얼음덩어리인 빙하가 고정되지 않는 물을 바탕으로 한다는 점에 주목했다. 사람들의 눈이 포착할 수 있는 빙하는 정지된 고체지만 그것은 멈추지 않는다. 그 안과 밖 모두에서 움직임을 포함하기 때문에 빙하는 매우 “민감하고 동적인 존재이다.” 이에 작가는 빙하의 비정형성을 통해 인간이 만들고 고착시킨, 폭력적일 수도 있는 기준과 분류를 거부하고 교란하는 사고 실험을 끌어낼 수 있다고 판단했다.

물론 빙하-물뿐 아니라 세계의 모든 존재는 다 과정 중에 있다. 어떤 식으로든 변화를 내포하고 경험한다. 그렇기에 빙하의 서사는 세계를 살아가는 부분들과 적정한 교집합을 갖는 소재가 된다. 작가는 “기후변화로 사라지고 있는 소리”의 풍경을 만들고 싶었고, 그저 자연의 소리를 옮기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그래서 〈이름 없는 노래: 글래시어 블루(Glacier Blue)〉(2024)에서 ‘비정형, 유동적, 과정, 한정 지음에서 벗어남’에 집중해 빙하에서 체험하고 수집한 모두를 최대한 품는 몸의 소리를 “제시”하는 방법들을 탐구했다.

인간의 몸을 다른 존재와 만나는 연결점으로 이해했다. 몸의 소리를 위한 인간(퍼포머)들은 그저 빙하를 인간의 관점에서 설명하고 흉내 내는 게 아니라 다름으로 이동하는 것에 가까워지려 했다. 인간의 언어를 벗어난 “파동으로서의 소리”, 즉 분절된 단어, 마찰, 혀, 숨의 소리는 “의미로부터 달아나” 말이 되지 않는 소리를 향한다. 육체들은 움직이지 않는 정지의 상태를 벗어나고 끝없이 생성된다.


전보경, 〈이름 없는 노래: 글래시어 블루〉, 2024, 7채널 음향, 빈백, 가변크기; 〈angurværð(부드러운 슬픔)〉, 2024, 네온, 82 x 140 cm © 전보경

사실 〈이름 없는 노래: 글래시어 블루〉는 육체적 소리라는 점에서 이미 저항적이다. 오늘날에도 여전히 정신과 육체의 이분법이 존재하며 그 사이의 우열 관계도 사라지지 않았다. 이러한 권력 구도를 가장 명확하게 담아내는 게 언어다. 언어는 손을 이용한 적기 혹은 소리내기의 방법으로 몸을 통해 전달된다. 그러나 언어는 육체가 아닌 무형의 생각, 정신과 관계되는 것으로 여겨진다. 또한 언어에는 사회를 지배하는 세계관, 규범, 고정관념과 편견까지 담긴다.

따라서 언어를 사용하는 사람은 누구나 그것에 익숙해지고 지배받고, 억압받을 수밖에 없다. 그런데 〈이름 없는 노래: 글래시어 블루〉는 사람이 내는 소리지만 의미를 전달받을 수 있는 말이 아니기 때문에 의미 파악보다는 그 소리를 내기 위한 몸의 자세, 소리를 내는 동안의 순수한 움직임을 상상하게 된다. 일시적인 자유가 주어지는 것이다. 인간에게서 나왔지만 절대 언어화될 수 없는 소리, 목에서부터 울려 나오는 진동과 리듬, 의미 전달이 목표가 아니라 그 자체로 목적이 되는 소리이다.

체계화할 수 없어 언어적 사유를 불가능하게 하는 소리는 그만큼 무한대의 가능성을 함유하게 된다. 정의 내릴 수 없음은 불가능의 반대에 놓인다. 작가는 작업의 과정 중에 체득했던 것 같다. “모든 것의 본질은 고유의 가치를 지니지 못하고 서로 구분되지 않는 대단히 모호한 존재들에 의해 발휘된다. 그 존재들이 존재하지 않거나 그런 모습이 아니라면 아무것도 이루어지지 못할 것이다.”

〈이름 없는 노래: 글래시어 블루〉가 저항성을 드러낸다고 해석할 수 있는 또 다른 이유는 시각이 아닌 소리가 주인공이라는 점이다. 인간의 감각에도 전통적으로 우열 관계가 형성되었고, 청각과 관련된 귀는 눈보다 낮은 위치에 있었다. 그러나 인간은 시각 못지않게 청각적인 경험에 둘러싸인다. 세상은 언제나 소리로 가득하다. 굳이 미술을 이야기하지 않아도 인간의 문명은 시각 중심적이었고, 지금도 특별히 변한 것은 없어 보인다.

따라서 시각성과 물리적 현존을 벗어난 소리, 심지어 작곡가에 의해 확정된 악보를 따르며 완결성을 유지하는 음악과 달리 최소한의 지시와 최대한의 관계에 기반한 열린 과정 중에 얻어진 소리는 확장된 지각 경험을 가져올 뿐 아니라 위계를 허문다.

한편 이와 같은 작업의 과정과 결과는 일정 부분에서, 필연적으로 비인간종-되기를 떠올리게 한다. “실체적 의미가 아니라 동사적 의미로 이해되어야 하는”, “모든 대상 혹은 존재를 성격 규정하는 잠재적인 점들로 이루어지는 계열들이 순간적으로 만나 변신을 낳는 하나의 과정”인 “되기(=생성)”는 흉내 내기가 아니다. “그것은 닮음(=유사성)을 겪는 것으로는 만족하지 않는다.” 오히려 닮음에 집중하면 되기에 방해가 되고, 과정이 아닌 정지를 가져오게 된다.

따라서 되기는 혈통이나 계통적 진화도 아니고, “유사성도, 모방도, 더욱이 동일화도 아니다.” 상상에서 일어나는 게 아니며, 꿈도 아니고 환상도 아닌 되기는 “완전히 실재적이다.” 실제로 퍼포머들은 소리를 녹음하는 과정에서 빙하-물의 특정한 상태를 흉내 내거나 그것의 소리를 모방하려 하지 않았다. 전보경의 비인간종-되기는 비인간종의 정체성을 찾거나 그것이 가진 이상적 속성을 구체화-시각화하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그보다는 작가와, 퍼포머들과, 비인간 종과 세계의 상징인 빙하-물과 끝없이 관계 맺고 반응하며 흐름 속에서 본능적으로 시간을 채워나갔다. 완결은 없었다. “생성은 언제나 중간에 있다.” 그것은 “둘-사이”이며 “중간을 통해서만 돌출”한다. 하나의 점이 기원적이라면, 생성의 선은 시작이나 끝도, 출발점이나 도착점도, 기원도 그리고 목적지도 없다. “저항할 수 없는 탈영토화”이다.

결과적으로 〈이름 없는 노래: 글래시어 블루〉는 인간과 비인간을 분류하는 경계선을 말할 수 없게 하는데, 직접적으로 경험되는 “비인간성 그 자체를” 증명하는 “창조적인 역행”은 “동시간적인 또 다른 가능성들”을 전달한다. “비규정성과 불확실성의 객관적 지대”, “공통된 또는 식별 불가능한 어떤 것”을 향한 작가의 시도는 그렇게 진행된다.

간결하고 꾸밈없는, 그러나 쉽지 않은 바람 하나. 충돌과 모순과 한계까지도 가능성의 영역으로 흡수하는 이 시도들이 지속되길. 그리고 부서짐이 반복되어 울림을 만들어내길. 다시 만들어지길. 그 모든 과정이 끝나지 않길.

Reference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