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사리(b. 1986)는 버려지거나 방치된 사물과 공간을 다시 바라보고 새로운 의미를 부여함으로써 일상에서 쉽게 지나치거나 잊힌 부분들을 환기시키는 작업을 이어왔다. 특히 주변의 자연 생태계와 비인간 존재에 주목하며, 인간 중심의 질서로부터 소외된 비인간 존재들이 순환하는 구조를 통해 인간과 자연 사이의 관계를 사유할 수 있도록 제안한다.


고사리, 〈버려지는 일기〉, 2009-2010, 하루 동안 집에서 생겨나는 쓰레기 사진기록 © 고사리

고사리의 작업은 작가 개인의 삶에서 경험한 감각들을 사유하고 실천하는 과정에서 비롯된다. 초기의 작업에서 작가는 주변의 버려진 것들과 오래되어 더 이상 반짝이지 않는 것들에 주목하고, 그 사물과 풍경을 기록하곤 하였다.
 
이를테면, 2009년부터 2010년까지 진행된 사진 연작 ‘버려지는 일기’는 하루 동안 집안에서 버려지는 물건들을 1년 7개월의 시간 동안 사진으로 기록하는 작업이다. 일상 속 가치전환의 부산물들을 기록하며 작가 본인의 삶의 궤적으로 살펴보고자 하였다.


고사리, 〈이사〉, 2017, 비닐, 80m2, 가변설치(등촌동 재건축예정집, 서울) © 고사리

한편, 2017년 등촌동의 연립주택과 2018년 성북동의 단독주택에서 두 차례 진행된 ‘이사’ 프로젝트에서는 재건축을 앞둔 건물의 내부 전체를 비닐로 싸매며 사라져 가는 공간에 대한 염(殮)으로서, 개인 혹은 사회 속의 기억과 흔적을 품은 공간을 보내기 위한 준비를 하였다.
 
몇 십년 동안 사람들의 온기로 가득 차 있던 두 공간은, 지난 역사를 뒤로 하고 모두가 이사를 떠난 텅 빈 곳이 되었다. 작가는 마지막을 맞이하고 있는 건물 내부 전체를 반투명한 비닐로 꽁꽁 싸매었다.


고사리, 〈이사〉, 2018, 비닐, 260m2, 가변설치(성북동 빈집, 서울) © 고사리

이는 공간 자체가 마치 이사를 준비하는 듯한 느낌을 자아내는 동시에, 사라져 가는 공간들이 간직한 마지막 숨과 온기를 잠시나마 붙잡고자 하는 것처럼 보였다.
 
이로써 사람의 온기가 떠난 폐허는 걸음걸음마다 바스락거리는 소리를 내고, 바람이 나고 들어 비닐이 들숨과 날숨을 쉬며 살아 있는 공간의 소리를 낸다. 이러한 작업을 통해 작가는 눈에 보이지 않는 공간의 기억과 흔적의 관계들을 겪어내고 걷어내는 시간을 형상화한다.


《우실》 전시 전경(소금박물관, 2020) © 고사리

‘이사’ 프로젝트에서 공간에 축적된 보이지 않는 시간의 감각을 공감각적으로 풀어냈다면, 2020년 개인전 《우실》에서는 마을의 평안을 기원하며 쌓아 올린 돌담 ‘우실’을 모티프로 삼으며 삶의 무게를 시각화하고자 하였다.
 
작가는 먼 옛날 전러남도 신안군의 선조들이 들이치는 바람을 막기 위해 마을의 돌들로 돌담을 쌓아 우실을 만들던 것에 주목했다. 30~200m 내외 길이의 돌담 우실은 마을로 들어오는 나쁜 기운을 막고 마을의 기운이 밖으로 빠져나가지 않도록 보호하며, 인간과 자연을 연결해주는 토속 신앙적 의미도 가진다.


고사리, 〈우실〉, 2020, 비닐 공기주머니, 300m2, 가변설치 © 고사리

고사리는 신안군 증도면에 위치한 레지던시에서 생활하며 신안에 있는 여러 섬에 남겨져 있는 우실을 찾아가 직접 관찰하고, 숨을 가득 채워 부풀린 비닐 공기주머니로 쌓은 새로운 우실을 전시 공간 안에 만들었다.
 
작가는 과거 우실이 마을 내외부의 세계를 이었듯, 삶에 들이치는 모진 바람을 이겨내기 위해 공기를 담은 무게 없는 담을 쌓고, 가라앉는 시간을 지나 생을 살아가며 견뎌내는 삶의 무게에 관한 이야기에 다가가고자 하였다.


《드는봄》 전시 전경(씨알콜렉티브, 2022) © 고사리

한편, 2022년 씨알콜렉티브에서 열린 개인전 《드는봄》은 작가가 실제 농사를 지으며 체감한 생명의 순환을 다감각적으로 풀어낸다. 작가는 흙과 씨름하며 자연에 흐르는 시간 속에 존재하는 작은 순간들을 포착해 규칙적인 변화의 커다란 구조와 반복되는 주기를 작업으로 드러내고자 하였다.
 
버려지고 소외된 생명을 돌보는 작가의 실천은 농사라는 노동과정에 개입함으로써, 흙에서 입으로 다시 흙으로 돌아가는 생명 순환의 리듬을 탐색하는 일로 확장되었다. 이 전시에서 작가는 현실의 미처 알아채지 못한 부분에 주목하고 소중히 여기는 돌봄의 마음을 전하는 방식에서 나아가, 만물의 법칙에서 자연이 순환하는 구조 안으로 들어서서 시간과 공간, 인간과 자연 사이의 관계를 사유할 수 있도록 제안한다.


고사리, 〈땅의 별〉, 2022-2024, 1~3년 간 농사짓고 말린 다양한 식물, 가변설치 © 고사리

먼저, 전시장 입구에는 각종 식물이 매달려 있어 관객으로 하여금 그 사이를 지나가게 했다. 이 식물들(〈땅의 별〉(2022))은 작가가 직접 수확한 농작물들의 먹고 남은 부산물이나 밭에서 수확되지 않은 채 남겨지거나 버려진 식물들을 채집해 조심스럽게 씻어 말려 둔 것들이다.
 
작가는 땅에 뿌린 씨앗이 자라 열매가 맺히고 그것이 다시 땅으로 돌아가는 과정이 땅의 별이 피었다 지는 것과 같다고 보며, 이 작품에 ‘땅의 별’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이러한 작업을 통해 그는 식물이라는 한 생이 끝나고 흙이라는 다른 생으로 이어지는 그 사이의 임시적인 상태를 전시장 내부로 가져왔다.


고사리, 〈퇴비 언덕〉, 2022, 1~3년 간 발효한 퇴비, 가변설치 © 고사리

뿐만 아니라, 고사리는 실제 농사에 사용하는 퇴비를 전시 공간 안에 그대로 가져온 〈퇴비 언덕〉(2022)을 선보였다. 이 작업은 3년이라는 긴 시간 동안, 우리네 삶에서 나온 것들이 흙과 섞이고 발효되며 만들어진 천연 퇴비로 이루어졌다.


고사리, 〈퇴비 언덕〉, 2022, 1~3년 간 발효한 퇴비, 가변설치 © 고사리

겨울이라 얼어 있던 퇴비는 실내 공간인 전시장의 온도에 의해 서서히 녹아내리며, 그 안에서 숨죽이고 있던 생명들을 하나둘씩 깨워냈다. 〈퇴비 언덕〉은 이렇게 알을 깨고 나오는 작은 벌레들, 흙을 뚫고 돋아나 자라고 다시 시들어가는 씨앗들이 보여주는 쉼 없는 흐름을 고스란히 드러낸다. 전시가 끝난 이후 싹이 난 작물은 화분에 옮겨지고, 퇴비는 다시 퇴비간으로 돌아갔다.


고사리, 〈해와 달〉, 2022, 전동장치, 영상, 가변설치 © 고사리

한편, 영상 작업은 〈해와 달〉(2022)은 제목이 시사하는 것처럼 시간에 따라 변하는 해와 달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었다. 옛 선조들은 한 해 농사의 결실을 잘 보기 위해 태양의 움직임을 세심히 관찰했고, 태양이 15일 단위로 15도씩 움직일 때의 기후변화를 24개의 절기로 나누었다.
 
작가는 해와 달의 움직임을 통해 자연의 순환적 생이 해와 달과 지구를 포함한 우주 만물의 리듬으로 이어져 있음을 이야기하고자 했다. 이러한 자연의 순환에 따른 생의 인식을 통해 시간, 일, 월, 년이 단순히 숫자로 이루어진 것이 아님을 상기시킨다.


고사리, 〈제비 자리〉, 2025, 강릉 남대천의 진흙과 지푸라기, 옹기토, 27x27cm / 45.5x27cm © 고사리

그리고 고사리는 2025년 강릉레지던시에 입주하며 제비들의 생애를 관찰하는 일에 몰두했다. 제비는 인간의 거주지 주변으로 찾아와 잠시 머물다가 떠나는 인간 친화적인 생물종이다. 특히 농경지나 낮은 초목 혹은 목초지, 냇가나 개울 근처에 자리 잡은 인간 거주지에 자신의 서식지를 마련하는 것이 특징이다.
 
이는 둥지를 만들기 위한 재료 조달과 먹이 포획의 용이성, 그리고 안전한 번식을 위한 것이라고 알려져 있다. 특히 제비는 습도와 바람에 민감한 특성상 악천후로부터 자신과 새끼를 보호할 수 있는 단층 구조의, 둥지 접착이 용이한 벽면과 처마가 있는 집들을 선호한다.
 
인간과 가까운 생물인 제비는 예로부터 인간이 보살핌을 내어주면 풍요로움을 가져와 은혜를 갚는다고 여겨지며 공생 관계를 이어왔다. 하지만 철근과 콘크리트, 그리고 유리로 마감된 고층 건물이 즐비한 오늘날 도시 환경에서는 제비의 둥지를 발견하기 어렵다.


고사리, 〈제비 고개〉, 2025, 강릉 남대천의 진흙과 지푸라기, 옹기토, 99개의 제비집, 가변설치 © 고사리

고사리는 강릉의 한 시장에서 우연히 제비 둥지를 발견하게 된 것을 계기로, 제비와 관련된 일련의 작업을 진행하기 시작했다. 그중, 〈제비 고개〉(2025)는 제비처럼 시장 주변 강가의 흙과 지푸라기를 주워 와 정성스럽게 제비집을 만들어 가며, 제비와 사람들 사이의 애정 어린 관계를 되새겨보는 작업이다.
 
작가는 대관령의 아흔아홉 구비 고개를 넘어 들던 사람의 ‘땅의 길’과 가을이면 2만킬로를 날아 남쪽으로 날아가는 제비의 ‘하늘의 길’을 떠올리며, 아흔아홉 개의 제비집을 매달아 보았다. 제비 무리가 날아가는 듯, 그리고 아흔아홉 구비 고개가 이어지는 듯이 생과 사의 머묾과 이동이 이어진다.


고사리, 〈제비 은하수〉, 2025, 동그랗게 오려낸 한지, 풀, 창문, 자연광, 가변설치 © 고사리

한편, 동그랗게 오려낸 한지를 창문에 붙여 만든 〈제비 은하수〉(2025)는 매년 한국에서 남쪽을 향해 떠나는 제비의 먼 여정을 지도의 형상으로 풀어낸 작업이다. 수많은 빛을 내며 머나먼 거리를 비행하는 제비의 궤적을 상상하며, 그 눈부신 이동의 흔적을 한지 위에 담아냈다.
 
창을 통해 들어오는 자연광은 한지 위의 궤적을 비추며 사람 곁에 머물러온 존재와의 연결성을 시각화하고, 서로 다른 두 존재의 삶이 공존해 온 관계의 의미를 묻게 한다.


고사리, 〈초사람〉, 2021-, 풀, 마끈, 가변크기 © 고사리

이렇듯 고사리는 우리 주변에서 당연시 여겨지는 작은 비인간 존재들의 생애에 주목하며, 이들의 순환 구조를 통해 생태학적 감수성과 환경의 가치를 되새기는 작업을 제시해 왔다. 인간의 욕망이 낳은 기후 위기와 같은 오늘날의 현실 속에서 그의 작업은, 인간과 자연 사이의 관계를 다시 사유하고 감각할 수 있는 시간과 공간을 마련한다.

"삶 곳곳에 자리한 인지하지 못한 현실의 가치들을 더듬어 살아있는 시간을 함께 하며, 생의 순환과정에서 물리적이고, 정서적인 관계들이 오랜시간 삶에 축적되어 사라지고 남아있는 것들과 마주해 보려 한다." (고사리, 작가 노트)


고사리 작가 © 권진규 아뜰리에

고사리는 울산대학교 서양화과를 졸업하고 홍익대학교 대학원에서 회화과 석사 학위를 취득했다. 최근 개인전으로는 《이립》(한국수출입은행 금고미술관, 서울, 2025), 《무제》(대추무파인아트, 강릉, 2023), 《드는봄》(씨알콜렉티브, 서울, 2022), 《우실》(소금박물관, 증도, 2020) 등이 있다.
 
또한 작가는 《소멸의 시학: 삭는 미술에 대하여》(국립현대미술관, 서울, 2026), 《자연의 영토: 함께-세계만들기에 대한 예술적 물음》(애기봉 평화생태공원 전시관, 김포, 2025), 《우리는 개처럼 밤의 깊은 어둠을 파헤칠 수 없다》(두산갤러리, 서울, 2024), 《삶의 풍경: 오늘도 안녕하세요》(울산시립미술관, 울산, 2023), 《것들, 흔적 기억》(대청호미술관, 청주, 2022) 등 다수의 단체전에 참여했다.
 
고사리는 강릉레지던시(2025), 권진규 아뜰리에 레지던시(2021), ‘소금 같은, 예술’ 국제레지던시(2020), 국립현대미술관 고양레지던시(2019) 등에서 입주 작가로 활동했으며, 그의 작품은 울산시립미술관, 서울시 박물관과에 소장되어 있다.

Reference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