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선형적이며 서구화된 시간
1884년 워싱턴 DC에서
국제 자오선 회의가 열렸다. ‘공통의 경도 0도이자 시간
계산의 표준으로 삼기에 적합한 자오선’을 결정하기 위함이었다. 회의는
불변의 참조점인 본초자오선을 설정함으로써, 보편적 시간 기준의 시행에 동참하였다. 달리 말해 조직과 통제의 체계가 세워져, 나머지 세계의 생활과 사유
구조를 규제할 터였다. 예술집단 블랙 퀀텀 퓨처리즘이 지은 표현대로 이 ‘서구화된 시간 구성체’는 140년
동안 최고의 자리에서 군림해 왔다.
그러한
일치의 풍경과 극명하게 대조를 이루는 전소정의 신작 〈싱코피〉(2023)는 패권적인 시간 기준이 신체와
정신에 가한 피해를 전경에 세워, 현실을 경험할 새로운 접근법을 제안한다. 시공간을 조작하고 무너뜨려 만든 30분 길이의 비디오를 통해 작가는
더 바람직한 가능태의 미래를 불러낸다. 서울, 족자카르타, 파리, 도쿄에서 촬영한 영상과 모바일 테라리움 앱으로 생성한 클립이
뒤섞인 몽타주는 도시들의 시간과 공간을 압축하며 대륙을 힘차게 달리는 시베리아 횡단열차의 기계 운동을 뒤따른다.
노선
길이 9,289km에 달하는 기차의 곡선 여정을 따라가는 〈싱코피〉가 한국의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첫선을
보였다. 이 사실에서 빚어지는 울림이 있으니, 분단국가를
살아가는 한국인에게 세계 최장의 열차 노선은 대단히 상징적인 시도로 남아 있다. 모스크바와 블라디보스토크의
태평양 항구를 빠르게 이어 러시아와 동아시아 간의 교역을 확장할 목적으로 탄생한 이 열차는 한국과 유럽이 더욱 가까워질 수 있었으나 잃어버리고
만 기회를 뜻한다.
미학적, 문화적, 개념적 전환을 일으키며 〈싱코피〉는 시베리아 횡단열차를
가상의 「은하철도 999」로, 즉 행성 사이를 달리는 증기기관차로
변모시킨다. 마츠모토 레이지(松本 零士)의 일본 만화를 직접 인용하며 전소정의 작업은 우주여행을 끌어안는다. 영상의
내러티브는 시베리아 횡단철도 건설의 토대가 되었던 러시아의 만주 및 한반도 확장의 시간과 인류가 정신을 기계 신체로 옮기는 법을 알아내 불멸을
달성하였던 「은하철도 999」의 허구적 시간을 융합한다. 작품은
서구화된 시간이 시공간과 속도를 관리하여 어떻게 민족국가를 건설하고 연결하는지를 상기시킨다. 〈싱코피〉의
핵심에 있는 시베리아 횡단열차를 통해 전소정은 훨씬 훗날인 1955년 한반도 분단으로 막을 내릴 일련의
과정을 촉발하였던 러일전쟁(1904-1905)의 불씨를 지핀 것이 바로 이 철도 건설이었음을 정확히
짚어낸다. 횡단열차는 우리가 살아가는 가속주의 시대의 상징으로도 소환되는데, 그 속도와 선형적 경로를 작가는 능숙하게 전복시킨다. 하지만 아마도
가장 중요한 사실은 시베리아 횡단열차가 작품의 구조에 영향을 미친다는 점이다. 작가의 말을 인용하면
열차는 영상을 실어 나르는 ‘매개체’의 역할을 한다. 작은 빛들이 천천히 프레임 좌측 하단으로 들어와 우측 상단으로 빠져나가는 첫 장면과 스타워즈의 저 유명한 오프닝
크롤을 모방한 마지막 장면도 마찬가지이다. 달리는 기차 안에서 나무를 바라볼 때처럼 벽에 흩뿌려진 검은
하늘을 배경으로 생성된 텍스트는 화면 위쪽으로 저 멀리 사라지는 듯 보인다. 차창은 줄곧 시야를 제한하고
시점을 조건 짓는 스크린 혹은 프레이밍 장치로 기능한다. 전시실에 세운 임시 벽은 이러한 발상을 모방한
것으로, 작품을 드러내면서도 파악하기 어렵게 만든다. 갑자기
한국의 어느 기차역에 경적이 울려 퍼진다. 영화도 이 글도 두 번째 장으로 넘어갈 시간이다.
II. 분기점과 미로
수학에서
분기이론은
주어진 곡선 군의 위상 구조 변화를 다루는 연구이다.
분기이론은 하나의 군 안에서 일어나는 분기를 연구할 전략을 제공한다.
하지만 보통 말로 하면 분기란 길에 난 기로이고,
선의 끊김이다. 열차의 탈선…
한층
효과적으로 구조적 당김을 구사하며, 〈싱코피〉는 두 명의 주인공 사이에서 분기한다. 두 사람 다 뮤지션으로 인생의 행로에서 탈선을 겪었다. 셀리아 휴엣은
프랑스에서 인도네시아의 족자카르타로 이주한 이야기를 작가에게 들려주며 이렇게 말한다. “어쩌면 내 인생의
두 번째 파트가 이렇게 시작되려는 것인지도 몰라.”
셀리아는
영화의 시작 시퀀스에서 우리가 처음 만나는 인물이지만, 박수로 촬영 시작을 알리는 장면이 끝나기 전
아주 잠깐 등장할 뿐으로, 그녀의 작품 등장 자체가 당김하여 이뤄진다.
한국에서 프랑스 가정에 입양된 셀리아는 이미 전소정의 전작 〈Interval. Recess.
Pause.〉(2017)1에 출연한 바 있다. 그녀의 디아스포라 여정은 〈싱코피〉의 중심에 있으니, 인도네시아는
영화의 배경이 되고 때로는 박동하는 심장이 되기도 한다. 이 새로운 고향에서 셀리아는 가믈란 연습을
시작했다. 가믈란은 인도네시아의 자바, 순다, 발리 사람들이 연주하는 전통 합주 음악으로, 주로 타악기로 구성되어
있다. 영화의 중요 장면 중 하나에서 셀리아는 인도네시아에서 세카튼 가믈란 소리를 처음 듣고는 데자뷔
내지 데장탕뒤(이미 들은 듯한 기분)를 경험했다고 말한다. 그러자 재귀하여 돌아가고, 가믈란 음악 역시 재등장하여 장면 내내
이어진다. 악기들의 소리는 작품의 사운드트랙과 구분이 불가능할 정도로 작품에 스며든다. 인터뷰 중 셀리아는 기억의 감각적 차원, 개인과 집단의 경험을 잇는
소리의 잠재력을 강조한다. 어쩌면 그래서 〈싱코피〉에서 셀리아의 회상이 종종 시각이 아닌 소리를 통해
전달되는지도 모른다. 결국에 싱코피란 기억 소실과 동의어가 아니던가?
우리가
마주하는 두 번째 인물은 전소정의 전작 〈이클립스〉(2020)에 출연했던 박순아로, 〈싱코피〉의 4장은 그녀의 여정에 초점을 맞춘다. 북한 가야금을 연주하는 그녀는 재일교포 3세대이다. 조부모님은 한국이 분단되기 전 일본으로 이주하였고, 박순아는 북한으로
건너가 가야금을 배운 뒤 서울에 정착했다. 전통 가야금 연주자로서 박순아는 일본, 북한, 남한의 문화를 종횡한다.
셀리아
휴엣(Celia Huet)과 박순아 두 사람 모두 디아스포라적 여정의 분기점을, 즉 전소정이 애호하는 사이성의 공간을 분명히 드러낸다. 전소정은
본인과 사이 공간의 관계를 논하며, 이렇게 설명하였다. “제가
관심을 가져온 것은 ‘경계에서 벌어지는 일들’과 그 모호함인데, (…) 도시의 속도감 가운데 누락된 개인들의 이야기, 시간, 풍경 등을 다시 쓰기 하는데 애정을 두죠.” 전소정의 작업 전반에
번역과 자역의 개념이 거듭 등장하는데, 〈광인들의 배〉(2016)도
그러한 작품이다. 이 작품에서 전소정은 세 명의 인물을 등장시키는데,
모두 실시간 번역에 참여한다. 낭독을 통해 하나의 문장이 한 언어에서 다음, 그다음, 또 그다음 언어로 차례차례 깎이며 바뀌어간다. 〈싱코피〉는 그렇게 교차하는 길의 이미지에 사로잡혀 있다. 인도네시아
거리의 그래피티처럼 길의 이미지는 때로는 상징적이어서, 머리를 땋은 여성을 그린 그래피티 속 여성은
경계를 넘는 셀리아에 다름 아니다. 베트남의 시인 비키 나오(Vi
Khi Nao)가 가족의 망명에 관해 쓴 글이 떠오른다. ‘대탈출의 혼란 속에서 유산탄과
유리 조각들이 살을 베어 상처로 할머니의 몸에 혼돈의 지도를 새겼고, 훗날 뿌리를 찾는 내게 지도와
나침반이 되어줄 전쟁의 갈림길들을 만들어 냈다.’
신화
속 인물인 카르나(Karna)와 바리데기도 비슷하다. 반신의
자식으로 태어난 그들은 둘 다 삶과 죽음 사이를 떠도는 노마드의 정체성을 상징한다. 그들은 디아스포라적
여정을 나선 방랑자들을 보호하는 부적과 같은 존재이다. 카르나는 미혼의 여성 쿤티(Kunti)가 몰래 낳은 아들이다. 혼전 임신에 대한 사회의 분노를
두려워한 쿤티는 갓 태어난 아들을 바구니에 넣어 누군가 길러주길 바라며 갠지스강으로 떠내려 보낸다. 한편
바리데기는 영혼을 죽은 자들의 땅으로 인도하는 존재이다. 아프리카 요루바 신앙에 나오는 신령, 에슈-엘레그바라(Èṣù-Ẹlẹ́gbára)가 생각났다. 그는
교차로, 시작, 기회를 나타내는 장난의 신으로, 두 번째 기회를 선사하는 존재이다… 이들 모두가 경계의 신이다. 하지만 내가 에슈-엘레그바라에게서 좋아하는 부분은 그가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통제한다는 점이다. 이 신령은 종종 열쇠 한 묶음을 들고 있는 모습으로 그려진다. 장난꾸러기인 그는 시간을 가지고 논다. 가속주의 같은 모더니즘의
선형적 구성체를 우회하며, 그는 탈선한다…
하지만
보통 말로 하면, 분기는 길에 난 기로이고 선의 끊김이다.
전소정의
전시는 미로를 연상시킨다. 관객은 일련의 설치를 지나 이번 전시를 위해 만든 최신작에 다다르게 된다. 제일 처음 마주하는 작품은 전소정의 전작 〈절망하고 탄생하라〉(2020)이다. 한 편의 영상과 조각들을 품은 미로와도 같은 설치 작품으로, 금속
파이프로 만든 곡선형의 통로 구조물이 백화점을 연상시킨다. 영상은 이상의 초창기 시 한 편을 인용한다. 본명 김해경인 이상(1910-1937)은 한국의 가장 유명한 모더니즘
시인 중 한 사람으로, 작품은 그의 시를 통해 한국의 동시대와 근대를 교차시킨다. 이상은「오 마가쟁 드 누보테」(AU MAGASIN DE NOUVEAUTES)라는
제목의 시에서 ‘근대’라는 개념에 의문을 제기하고 근대와
자본주의 경제의 관계를 문제시한다. 이 작품의 첫 전시를 기획했던 큐레이터 안소연2은 시의 수수께끼 같은 특성에 주목했다. 시는 ‘불어 제목’을 ‘일본어, 한자, 중국어, 영어’와 결합한다. 〈싱코피〉의 셀리아처럼 김해경도 디아스포라적이라 할
언어에, 즉 분기하는 길의 공간에 거주한다.
〈절망하고
탄생하라〉는 이런 디아스포라적 질문 몇 가지를 문제 삼는다. 영상이 미래와 과거 사이를 진동하듯, 미로는 그 미래주의적 외양에도 불구하고 19세기에 발명된 워디안
케이스의 디자인을 내비친다. 영국의 제국주의적 연구의 산물인 이 식물상자는 의사인 너새니얼 백쇼 워드(Nathaniel Bagshaw Ward)가 외래종 식물을 본인의 지역 및 시간대로 옮겨오기 위해 발명한 것이다. 1842년 「밀폐 유리상자 내부의 식물 성장에 관하여」라는 논문에서 그는
1833년에 시작한 실험의 내용을 상세히 다루며, 두 개의 유리상자에 영국 고사리류를 넣어
호주 시드니까지 배로 보낸 과정을 설명한다. 내용을 보면 몇 달에 걸친 항해에도 식물들은 건강한 상태로
도착했다고 적혀 있다. 하지만 글을 읽고 궁금해졌다. 그가
식물학 지식을 얻으려 식민적 탐구를 이어가는 동안 과연 다른 식물들은 얼마나 많이 죽었을까… 전소정은
백쇼 워드의 상자를 연구한 다음 상자를 디지털 세계로 옮겨, 모바일 테라리움이라는 애플리케이션 형식의 3D 애니메이션 조각으로 만들었다. 전소정의 표현대로 이 ‘이주하여 흩어진 식물’들은 〈싱코피〉에도 나오는 열대 다육식물인
에피필름, 즉 공작선인장의 씨앗부터 시작해서 퍼져나간다. 비디오에도
등장하고 앱을 이용하면 전체를 볼 수 있는 이 식물-조각들은 새로운 환경 속에 옮겨 놓을 수 있다. 인간과 마찬가지로, 식물들도 ‘여기에
살지만’ 여전히 ‘다른 곳을 욕망’3하는지도 모른다. 〈싱코피〉의 5장에서 프랑스에서의 삶에 ‘적응’하기
어려웠다고 말하는 셀리아처럼 말이다. 에피필름은 밤의 여왕으로, 밤에만
꽃을 피우고 해가 뜨기 전 꽃잎을 다문다. 외래종 식물인 그들은 ‘이곳에
머무를 존재가 아니다’4. 터키에서 그리스로 배를 타고 오다 파도에 휩쓸리고만 4살 유수프와 2살 유누스도 다르지 않았으니, 아이들의 여정은 전시장 안쪽에 자리한 〈광인들의 배〉에서 언급된다4.
마지막으로, 수학의 영역에서 분기이론은 주어진 곡선 군의 위상 구조 변화를 다루는 연구이다. 처음 〈싱코피〉를 보았을 때 떠오른 말이다. 작품의 각 장은 손으로
그린 곡선과 함께 시작되는데, 각각 다른 모양의 물결 패턴이다. 작품이
끝나 크레딧까지 지나고 나면, 모든 곡선이 한꺼번에 다시 나타난다. 마치
분기하던 길들이 다시 한데 모여든 것처럼…
III. 급작스런 산소 공급
저하
1993년 사회학자 폴 길로이(Paul
Gilroy)6는 검은 대서양이라 명명한 이론적, 역사적, 사회적 틀을 논하면서, ‘당겨진 시간’의 효과가 반문화인 동시에 근대성의 구성요소라고 설명하였다. 이듬해, 역사학자 제임스 클리포드(James Clifford)는 「디아스포라」7에서 ‘지워진 이야기를 되찾고’ ‘다른 미래를 상상하는’ 당겨진 시간의 생산적 가능성을 한층 강조하였다. 이 이야기들을 염두에 두면 〈싱코피〉 여행에 도움이 된다.
전소정의
작품명에는 의학의 맥락이 암시되어 있다. 싱코피란 때로 맥박이 느려지거나 중지되어 뇌의 산소 공급이
급격히 저하하여 일어나는 단기 인지 장애, 즉 실신을 뜻하기도 한다.
대부분 자연스럽게 의식이 회복되지만, 실신과 죽음은 밀접한 관계가 있다. 실신은 신체에 대한 궁극적인 통제 상실, 맥박의 중지, 음악과 서사의 중단을 나타낸다. 작품에서 자주 일어나는 방해 중
하나가 작가의 마이크이다. 철도 건널목에서나 카르나 이야기가 나올 때처럼 여러 장면에서 마이크가 화면에
거듭 끼어든다. 마이크의 존재가 이목을 앗아가 유예하였던 불신이 다시 고개 들게 하고, 원활한 흐름을 방해하며, 궁극적으로는 작가의 존재를 상기시킨다.
하지만
당김은 무엇보다도 편집에서 가장 잘 발휘된다. 여러 장면에서 화면은 세 개의 수직 창으로 분할되고, 화면 속 풍경은 조각난 화면으로 나뉘어 들어간다. 휴대폰 카메라로
촬영한 듯한 가운데 수직 창의 화면은 선명하지만, 그 좌우에 나타난 배경 이미지는 확대되어 픽셀화된
광경을 펼친다. 프레임 중앙의 이미지에 변형을 가해 반복함으로써, 우리의
시점을 약간 흐트러뜨린다. 픽셀의 바다 한가운데 전소정은 의도적으로 시선이 움직일 중앙 경로를 만든다. 작가 카트린 클레망(Catherine Clement)이 말하듯, “싱코피는 언제나 소란을 일으킨다. 분별이라고는 모르고, 자기를 보라고 요구해 댄다. [...] 싱코피는 과시하며 자기를
노출하고, 제 흥분이 겨냥한 사람들의 일상생활을 부수고 깨뜨리고 가로막는다.”8
마치
내레이터가 당김의 박자로 광속 여행이라도 하듯, 영화가 진행되는 동안 영상의 리듬은 점점 더 템포와
또 마디와 충돌한다. 바로 그때 한국의 뮤지션이자 DJ인
소월이 무대의 중심에 선다. 흐릿한 배경 앞에서 핑거드럼을 연주하는 모습이지만, 그녀의 몸과 작업대는 중력을 넘어 프레임을 이탈하는 것처럼 보인다. 뒤편의
배경이 기차 안에서 촬영한 서울 도심의 이미지로 변한다. 이미지의 속도는 점점 줄어들어, 거의 휘청이는 수준으로까지 느려진다. 그러다 갑자기 기차가 탈선한다. 시공간 연속체를 벗어나는 도약이다. “결국 우리 모두 다 서로 다른
속도” 소월이 말한다. “그 틈에서만 살게 될는지도 모르지.”
히말리
싱 소인(Himali Singh Soin)의 〈입자와 파도〉(2015)
비디오를 처음 본 후 간격 속에는 무엇이 살까 자문했던 일이 떠올랐다. 이 작품에서 작가는
버지니아 울프(Virginia Woolf)의 『파도』에 드러나는 리듬 패턴을 연구한다. 싱 소인은 소설 전체에서 시간을 재는 요점 삼아 세미콜론만을 남기고 모든 말을 지웠다. 비트, 단어, 시간 사이에는
무엇이 살까? 전소정의 에피필름처럼 비밀스레 퍼져나가 자라는 식물이,
균사체가 있을까? 가믈란이 내는 어긋난 음정의 소리에는 무엇이 살고 있을까?
전소정과
마지막으로 이메일을 나누면서, 박순아가 터득한 가야금 왼손 기법의 핵심인 농현의 개념을 좀 더 설명해
달라고 청했다. ‘농현은 기보화 되지 않은 소리’, ‘빈
공간’, ‘악보 바깥으로 나아가는 여음’이라고 전소정은 답했다. 재미있는 일이지만, 이 작품과 소월에 관해 파고들던 와중에 읽은
인터뷰가 있다. 기자는 소월에게 비트의 정확성에 관해 물었는데, 어떻게
메트로놈이 녹음된 클릭 트랙 없이도 그토록 정확하게 비트를 유지하느냐는 질문에, 소월 역시 그 간극을
높이 샀다. “저는 템포에 집착하는데, 템포는 제게 유리하게
작용할 수도 있고 불리하게 작용할 수도 있어요. 박자에 맞춰 연주하는 것은 저에게 자연스러운 일이에요. 하지만 핑거드럼을 연주할 때는, 드럼을 칠 때 신경 쓰던 것들을
다 잊어버리려고 합니다.” “조금 더 자유로워지죠.” “핑거드럼
연주는 일상에서 벗어날 수 있는 탈출구였습니다.” 어떻게 하면 폴 길로이(Paul Gilroy)가 『블랙 애틀랜틱』에서 촉구하였던 ‘카운터
비트’의 관점에서 행할 수 있을까? 악기 가믈란의 이름은
자바어인 가믈에서 유래한 것으로, 가믈이란 나무망치로 치는 행위, 즉
비트를 뜻한다. 하지만 가야금과도 연결되는 가믈란의 독특한 점은 표준화되지 않은 음계의 합주에 의존하는
악기라는 것이다. 가믈란 한 세트를 이루는 악기마다 각각 음정이 의도적으로 어긋나 있고, 모두를 동시에 쳤을 때에만 공명이 발생한다. 화음의 지점에 다다르는
불협이다…
미술사학자
다리아 칸(Daria Khan)은 앞서《싱코피》라는 동명의 전시9를 기획하며 쓴 글에서 이렇게 말했다. ‘싱코피란 다양한
형식으로 나타나는 ‘부드러운 간격’으로, 음악에서는 강세 없이 ‘비어 있는’
비트로, 언어학에서 음절이나 글자의 단축 생략으로, 의학에서는
부분적 내지는 전면적인 의식 상실로 설명된다. 이번 전시에서 싱코피는 황홀, 지연, 누락, 전치를
은유한다.’ 다리아 칸처럼 나 역시 질문해 본다. 지금과는
다른 시공간 연속체를 위해 싱코피로 틈새 속에 강세 없는 비트를 추가해 넣을 수 있을까? 음운학자와
언어학자들이 이러한 발상에 맞는 개념을 생각해 냈으니, 이를 보조 모음이라 한다. 보조 모음이란 어떤 단어를 발음하기 쉽게 모음 개방의 수단으로 ‘짧은’ 모음 하나를 삽입하는 발음 규칙을 말한다. 잉여 소리라고도 할 수
있겠다. 〈싱코피〉의 마지막 장면은 바로 그 틈새의 공간을 점유한다.
기차가 광속에 도달한 후, 클라이맥스에서 영상은 필름에 난 스프로킷 홀, 필름의 연결 자국, 깜박임 등 아방가르드 영화를 연상시키는 실험적인
특징을 보여준다. 소월이 연주를 마치면, 마치 하늘에 남은
혜성의 꼬리처럼 그녀의 몸이 단속적인 슬로우모션으로 오류를 일으키며 잔상을 남긴다.
이
글을 쓰며 마지막 줄에 다다르자마자, ‘단서들’이라는 이름의
불가사의한 PDF 문서를 받았다. 전소정은 문서에서 이렇게
밝혔다. ‘농현은 가야금 연주에서 원래의 음 이외 여러 장식음을 내는 가장 특징적이고 중요한 주법이다. 기보화 되지 않은 농현은 객관적이며 주관적이다. 꿋꿋한. 큰 파도와 같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