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방가르드는 포기하지 않는다》 전시전경 © 아라리오갤러리

‘아방가르드’라는 말은 특정 지대와의 급진적 이탈과 단절을 우선적으로 환기한다. 현대미술의 맥락에서 이는 전례에 기대 현재를 해석하는 아카데미즘을 넘어서고, 예측 불가능한 관객과의 관계를 거부하려는 시도로 나타났다. 또 제도 내부로의 완전한 포섭을 거부하고, 동시대 유행의 흐름에 종속되지 않으며, 이해 불가능한 상태로 남으려 했다. 이러한 태도는 아이러니하게도 모더니즘 미술이 강조한 순수성과 자율성을 입증하는 핵심 조건으로 간주되었다.

이러한 시도는 동시에 실패로 규정되기도 한다. 역사적 아방가르드는 예술과 삶의 통합이라는 근본적 과제를 실현하기보다 배반했으며, 순수주의적 미학 혹은 자본과 시장이라는 강고한 제도 속으로 편입됨으로써 전위적 잠재력을 상실했다는 이유이다. 급진적 단절을 추구했던 기획이 결국 제도의 포섭 속에서 무력화되었다고, 공허한 미적 알리바이로 환원되었다고 여겨진다. 이 같은 아이러니 속에서 혁명적 가능성을 탐색하는 시도는 제도적 허구성으로 귀결되고 마는 이중적 위치에 놓이게 된다.

그리고 이 ‘실패’의 개념은 다시 사고된다. 애초에 아방가르드가 부르주아의 지지와 명확한 역사적 의식을 전제로 전개되었다는 점을 고려하면, 그 무력화나 제도적 편입은 단순한 좌절이라기보다 자기 속성의 일부였던 것은 아닐까. 극단적으로 말해, 이른바 ‘실패’는 오히려 아방가르드를 지속시키는 동력은 아니었을까.

그렇다면 아방가르드의 역사는 단순한 성공과 실패의 도식으로 환원되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것은 자기 파괴와 제도적 포섭 사이에서 반복적으로 발생하는 긴장과 역설 속에서 비로소 이해될 수 있을 것이다.


《아방가르드는 포기하지 않는다》 전시전경 © 아라리오갤러리

인세인박의 이번 개인전 《아방가르드는 포기하지 않는다》는 그 제목에서 드러나듯 아방가르드의 실패와 좌절을 분명히 인지한다. 그렇다면 전시에서 그 실패는 어떻게 드러날까, 또 무엇을 포기하지 않고 있을까. 작가는 아방가르드의 성패를 단순히 목표 달성 여부로 가늠할 수 없다고 전제한다. 오히려 최초 설정된 목표를 이루지 못했다는 사실, 곧 실패(의 흔적) 자체를 아방가르드적 가치를 재확인하는 단초로 삼는 듯하다.

이와 관련해 작가는 자신의 작업 노트에 2017년 유럽 방문 경험을 상세히 기록한다. 오래된 건물 외벽을 뒤덮은 끝없는 낙서와 그래피티의 행렬은, 마치 반달리즘으로 세워진 도시와도 같은 인상을 남긴다고, 그리고 그 흔적은 단순한 파괴의 결과가 아니라고 적는다. 그것은 무엇인가를 지우고 다시 쓰려는 욕망이 뒤엉킨 도시의 일부였고, 과거의 실패가 아닌 현재 진행 중인 풍경으로 다가왔다고 말한다. 작가는 시간을 관통해 남겨진 낙서들 속에서 실패로 단정할 수 없는 전위적 생명력을 포착했을지도 모른다.

실패와 성공, 파괴와 창조의 경계가 분리되지 않은 채 얽혀 있는 장면에서 아방가르드적 언어가 여전히 전복적 가능성을 지닌다고 본다. 다시 말해, 성취되지 못한 외침과 그 흔적을 여러 질서와 욕망의 틈새에서 발생하는 얽힘의 장면으로 마주하며, 이를 여전히 지속 가능한 현재의 장면으로 전환하는 것이다. 그렇게 작가는 아방가르드적 가치, 혹은 그 실패의 개념을 재고하며, 그것을 도시의 맥락 속에서—때로는 시간과 공간을 망상적으로 가로지르며—새롭게 경험하려 한다.

같은 맥락에서, 이번 전시는 서로 다른 조건과 질서가 얽혀 있는, 때로는 상호 충돌하고 배반하는 일련의 작업들을 포함한다. 예컨대 〈아마추어 반달러를 위한 일회용 마스크〉(2025)는 반달러들이 착용하는 마스크가 인쇄된 비닐봉지 10,000장을 제작해, 갤러리 공간에 설명서와 함께 설치하고 배포한다. 이어 제작된 〈아마추어 반달러를 위한 일회용 마스크 키트〉(2025)는 종이 상자 안에 비닐, 스프레이, USB 등을 구성하여, 반달리즘이라는 체제 부정적 행위가 하나의 패키지로 소비·전시·소장되는 아이러니한 장면을 연출한다.

이 과정에서 파괴의 충동조차 상품화되어 제도 안에 편입되는 모습은, 오늘날 세계 곳곳에서 목격되는 전복적 열망과 반달리즘적 행위의 한계와 모순을 동시에 드러낸다. 급진적 행위를 위한 도구들이 썰렁한 농담처럼, 혹은 자기모순적 자폭의 장면처럼 전시되는 것이다.

작가는 바로 이러한 자기 해체적 장면을 통해서 아방가르드적 상상이 여전히 유통될 수 있는지, 그렇게라도 체제 부정의 행위가 지속될 수 있는지 묻는다. 그것은 일방향적 실천이 아니라, 제도와 체계에 기생하며 스스로의 불능을 고백하고, 동시에 그 가능성을 끈질기게 상기시키려는 시도로 다가온다.


《아방가르드는 포기하지 않는다》 전시전경 © 아라리오갤러리

또한 작가는 갤러리에 그래피티 낙서를 하는 등 공간 일부를 훼손한 것처럼 연출한다. 그래피티와 반달리즘적 행위를 미술의 형식과 공간으로 끌어온다는 설정은 파괴의 충동과 전복적 에너지가 미술 형식으로 귀결되는 과정을 적나라하게 드러내며 ‘진짜’와 ‘가짜’의 경계 한가운데 작업을 위치시킨다. 작가는 이러한 상황이 전시를 위해 고안된 일종의 모조품, 곧 ‘가짜 아방가르드’에 해당하는지 자문한다.

동시에 그것이 단순한 위장이나 표면적 재현에 머무르지 않고 전복적 욕망을 내포한 또 다른 실천이 될 수 있는지를 묻는다. 이는 제도를 실제로 붕괴시키기보다는 제도 내부에서만 작동할 수 있는 장치들을 구성하는 행위와 함께한다. 결국 작업은 역사적 아방가르드가 경험했던 실패의 장면을 재현하는 동시에, 그것이 다른 방식으로 변주되어 작동하는 국면을 모색한다. 따라서 ‘가짜’라 불릴 수 있는 이러한 실천은 단순한 위장에 머무르지 않는다.

오히려 스스로 허위임을 자각한 채 실패의 일부처럼 존재한다. 실제 파괴가 불가능해진 시대에 허구적 시도가 현실의 표면을 흔들고, 감각과 상상력을 자극하며, 기존 질서와 권위의 취약성을 드러낼 수 있는지 탐색한다. 전시는 반달리즘을 상품과 설정, 작품으로 대체하며 모종의 균열과 상상적 장면을 형성하고, 바로 그 지점에서 ‘더욱 분명하고 날카로운 가짜/실패’의 가능성을 인지하려 한다.

실패와 허위 안에 스스로 위치하려는 시도는 전시에 포함된 일련의 영상 작업에서 더욱 두드러진다. 예컨대 2022년작 〈Post Vandalism〉에서 작가는 서울시립미술관 남서울분관의 실내외를 붉은 스프레이로 훼손한 듯 연출하고, 미술관 입구에는 ‘Insanepark solo exhibition vandalism’이라는 가상의 배너를 설치한다. 미술관 외벽에는 ‘artist fee’를 ‘artist pee’로 비튼 낙서와 ‘모든 예술은 프로파간다다’, ‘미술관을 불태워라’ 등의 문구를 덧입힌다.

2024년 태국 레지던시에서는 지역 주민들과 함께 대나무와 흰 천으로 제작한 배너 위에 그래피티처럼 스프레이 낙서를 덧입히고, 방콕 예술문화센터(BACC)를 훼손하는 가상의 영상 〈post vandalism (BACC)〉(2024)을 선보인다. 또 〈Burning down the museum〉에서는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이 화염에 휩싸인 장면을 인스타그램 라이브 방송 형식으로 가상 연출한다.

일련의 작업들은 디지털 환경 속에서 제도의 안전성과 권위를 동시에 해체한다. 나아가 반달리즘이 지닌 폭력성과 전복적 성격을 농담, 사회적 소통, 혹은 허구적 시스템으로 전치함으로써, 파괴적 행위가 당대적 조건 속에서 어떻게 존재할 수 있는지를 사고한다.


《아방가르드는 포기하지 않는다》 전시전경 © 아라리오갤러리

작가의 작업은 실패를 넘어서는 ‘가짜’의 허위성을 적극 끌어안는다. 파괴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제도적 틀 안에서 허용된 실험에 머물며, 위태로움과 무력함을 동시에 자각한다. 작가는 바로 이 위태로운 허위성 속에서 전위적 가능성을 탐색하는 듯하다. 실질적 전복이 불가능하다고 여겨지는 시대에, 상상적 허구를 현실의 표면 위에 강제로 덧입히는 행위야말로 오늘날 취할 수 있는 하나의 급진성이라고 믿는다. 그리고 이러한 실천은 추상적 가상성에 머무르지 않는다.

오히려 구체적 장소와 조건에 의존하며 모종의 현실성을 포섭하려 한다. 낙서는 벽 위에서만 가능하고, 균열은 구조 위에서만 발생할 수 있음을 명확히 드러낸다. 그렇게 일회용 마스크와 키트, 인스타그램 라이브 방송, 편집된 가상의 영상들은 공허한 연출이 아니라, 물질적·제도적 구체성 속에서 생명력을 얻는다. 여기서 작업은 단순한 파괴나 완전한 창조가 아닌, 오늘의 조건을 인지하고 그 위에 아방가르드적 균열을 표지하려는 시도로 이해될 수 있다.

이번 전시는 실패할 것을 알면서도 반복되는 시도, 파괴의 불가능성을 알면서도 그것을 가장하는 몸짓, 허구를 자처하면서도 그 너머를 상상하는 시도를 결집한다. 이러한 반복적 실패 속에서 오래된 선언은 다시 확인된다. 그렇게 작가의 아방가르드는 포기하지 않는다.

Reference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