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프리즈 서울, 클라인의 금괴, 김정모의 시간
9월의 서울, 코엑스 전시장은 세계 미술 자본이 한국을 시험대 삼아 밀집적으로 교환되는 실험장이 되었다. 가고시안, 하우저앤워스, 페이스, 데이비드즈워너 같은 세계 최고의 갤러리들이 몰려들어, 부스마다 수십억 원대의 작품들이 오가는 열기로 가득 찼다. VIP 오프닝 날, 마크 브래드포드의 대형 캔버스가 450만 달러(약 62억6000만 원)에 팔리며 프리즈 서울 역대 최고가를 경신했고, 조지 콘도의 신작과 루이즈 부르주아의 조각 역시 기록적인 속도로 거래되었다.
이곳에서 작품은 단순한 미적 대상이 아니라, 자본의 네트워크와 희소성, 그리고 세계적인 수요가 얽혀 만들어내는 가격의 메커니즘 속에서 가치를 부여받는다. 화이트큐브에 걸린 작품은 더 이상 고유한 ‘작품’이 아니라, 하나의 금융 상품처럼 가격과 가치를 등식으로 묶는 시장의 언어 안에서 의미를 획득한다.
그러나 가격이 곧 가치로 등치되는 순간, 작품은 예술적 경험의 층위를 상실한다. 시장은 가격을 통해 작품의 위상을 규정하지만, 그 과정에서 작품은 자본의 지표로 전환되며, 감각적이거나 사유적 잠재성은 구조적으로 지워진다. 이 긴장은 1950년대 프랑스 예술가 이브 클라인(Yves Klein)이 전례 없는 실험을 통해 드러낸 바 있다.
1959년 3월 《움직이는 비젼(Vision in Motion)》에 참여한 클라인은 자신의 전시 공간을 텅 비워두고 작품을 거는 대신 오프닝에 모인 청중에게 “우선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으며, 그리고 더 심오한 부재가 있고, 또 더 깊어진 청색이 있다”고 외쳤다. 작품은 어디 있는지 묻는 큐레이터에게 “여기, 바로 내가 말하고 있는 순간에”라고 답한 후 1kg의 순금 덩어리를 그 작품 가격으로 요구했다.
클라인에 따르면, 회화는 미술의 재(灰)일 뿐이며 그 정통적인 특성은 한번 창조되면 보이지 않는 것으로 회화적 감수성 안에서 물질로 환원된다. 따라서, 작가인 자신이 발언하는 순간 순수 물질(raw material)로서의 회화적 감수성이 특화되었고, 그 가치는 순금으로 교환될 수 있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었다.
클라인은 이 실험을 더욱 급진적으로 밀어붙여, “무형(비물질)”을 실제 경제적 거래와 의례 속에 위치시켰다.〈비물질적 회화적 감수성의 영역(Zone de Sensibilité Picturale Immatérielle)〉(1959)에서 작가는 물리적 대상이 없는 작품을 쪼개서 금값을 받고 판매하고, 금괴를 지불한 관객은 “무형의 영역”을 소유했다는 영수증을 받는다. 그러나 진정한 소유는 영수증을 불태우고, 클라인이 금의 절반을 센강에 던지는 의례를 통해서만 완성된다.
결국 남는 것은 물질도 기록도 아닌, 소각과 투척이라는 행위 그 자체이다. 이 의례적 퍼포먼스는 단순히 “보이지 않는 작품”을 판매하는 엉뚱한 제스처가 아니었다. 클라인은 예술의 본질을 소유할 수 없는 것, 즉 공허와 감수성의 차원으로 전환시키고자 했던 것이었다. 클라인은 “작품이란 무엇인가”라는 오랜 질문을 가장 기묘한 방식으로 다시 던졌다. 그림도, 조각도, 설치도 없지만 그는 거래와 의례, 불태움과 흘려보냄을 작품으로 제시했다.
김정모의 작업은 미술품의 가치를 순수 교환가치로 분리해 낸 클라인의 실험을 동시대적으로 갱신한다. 그는 클라인이 열어젖힌 화두를 동시대적으로 다시 이어받으며, 예술의 가치와 비생산성, 무형성에 대한 질문을 오늘의 서울, 오늘의 미술 제도 속에서 다시 던진다. 2013년 본격적으로 한국 미술신에서 활동하기 시작한 김정모는 제도와 시장이 만들어내는 효율적, 생산적 가치 체계에 균열을 내는 방식으로 작업을 전개해왔다.
그는 계약서와 봉투, 줄을 서는 시간, 숨을 참는 퍼포먼스, 무심히 찍히는 발자국 같은 장치들을 작품의 중심에 배치한다. 이 장치들은 전통적인 예술적 매체와는 달리 성과를 산출하지 않고, 관객에게도 ‘소유’의 확실성을 보장하지 않는다. 대신 관객은 낭비된 시간, 비어 있는 봉투, 무용한 제스처 같은 사소한 흔적들 속에서만 작품을 경험할 수 있다.
이 글에서는 김정모의 대표작들〈시간-예술 거래소〉(2022), 〈프로파간다 룸〉(2022), 〈당신의 발밑에서〉(2021, 2025), 그리고 최근작 〈비생산적인 미술을 위한 의식〉(2025) 을 경유하며, 그의 작업이 ‘비생산성의 의례’를 매개로 어떻게 오늘의 예술 제도를 교란 하고 새로운 감각적, 사유적 지평을 열어가는지를 추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