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두운 밤, 어딘지 모를 곳, 작은 불꽃놀이가 시작된다. 나름 낭만적으로 보이는 이 불꽃은 우리의 기억 속에 오늘을 새기고 내일을 꿈꾸게 하는 듯하다. 불꽃을 따라가다 보면 이것이 어떤 글자임을 알 수 있다.
‘LIFE IS SHORT BUT’. 이는 김정모의 2014년 작 〈Life is Short But(Failed)〉의 일환으로 진행된 불꽃 점화 프로젝트이다. 작가의 작품으로 이를 다시 바라봤을 때, 이것이 단순히 아름다운 불꽃놀이 정도의 해프닝이었다면 동시대 예술로는 수준 미달일 것이며, 그렇게 단정 짓기엔 이 단어가 말하고자 하는 바가 그리 가볍지만은 않아 보인다.
작가의 설명에 따르면, 본 작업은 작가가 어떤 조각가의 어시스턴트로 일하던 시절 자신의 임시적이고 한시적인 작업의 성격과 그 조각가의 (반) 영구적인 조각이 갖는 어떤 차이에서 기인했다고 한다. 아마 그는 미술이라는 동일한 카테고리에 속하지만 ‘기념비’와 ‘덧없음’으로 나뉘는 지점에서 ‘예술’의 아이러니를 직감했을 것이다. 그렇게 인생은 짧고 그보다 더 짧은 것이 자신의 작업이라는 생각에 다다르자 그는 ‘Life is short but art is shorter’라는 구절을 만들고, 그중에서 ‘Life is short but’을 ‘더 짧은 예술’의 형식으로 승화시켜보고자 했다.
그리고 그는 계획된 대로 돌아가지 않게 된 상황에서 결국 실패를 맛본다. 이 작업을 기록한 영상을 다시 보면 아름답고 (혹은 아름다워야 하고), 짧은 순간이기에 더 기억에 남아야 할 불꽃은 자꾸 꺼지길 반복하고, 심지어 그리 아름답지 못한 복장을 한 이가 거칠게 급조한 장대로 어떻게든 이 세레머니를 이어가고자 하는 안타까운 의지만 내비칠 뿐이다.
흥미로운 것은 김정모는 이 작업에, 더 정확히는 ‘실패’에 (원래와는 다르게 ‘(failed)’를 붙여) 제목을 짓고, 해프닝의 문법 안에서 계획과 실행 사이에서 발생한 낙차와 오류를 다시 작업의 핵심으로 가져온다는 점이다. 과정적 차원에서 보자면 이러한 오차는 곧 가능성으로 치환되고, 그다음의 의미를 생산하기 위한 단계로 이해되곤 한다. 하지만, 그의 작업에서 이 ‘실패’는 행위의 성패를 결론지어 버림으로 시선을 작품에서 창작 주체의 입장으로, 즉 그가 가진 작가적 태도로 돌리게 한다. 다시 말하면 그에게 예술은 단단한 물질로 이루어져 잘빠진 형태가 아닌, 아이러니를 내재한 채 충동하기 직전의 어떤 상태를 살피는 일과도 같은 것이다.
사실 이 실패는 단어가 주는 어감만큼 그리 비극적인 것만은 아니다. 오히려 이 순간에 우리는 몰랐던 사실을 깨닫는 경우도 있다. 작가의 행위가 실패로 돌아가는 순간 그것을 실패할 수밖에 없게 만드는 실패 이면의 숨겨진 민낯이 드러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때부터 우리가 알던 평온한 일상에는 균열이 생기고, 당연시했던 규칙은 아이러니가 되어 버린다. 〈PBC Cafe Project〉 (2014)에서 작가는 탄천 산책로에 시민을 위한 간이 점포를 설치한다. 그리고 그들에게 잠시 쉬어갈 자리와 함께 음료수를 판매한다.
여기서 재미있는 상황을 목격하게 된다. 무허가 상거래는 언제나 쫓겨나는 처지가 되기 마련이지만, 국가의 주요 행사를 앞둔 상황에서 국가 행정은 일시적으로 중지한다. 그렇게 작가는 장사를 하고, 이 행사는 단속에 의해 종료된다. 들어간 비용을 따져보자면 순이익은 0원에 가깝다. 결국 이익을 남기지 못한 경제활동은 실패로 돌아가지만, 이는 국가적 차원의 일시적 기능 마비, 더 큰 차원의 실패를 마주하게 한다.
〈PBC Cafe Project〉가 의도치 않게 우리 사회의 합의-규칙의 오작동을 고발했다면, 〈스튜디오 개선 프로젝트〉(2014)에서는 적극적으로 자신을 포함한 특정 집단이 처한 환경의 조건에 대해 고민한다. 영국 유학 시절 배정받은 스튜디오 환경의 문제점을 파악하고 그 공간을 물리적인 차원에서 개선하고자 시작한 이 프로젝트를 위해 그는 몇 가지 절차를 선행한다.
첫째로 그는 가상의 회사를 설립한다. 이는 보다 공식적인 차원에서 전문성을 과시하기 위한 외피를 갖춰 입는 일이며, 이로부터 그는 사람들의 신뢰를 얻을 수 있게 된다. 또한 틀을 갖춰 작성한 제안서를 통해 학교 측과 다른 사용자의 동의를 구하게 된다. 이러한 형식적 절차를 거침으로 그는 실제로 공사를 할 수 있게 되고, 이는 곧 실질적인 효력으로 일상의 차원에 깃들어 당연하게 감수했던 상황을 불편함으로 인지하게 만든다.
여기서 김정모의 실천이 성립하기 위한 배경을 조금 더 살펴볼 필요가 있다. 이것은 현실의 실질적이고 물질적인 차원의 것이 될 수도 있고, 예술이나 언어와 같이 개념적인 것이 될 수도 있다. 또한, 거시적인 차원에서 모두를 포함하는 세계(관)일 수도 있으며, 때로는 미시적인 차원에서 특정 커뮤니티를 대변하는 범위에 한정될 수도 있다. 확실한 것은 이 배경이 공동의 합의로 이루어진 규칙과 개념 위에서 작동하는 사회의 일면이라는 것이며, 작가는 그 위로 새로운 관계를 위한 상황을 설계하기도 한다는 것이다.
〈The Souvenir Store〉(2016)라는 작업을 예로 들면, 그는 졸업전시회라는 특별한 이벤트에서 그와는 맥락이 조금 빗나가는 아트숍을 개설한다. 앞선 〈스튜디오 개선 프로젝트〉와 같이 그는 우선 전시회 참여자들의 작품을 사용하기 위해 동의를 구한다. 그리고 그들의 작업을 자의적으로 해석하고 재구성하여 상품의 형태로 판매한다. 이러한 행위는 작업에서 원작자를 때어놓음으로써 작품을 표피적인 심미적 취향에 종속된 선택의 기로에 놓인 사물로 탈바꿈시킨다.
과연 작가의 개념이나 동인이 소거된 채 미적 유희와 소비의 대상이 되어버린 이들-작품은 무엇을 기념하는 상품(souvenir)이 되는가. 또한 김정모는 작가 레지던시라는 조금은 특별한 장소에서 자신에게 할당된 스튜디오를 재난 대피소라 명명하고 관객을 초대한다. 〈재난 프로젝트〉(2017) 작업을 지속하고자 하는 젊은 작가에게 현실은 언제나 고달프며, 작업적 역량의 발전이나 외연의 확장, 네트워킹 등을 보장할 것만 같은 레지던시 프로그램은 이러한 현실-재난으로부터 대피하여 잠시나마 몸을 추스를 수 있는 곳일지도 모른다.
작가는 대피소의 개념을 빌려 재편한 이곳에서 관객을 초대하고, 각자가 당면한 현실의 재난을 나누길 요구하며 미적 체험이 공유의 차원으로 전이될 수 있는지를 실험한다. 또한 이를 통해 미디어가 만들어내는 재난의 이미지가 아닌 실재하는 재난을 감각하길 바라는 듯하다. 여기서 한 발짝 더 나아가 〈무단 점유하기〉(2018)에서는 전시라는 형식 아래 물리적으로 구조화되는 것들에서 소거된 맥락을 복권하고자 한다.
김정모는 전시에는 참여는 했으나, 전시 안 또 다른 프로젝트 성격으로 참여했기에 ‘참여 작가란’에 자신의 이름을 올릴 수 없다는 사실을 듣고는 관객 참여형 퍼포먼스를 계획한다. 그렇게 그는 관객에게 자신이 준비한 도구(화려한 가림막과 종이 테이프 등)와 점유 매뉴얼을 제공하고, 이에 따라 전시를 관람할 것, 정확히는 ‘점유’할 것을 제안한다. 그리고 결국 전시의 사진에는 작품으로 향하는 시선을 가로채며 전시장을 점유한 채 사방으로 펼쳐진 점유 도구들이 만들어내는 풍경이 담기게 되었다.
이는 하나의 주제로 합의된 전시라는 장 안에서 언어가 속박하고 규제하며 틀지어 버리는 것으로부터 어긋나고 미끄러져 나감으로써 규정된 합의의 틈새에 새로운 시공을 확보하는 행위로 볼 수 있다. 이는 결국 ‘본 전시’와 ‘부대 행사’가 놓이는 위계를 전복하고 해체하여 우리가 정보로 받아들이는 표면 아래의 사실을 가시화시키는 것이기도 하다.
사회적 환경은 언제나 합의를 거쳐 세워진 규칙과 조건 위에서 작동한다. 이는 우리의 삶에서 순간순간 치솟는 역동적인 순간들을 다스려 일상의 잔잔한 표면만을 의식하게 만든다. 김정모의 작업은 이러한 합의가 만들어낸 표면 아래로 흐르는 이 사회의 실체를 들여다보고, 이 합의로부터는 기대할 수 없었던 전혀 다른 가능성을 제안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그것은 이전에는 볼 수 없었던 새롭고 경이로운 세계는 아니다. 오히려 잔잔한 일상의 동일한 시간과 장소에서 동시에 존재하는 서로 다른 단면일 뿐이다.
그저 동전의 앞면과 뒷면처럼 서로 붙어 하나로 수렴되지만, 다른 방향을 마주하고 있는 것들이다. 김정모의 작업에서 이러한 이면은 실패나 0원, 오작동, 기능적이지 못한 스튜디오, 전시와 같은 것들로 가시화되며, 이들은 사회적 합의에 내재하는 ‘아이러니’를 지시하는 발음만 다른 동일한 단어라고 볼 수 있다. 그의 작업은 언제나 실패를 향하기에 아이러니와 아주 가까운 거리를 확보할 수 있게 된다. 이쯤 되면 작가에게 실패는 아이러니에 도달하기 위한 목표이고 성공이라 할 수도 있겠다.
앞서 서술한 일련의 작업이 보여준 아이러니가 처음부터 의도된 결과였다고 할 수는 없을지도 모른다. 그것은 어쩌면 김정모가 다소 어설프거나 너무 정직해서, 혹은 너무 완벽하게 계획을 세우는 과정에서 의외의 변수를 헤아릴 시간을 갖지 못했던 탓일 수도 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아이러니가 그의 작업의 중핵에 놓이며, 이것이 가시화되는 순간을 위해 그는 소위 좋은 게 좋은 것이라는 식의 태도를 경계하고, 딱히 들춰보고자 하지 않았던 상황들에 굳이 더 촉각을 세운다는 점이다.
그렇게 김정모는 언제나 기존의 틀이나 눈앞의 규칙을 계속해서 의심하고, 새롭게 설정한 상황 안에서 방향을 가늠하여, 자신의 실패를 경로 삼아 당연하게 받아들여 온 합의의 반대편 누락된 사실에 도달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