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근욱(b. 1985)은 원자, 분자와 같은 우주의 미시적 질서에 대한 관심을 바탕으로, 캔버스 위에 반복적으로 그은 선들로 비선형적인 감각을 구현해 내는 작업을 이어왔다. 철저하게 계산된 규칙과 정직한 선 긋기를 통해 만들어진 지근욱의 기하학적 무늬는 특유의 밀도와 결을 형성하여 시각적 진동을 일으킨다.


지근욱, 〈Actual Dynamics - Symmetry 10021〉, 2015, 캔버스에 색연필, 각 46x46cm © 지근욱

이러한 지근욱의 작업은 ‘중력을 추상으로 표현하고 싶다’는 생각에서 출발했다. 이를 구현하기 위해 그가 찾은 방법은 반복적으로 선을 긋는 행위였다.
 
작가는 색연필과 자를 이용해 일정한 방향과 간격을 따라 촘촘하게 화면을 메워 나간다. 이 집요한 과정을 거쳐 캔버스 위에 모인 선들은 마치 보이지 않는 우주적 질서에 의해 모인 무수한 소립자들이 하나의 형태를 이루는 듯한 모습을 띠게 된다.
 
그렇게 만들어진 선들은 미세한 파동을 만들어 내며, 보는 이의 시선을 어느 한 점에 고정하지 못하게 한다. 관객은 그의 그림 앞에서 무수한 선들 사이를 유영하며, 단순히 이미지를 읽는 것이 아닌 그 흔적을 좇게 된다.  


지근욱, 〈Actual Dynamics - 2444〉, 2018, 캔버스에 색연필, 270x700cm © 지근욱

초기의 작업에서 지근욱은 자율성이 제한된 상태에서 구현되는 엄격한 질서로 소립자의 움직임이 일으키는 미묘한 역동성을 회화로 다루고자 했다.
 
예를 들어, 색연필 선이 화면 중심으로 수렴하는 ‘Actual Dynamics’ 연작과 다중 시점의 파열된 구조를 보여주는 〈Cohesive Sphere Wave Ver〉에서 그는 점, 선, 면의 관계를 재구성하며 평면에 입체적 깊이와 운동감을 부여한다. 특히 색과 밀도가 다른 선들의 중첩을 통해 원근감과 진동하는 시각적 에너지를 만들어내며, 정적인 평면 안에서 본래 성격과 충돌하는 이질적인 입체감을 조성한다.


지근욱, 〈Cohesive Sphere Wave Ver.〉, 2018, 캔버스에 색연필, 아크릴, 각 102x102cm (13점) © 지근욱

이처럼 정적이고 고정된 듯 보이는 회화 안에서 수많은 선들의 중첩을 통해 미세한 시각적 진동과 움직임을 생성하는 그의 작업은, 끊임없이 운동하는 소립자들의 집합으로 이루어진 우주가 거대한 질서 속에서 고요하게 존재하는 모습과 닮아 있다. 작가는 이러한 역설적 관계를 화면 위에 구현하며, 보이지 않는 운동과 에너지의 흐름을 감각하게 한다.


지근욱, 〈Curving Paths - 021〉, 2019, 캔버스에 색연필, 64x64cm © 지근욱

이 일련의 작업에서 방사형의 직선을 주된 요소로 사용했다면, 2019년도에 발표한 ‘Curving Paths’ 연작에서는 곡선이라는 새로운 요소를 작업의 중심으로 가져왔다. 직선과 마찬가지로 곡선은 그에게 있어 동적인 이미지를 표현하는 요소가 된다. 
 
한편 소실점에 무게를 집약한 전작과 달리, 곡선을 도입한 회화에서는 집중과 분산이 화면 전반에서 일어난다. 목적지를 생략하고 연속성을 강조하는 이 새로운 조형은 멈추지 않는 파동을 암시한다.


《하드보일드 브리즈》 전시 전경(학고재, 2023) © 지근욱

이후 지근욱은 익숙한 선의 변주를 넘어 조형적인 측면으로도 관심을 두며, 눈을 넘어선 감각 체계에 낯선 자극을 일으키는 방향으로 작업의 지평을 넓혀 나갔다. 2023년 학고재에서 열린 개인전 《하드보일드 브리즈》는 이러한 작업의 전환점을 엿볼 수 있었다.
 
전시에서 작가는 내면세계에 응집된 시선을 외부 세계로 일으키는 것, 이에 나아가 작업과 외부 세계의 관계망을 고민한 지점을 풀어냈다. 출품작인 ‘Inter-rim’와 ‘Inter-wave’, ‘Inter-shape’ 연작은 캔버스 화면에 색연필로 칠한 색의 심층과 짙은 색의 표층의 다른 층위를 주어 미묘하게 화합하는 경지를 그려낸다.


지근욱, 〈Inter-shape Collider〉, 2023, 캔버스에 색연필, 아크릴, UV 프린트, 약 230x230cm © 지근욱

이와 더불어, 복수의 캔버스로 구성된 작품들은 서로 간 일정한 간격을 띄운 형태로 설치되어 화면 사이 공백을 유예한 채 파동이 이어지는 모양새를 가진다. 평범했던 흰색의 벽면은 흘러가다 끊어지는 물결의 자리가 되어 다양한 정서의 백색 소음이 스미는 공간이 된다.
 
이러한 지근욱의 회화는 자신이 자리를 잡은 공간의 규모에 따라 조금씩 다르게 목격됐다. 작품이 설치되는 장소의 특성만큼이나 화면 자체의 형태와 면적에 따라서도 바라봄의 경험이 달라지곤 했다. 가령, ‘Inter-shape’ 연작에서 개별 화면은 수직 수평의 직선을 팽팽하게 교차시키며 긴장감을 이끌어낸다.


지근욱, 〈Inter-shape Radiation〉, 2023, 캔버스에 색연필, 아크릴, UV 프린트, 약 300x790cm © 지근욱

나아가 보통의 모양에서 벗어난 캔버스들은 평소와 다른 보기의 방식을 제안한다. 열다섯 점의 캔버스를 하나의 형태로 조합한 작품 〈Inter-shape Radiation〉(2023)는 타원형 윤곽에 알맞도록 개별 캔버스의 가장자리를 곡선으로 가공한 뒤 배열되었다.
 
서로 다른 크기로 휘어진 변의 곡률에 따라 보는 이의 시야의 방향 또한 유동적으로 변하게 된다. 박미란 큐레이터는 이 작업에 대해 “사각형 화면 위에 그은 곡선이 그림 내부의 율동을 감각하도록 한다면, 둥글게 휜 변형 캔버스 위에 그은 직선은 실재하는 장소와 그림 사이 일어나는 관계의 운율을 상상하도록 돕는다”고 평한다.
 
기존의 캔버스 틀 모양에서 벗어난 낯선 형태의 화면들은 그것이 놓인 공간, 그리고 관람자의 신체와 새롭게 관계하며, 화면 내부에서 일렁이던 파장을 그 바깥의 영역으로 확장시킨다.


《콰오아》 전시 전경(성곡미술관, 2024) © 성곡미술관

이듬해 열린 개인전 《콰오아》에서는 ‘행성의 고리 형성’ 이론에서 벗어난 고리가 관측된 왜행성 ‘콰오아’에 주목해 만든 작품들로 이루어져 있었다. 지근욱은 행성의 고리가 지닌 특성이 자신의 회화 이미지와 닮아 있다고 보았다.
 
행성의 고리는 멀리서 보면 그 존재의 형태가 분명하지만, 가까이서 보면 가스나 우주먼지로 이루어져 형체를 알아보기 힘들다. 이러한 특성은 무수한 얇은 선들로 하나의 형태를 만드는 그의 회화 이미지와 맞닿아 있다.


《콰오아》 전시 전경(성곡미술관, 2024) © 성곡미술관

이러한 생각을 가지고 있던 지근욱은 어느 날 콰오아의 고리가 일반적으로 고리가 형성되는 거리상 한계를 뛰어넘는 위치에 존재한다는 지점에 흥미를 가지기 시작했다. 지금의 과학 이론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콰오아의 고리는 그에게 있어 현실과 상상의 경계가 허물어지는 지점을 유발하고, 우리가 관념적으로 생각하는 기준에 어떠한 공백을 만드는 것처럼 느껴졌다.
 
이에 대한 사유를 바탕으로 꾸려진 《콰오아》에서 지근욱은 캔버스에 선과 색면이 만나며 예상치 못한 얽힘과 흐려짐을 통해 기존의 규칙을 탈피하는 콰오아의 고리와 맞물리게 하였다. 또한 스페이스 엔진(Space Engine)이라는 가상 시뮬레이션 프로그램을 통해 수집한 우주의 형태들을 레퍼런스로 삼아 화면에 새로운 층위를 덧입힘으로써 비선형적인 시공간의 층위를 회화적으로 탐색하고자 했다.


《GLASS》 전시 전경(WWNN, 2024) © WWNN

이어서 열린 개인전 《GLASS》는 ‘유리, 렌즈, 막’을 의미하는 글라스를 경유해 입자·파동의 운동성, 나아가 이에 개입하는 시선의 문제에 대해 질문한다. 이 전시에서 지근욱은 ‘이중슬릿 실험’이라는 양자역학 실험이 보여주는 메커니즘에 주목하였다.
 
이중슬릿 실험은 전자를 두 개의 좁은 틈 사이로 통과시켜 물질이 입자인지 파동인지 구분하기 위한 실험이다. 두 개의 틈은 일종의 간섭을 발생시켜 입자의 파동성을 유발하는데, 작가는 전시가 이루어진 WWNN 공간이 가진 분절된 특성이 이와 유사하다고 보았다.
 
지근욱은 이 실험에서 단지 보는 행위만으로 다른 물리적 현상을 만들 수 있다는 지점에 주목하며 시선의 물질성을 탐구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를 공간에 반영해 확률로 제시되는 이미지와 세계를 은유하고자 했다.


지근욱, 〈Inter-shape Net 009〉, 2024, 캔버스에 색연필, 아크릴, UV 프린트, 194x112cm © 지근욱

전시 제목인 ‘글라스’는 개인이 바라보는 현실이 객관적이거나 고정되어 있다는 인식을 비껴가며 끊임없이 변화하고 흔들리는 우리의 시선과 관점을 가리킨다.
 
지근욱은 각각의 캔버스마다 서로 다른 체계와 법칙을 설정하면서 우리의 눈이 어떻게 다른 패턴을 도출해 내는지 실험하고자 했다. 먼저 전시에서 선보인 ‘Inter-shape’ 연작의 2024년도 작품들은 상호적으로 교차하는 형태들이 드러내는 면과 틈, 그리고 망의 구조를 보여주고 있었다.


《GLASS》 전시 전경(WWNN, 2024) © WWNN

그물의 틈 사이에 맺힌 빛과 같은 선명함은 전시 공간 내 개별 작품의 위치에서도 확인할 수 있었다. 캔버스 안에서 교차하고 방사하는 색은 캔버스 내부의 질서로부터 나아가 공간으로 확산해 나갔다.
 
관객의 신체 방향에 따라 느슨하게 통일된 색이 공간에 그리드를 그리며 우리의 시선을 안내한다. 공간에서 질서를 세우는 이러한 방식은 보이는 대상과 보는 사람의 관계를 설정하고, 공간 안에서 보는 자로 하여금 자신의 신체 위치와 시선의 방향을 확인하게끔 유도한다.


《GLASS》 전시 전경(WWNN, 2024) © WWNN

지근욱에게 화면을 넘어 공간의 질서를 구축하고 관람자의 신체적 위치를 드러내는 일은, 이미지와 시선 사이의 거리에서 발생하는 물질적 현상을 탐구하기 위한 과정이다. 그는 관찰 행위 자체가 공간 속 에너지와 흐름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관점에서 출발해, 시선이 어떠한 형상과 운동성을 가질 수 있는지를 실험한다.
 
다시 말해 그의 작업은 회화와 관람자의 신체 사이를 가로지르는 보이지 않는 움직임과 그 상호작용을 포착하려는 시도라 할 수 있다.


《금속의 날개》 전시 전경(학고재, 2026) © 학고재

나아가, 2026년 학고재에서 열린 개인전 《금속의 날개》에서 지근욱은 선 긋기와 물질을 쌓는 행위를 통해 ‘무엇을 보여주는가’의 재현적 차원을 넘어, ‘어떻게 드러내는가’라는 본질적인 존재 방식에 집중하고자 했다.
 
멈춰 있는 듯하나 끊임없이 움직이고, 단단해 보이지만 어느덧 가벼운 비물질의 상태로 부풀어 오르는 지근욱의 화면은, 이 전시에서 ‘금속’이라는 물질이 가진 특성과 존재론적 역사와 맞물린다.


《금속의 날개》 전시 전경(학고재, 2026) © 학고재

여기서 ‘금속’은 단순히 차가운 질료를 뜻하는 것이 아니라, 수백만 년의 압력과 변성을 견디며 생성되어 과거와 미래를 동시에 품은 비선형적 상징물이다.
 
캔버스에 겹겹이 축적된 물질적 흔적은 빛과 만나 반응하고, 화면에 깊은 공명을 일으킨다. 이때 금속성 표면이 발산하는 즉각적인 반사는 내밀하게 스며든 시간의 층위와 대비를 이루며, 평면을 입체적인 구조적 공간으로 탈바꿈시킨다.
 
한편, 여기서 ‘날개’는 중력을 거스르는 장식적 도상이 아니라 물질이 자신의 조건을 벗어나 확장되는 운동의 형식으로 작품에 반영된다.


《금속의 날개》 전시 전경(학고재, 2026) © 학고재

이러한 지근욱의 회화에서는 행위와 물질, 그리고 형태를 갖지 않은 시간들이 한 화면 위에서 교차한다. 따라서 화면에 새겨지는 반복적인 행위는 단순한 질서의 반복을 넘어 비선형적인 시간의 층위를 탐색하는 이행의 흔적으로 남겨진다.
 
나아가 회화 바깥의 영역과 관계하며 외연을 확장해 나가는 지근욱의 작업은, 시각적 자극을 넘어 몸 전체의 감각으로 전이되는 정동의 차원으로 이어지며, 관객마저 그의 세계 안으로 끌어들인다.

"화면 위의 선은 그리는 행위의 흔적과 과정을 고스란히 노출합니다. 그것을 보는 사람들에게 특정 서사가 아닌 선 자체의 시각 정보를 전달하고, 그로부터 비롯되는 감각적 자극에 집중하도록 합니다.
 
색의 온도와 선이 일렁이는 착시, 화면 자체의 규모나 모양이 주는 인상, 직관적 정서에 주목하면서 작품을 폭넓게 해석하기를 바랍니다. 바라보는 거리에 따라 선의 방향성에 주목할 수도 있고 선을 구성하는 가루들의 흔적을 추적할 수도 있어요. 보는 사람의 선택에 의해 무엇이든 될 수 있는 화면을 만들고 싶습니다." (지근욱, 학고재 《하드보일드 브리즈》 인터뷰 중)


지근욱 작가 © 노블레스 컬렉션

지근욱은 홍익대학교 판화과를 전공하고 런던 예술대학 센트럴 세인트 마틴스에서 아트&사이언스 전공으로 석사 과정을, 홍익대학교에서 회화 전공으로 박사 과정을 마쳤다. 최근 개인전으로는 《금속의 날개》(학고재, 서울, 2026), 《호를 걷는 눈》(쉐마미술관, 청주, 2025), 《GLASS》(WWNN, 서울, 2024), 《콰오아》(성곡미술관, 서울, 2024) 등이 있다.
 
또한 작가는 《흙으로부터》(학고재, 서울, 2025), 《플라이바이》(프람프트 프로젝트, 서울, 2024), 《또 다른 물성》(홍익대학교 현대미술관, 서울, 2023), 《살갗들》(학고재, 서울, 2022), 《라그랑주 포인트》(드로잉룸, 서울, 2022), 《왓 이프!》(에이라운지 컨템포러리, 서울, 2021), 《작업의 온도》(일우스페이스, 서울, 2020) 등 다수의 단체전에 참여했다.
 
지근욱은 성곡미술관 오픈콜(2024), 서울문화재단 창작지원사업 유망트랙 및 신진트랙(2026, 2021)에 선정된 바 있다.

Reference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