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이 어떤 진실을 알고 있다고 여긴다면 그것은 높은 확률로 거짓에 가깝다. 사건을 겪은 사람은 자신이 눈앞에서 벌어진 일을 전부 목격했고, 심지어 그 이면의 진실까지 알게 되었다고 믿는다. 그러나 인간은 자신이 서 있는 쪽에서 바라볼 수 있을 뿐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미 수많은 영화와 소설에서도 주인공이 미처 몰랐던 사실을 직면하고 그제야 진실을 찾으러 모험을 떠나는 이야기를 반복해왔다. 이 익숙한 플롯이 역설하듯이 진실은 단수가 아니라 복수다.

우리가 어떤 대상이나 사건을 바라볼 때는 그동안 쌓아 온 경험과 지식이 순식간에 총동원된다. 시선이 닿은 곳에 한 사람의 인생이 관여한다. 같은 자리에서 바라본다 해도 같은 것을 보았다고 할 수 없다. 완전히 반대편에 선다면 판이한 기억이 남을 테다. 여기에 시간까지 흐른다면 자기에게 유리한 편집과 각색을 거듭하며 진실은 먼 곳으로 내던져진다. 같은 사건의 목격자들이 전혀 다른 진술을 하는 이유다. 한 끗만 다른 각도에 서 있었다면, 긴 시간이 흐른 뒤의 기억은 완전히 다른 이야기가 된다.

확실히 우리의 기억은 불완전하므로 왜곡이라는 함정을 피할 수 없다. 본 것이 진실이라고 여기는 것은 착각이며, 심지어 보이는 세계 뒤의 진실을 안다는 것은 오만이다. 오히려 아무것도 모른다고 여기는 쪽이 조금 더 진실에 가깝다. 그러나 사람은 누구나 자기가 옳다고 믿고 싶어 하며, 대중은 불명확한 진실보다는 또렷한 거짓을 원한다. 개인 또는 집단 간의 오해와 단절은 이러한 어긋남에서부터 시작한다. 오랫동안 반복되어 온 관계와 역사의 구조다.

Hayoun Kwon, 489 Years, 2016, Animation, single-channel video, color, stereo sound, 11 min. 18 sec. ©Hayoun Kwon

1. 우리 사이의 ’빈 공간‘

권하윤은 이렇게 이야기의 화자와 청자 사이에 생겨나는 ’빈 공간‘을 주목하고 탐구해 왔다. 국경을 넘어 망명을 신청하려는 자의 탈출 경로에 관한 진술(〈증거부족〉(2011)), 판문점 근처의 대남 선전 마을로서 조작된 공간인 기정동(〈모델 빌리지〉(2014)), 남북한 사이의 비무장 지대(〈489년〉(2016)), 새를 수집하는 여인의 환상적인 집(〈새 여인〉(2017)) 등 그가 작품 속에서 다루는 공간은 모두 진실의 경계에 위치해 있다. 그는 판단이나 결론을 제시하는 대신 우리의 기억과 경험은 서로 다르며 하나의 진실은 없다는 것을 그저 보여 준다.

특히 2011년의 애니메이션 작품 〈증거부족〉에서 이 ’빈 공간‘이 잘 드러난다. 이야기의 주인공 오스카는 프랑스에 망명하기 위해 자신의 경험을 진술하지만, 결정권을 가진 프랑스 정부는 아무런 증거가 없는 이야기를 쉽게 믿지 않는다. 그들 사이의 ’빈 공간‘이다. 오스카는 자신이 탈출한 경로를 그림으로 그려서 보여 주었지만 이 또한 또렷한 증거가 되기는 어렵다.

타인의 기억은 증거가 없다. 때때로 우리는 그것을 들여다보고 싶지만 불가능한 환상일뿐이다. 권하윤은 실사 촬영의 한계를 지니는 영화 대신, 눈에 보이지 않고 찍을 수도 없는 타인의 기억을 재현하는 마법을 부리기 위해 3D 애니메이션을 선택했다. 그는 오스카의 진술을 듣고 탈출 경로를 상상하여 애니메이션으로 제작했고 오스카의 그림과 겹쳐서 보여 주었다. 물론 아무리 사실적이라도 현실은 될 수 없기에, 오스카와 프랑스 정부, 오스카의 이야기를 듣는 작가, 작가가 만든 작품을 바라보는 관객 사이에 무수한 ’빈 공간‘이 또 솟아난다. 명백한 진실은 영원히 알 수 없다.

작가는 〈증거부족〉에서 ‘빈 공간’을 표현하기 위해 애니메이션을 도입한 뒤, 점차 실사가 아닌 방식으로 작품을 제작하기 시작했다. 조작된 대남 선전 마을 기정동을 멀리서 바라보는 시선을 표현한 〈모델 빌리지〉 역시 모형을 촬영하는 방식으로 진행되었다. 그는 이 과정에서 DMZ라는 중간 지대에 관심을 갖게 되었고, 전직 군인을 인터뷰하다가 〈489년〉의 주인공 김씨를 만났다. 처음 보는 식물들이 달빛 아래 실루엣을 드러내며 만드는 환상적인 이미지, 그리고 언제 나타날 지 모르는 북한군과 지뢰의 존재로 인해 생사를 넘나드는 감각이 섞여 든 그의 경험담은 너무도 생생해서 마치 DMZ에 들어갔다 나오는 간접적 경험을 한 듯했다.1 이 생생한 느낌을 관객에게 전달하기 위해서는 스크리닝(screening, 상영)이 아닌 다른 매체가 필요했다. 보다 현실적인 공간을 사적으로 가까이 경험하면서 비밀스런 기억을 공유할 수 있는 가상 현실(VR)이다.

이어서 권하윤은 〈새 여인〉에서 시간이라는 새로운 요소를 관객에게 부여한다. 전작들이 화자의 이야기에 따라 일방적으로 진행되는 선형적 구조였다면, 〈새 여인〉은 관객에게도 참여할 기회를 준다. 작가의 드로잉 선생님 다니엘은 건물 계량과 실측을 위해 오래된 주택에 방문한다. 새를 수집한다고 알려진 ’새 여인‘의 집이었다. 관객은 작품 속에서 다니엘이 되어 묵직한 문을 열고 대리석 계단을 오른다. 한 여인이 문을 열며 반갑게 맞아 주는데, 그 뒤로 새와 새장으로 가득한 놀라운 풍경이 펼쳐진다.

여기서 전작과 확연히 다른 점이 발견된다. 〈489년〉에서 관객은 VR 헤드셋을 착용하고 앉아서 수동적으로 감상하는 데 반해 〈새 여인〉에서는 관객이 헤드셋을 쓴 채 직접 움직인다. 계단을 오르거나 걷다가 멈추어 주변을 둘러보는 등 관객이 움직이는 속도가 작품의 진행에 그대로 반영된다. 관객은 일부나마 직접 ‘시간’을 통제할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리하여 가상 공간 속에서 현존하는 감각을 보다 강하게 느끼며 타인의 기억 속으로 더 깊이 진입한다.

직접 발을 움직이고 손을 뻗고 고개를 두리번거리는 사이에 관객마다 다른 경험을 생성한다. 물론 헤드셋을 벗는 순간 가상 공간은 신기루처럼 사라지지만 그럼에도 다른 사람이 되어 본 강렬한 경험은 하나의 사건이 되어 관객의 기억에 새겨진다. 또한 동시에 헤드셋을 착용하고 가상을 헤매는 관객들의 느린 움직임이 중첩되어 마치 퍼포먼스처럼 보이는 외부 장면이 연출된다. 관객의 움직임이 작품의 요소로 포함되면서 기존 영상이나 가상 현실의 형식을 넘어 퍼포먼스로 향하는 중간 지대에 이른 것이다.



2. 타인의 세계에 도달하기

권하윤은 기억과 경험 사이에 존재하는 진실의 겹을 더 구체적으로 드러내기 위해 가상현실을 이용한다. 작품을 통과한 관객이 현실을 더 풍성하게 감각하도록 만들기 위한 것이다. 그러나 아무리 현실적으로 구현한다고 할지라도 미디어 작품은 빛이 꺼지는 동시에 사라진다. 게다가 ’가상(假想)‘의 사전적 의미는 ’사실이 아니거나 사실 여부가 불분명한 것을 사실이라고 가정하는 것‘이다. 현실에 발붙이지 못하고 허공에 둥둥 떠다니는 듯한 가상을 통해 관객이 어떻게 현실을 더욱 잘 볼 수 있게 된다는 것일까.

사실 미디어라는 매체가 등장한 이래 많은 철학자들은 인간과의 관계에 우려를 표했다. 특히 귄터 안더스(Günther Anders, 1902–)는 미디어가 실제 경험을 대체해 버리고 인간의 비평적 사고를 앗아 갈 수 있다고 경고했다. 그에 따르면 누군가 이미 편집한 미디어 매체는 ‘수단이 아니라 이미 결정된 것’이다. 우리는 이미 편집된 ’팬텀-버전(Phantom-Version)’의 세계를 체험하고 있으며 실제 세계를 점점 더 알기 어려운 상황에 처하고 있다.2 폴 비릴리오(Paul Virilio, 1932–) 또한, 빛이 꺼지면 사라지는 광학 매체의 허망함을 지적했다. 먼 곳의 장면을 실감 나게 눈앞에 펼쳐 놓는 듯하지만 그것은 실제로 여기 존재하지 않는다. 미디어는 오히려 우리의 물리적 경험과 대면 소통을 무너뜨리는 존재다.3

미디어에 비판적인 이론가들의 공통적 견해는 미디어가 인간을 소외시킨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눈앞에 새로운 세상을 펼쳐 놓았다가 기기를 벗는 순간 모든 것이 사라지는 첨단 광학 매체인 가상 현실은 이들이 가장 부정적으로 평가하는 매체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여기에는 TV나 영화와 달리 관객의 몸이 있다. 관객의 신체 반응을 하나의 요소로 포함하며 온전히 1인분의 경험을 제공하는 가상 현실은 인간을 소외시키기보다 사건의 한가운데로 끌어들인다.

현실에서 우리의 물리적인 행동은 외부 세계와 맞닿으며 변화를 만든다. 가상 현실이 마치 현실처럼 제대로 작동한다면 이용자는 실제로 다른 곳에 존재한다고 느끼는 ‘심리적인 현존감(psychological presence)’을 갖게 된다. 연구자들은 이 경우 이용자들의 운동 신경과 인지 체계가 현실과 비슷하게 작동한다고 말한다. 경험한 몸은 기억을 새긴다. 가상 현실을 재난 대비나 운전 등 다양한 훈련에 활용할 수 있는 이유다.4 권하윤은 이러한 특성을 이용하여, 역설적으로 우리가 경험하지 못했던 다른 현실을 깨닫도록 만든다. 관객은 수동적 관찰이 아니라 운동 신경과 인지 체계를 작동시키며 적극적으로 작품에 개입하며 타인의 내밀한 기억에 진입한다. 그리고 이내 새로운 진실을 깨닫는다. 사건을 바라본 방향에 따라 다른 진실이 존재할 수 있다는 것이다.

실제로 가상 현실을 통해 평소 경험하기 어려운 상황을 겪어 보는 것이 타인의 관점과 사고, 감정을 이해하는 ‘사회적 조망수용능력’을 키운다는 연구 결과가 있다.5 작품 감상은 개인적인 기억이 되어 몸에 새겨지는 동시에, 우리의 좁고 왜곡된 시야 너머에 존재하는 타인의 세계에 도달하도록 만든다. 빛이 머무는 곳에 공감과 연대의 작은 토대가 생겨난다.

Hayoun Kwon, Model Village, 2014, Live action film of an artificial village model, single-channel video, HD, color, stereo sound, 9 min. 39 sec. Production :Filmo ©Hayoun Kwon

3. 가상이라는 장소

〈489년〉과 〈새 여인〉, 〈피치 가든〉(2019)을 차례로 발표하며 개인의 내밀한 기억에 집중하던 권하윤은 2020년대부터 다시 영역을 확장하여 공적인 장소나 역사를 탐구하기 시작한다. 〈구보, 경성 방랑〉(2021)은 20세기 초 서울의 풍경과 신문 아카이브를 다루며 자유와 검열의 경계를 보여 주었고, 2023년 국립아시아문화전당 인터랙티브아트 랩에서 발표한 〈잊어버린 전쟁〉에서는 한국(6.25) 전쟁의 가장 치열한 전투 중 하나였으나 잊혀지고 만 지평리 전투의 기억을 소환한다.

지평리 전투는 미군의 승리로 역사에 기록되어 있으나, 생존한 참전 용사들의 구술기록과 프랑스 등 각지에 남겨진 자료를 탐구하던 작가는 또 다른 진실을 깨닫는다. 전략적 요지였던 지평리를 중공군으로부터 지켜내기 위해 싸웠던 이들은 미군과 프랑스군 그리고 프랑스군에 편입된 소수의 한국군이었다는 것이다. 그는 작품 속에 종군 기자, 한국군, 프랑스군, 중공군 등 다양한 입장의 이야기를 담으며, 관객이 하나의 사건에 대한 여러 개의 시선을 경험할 수 있도록 이끈다.

신작 〈옥산의 수호자들〉(2024) 역시 대만 중심의 옥산(玉山, 위산)에 얽힌 역사적 설화를 기반으로 한다. 일본이 대만을 침략했을 당시, 옥산에 살고 있던 부눈(Bunun)족은 가장 강하게 저항하던 소수 민족이었다. 물론 역사에는 국가 간의 대립만 기록되어 있다. 게다가 대만의 다양한 소수 민족들은 현재 언어조차 남아 있지 않을 정도로 문화가 희미해졌다. 작가가 처음 자료를 조사할 당시에는 일본에서 온 인류학자 모리 우시노스케(森丑之助, 1877–1926)와 부눈족 족장이 개인적인 우정을 나누었다는 이야기가 실화인지 꾸며진 이야기인지 확인하기 어려웠다. 하지만 그는 기록을 끈질기게 탐구함으로써 이야기의 근거를 찾아내고 이를 시적인 풍경으로 재현해 낸다.

빛으로 만든 가상의 공간에서 관객은 모리가 대만으로 건너 오게 된 이야기를 들으며 서서히 옥산으로 진입한다. 대나무로 만든 등을 손에 들고 모리의 발자취를 따라 옥산의 자락을 헤맨다. 등불의 빛에 의지해 처음 보는 동물과 식물들을 발견한다. 식물의 학명은 첫 발견자의 이름을 붙이는데, 실제로 대만에는 모리가 처음 발견하여 그의 이름을 딴 식물이 많다고 한다. 권하윤 작가는 현실을 고증하기 위해 고도에 따라 다르게 서식하는 옥산의 식물들을 가상 현실 속으로 옮겨 왔고, 그곳에 사는 동물들의 움직임을 자연스레 구현했다.

가장 재미있는 장치는 손에 든 대나무등이다. 현실에서 관객이 손에 든 대나무등과 가상 공간 속 대나무등이 연동되기 때문에, 관객은 어두운 숲 속을 등불로 밝히며 걷는 느낌을 보다 현실감 있게 경험할 수 있다. 등불에 놀라 부엉이가 푸드득 날아가고, 나뭇잎의 색이 빛에 따라 변한다. 아마도 모리가 옥산을 탐험하면서 보았던 장면도 그러하지 않았을까. 이렇게 관객의 감각과 가상 현실 속 반응이 일치하게 만듦으로써 관객은 이전보다 더 높은 현존감과 선명한 기억을 가지게 된다.

그러나 여전히 전원이 차단되고 빛이 사라지면 가상 현실은 눈앞에서 사라지고 만다. 현실에서 물리적 공간(space)은 사회적 기억이나 역사가 쌓이면 맥락을 가지는 장소(place)가 되고, 실제 공간이 사라지더라도 여전히 존재할 수 있다. 그러나 물리적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 가상 현실도 장소가 될 수 있을까?

미디어 이론가 괴츠 그로스클라우스(Götz Großklaus, 1933–)는 사이버 스페이스의 등장으로 인해 우리의 공간이 물질적 공간에서 비물질적 공간으로 바뀌더라도 장소는 소멸하지 않는다고 했다. 장소가 되기 위해서는 구체적 기억과 흔적이 중요하다.6 실제로 국내의 한 연구에서는 가상 환경으로 구현한 제3자의 사적인 기억을 높은 현존감으로 경험했을 때, 이는 체험자에게 또 다른 사적 기억을 떠오르게 하는 주체적 경험이 된다는 것을 밝혔다. 우리는 디지털 매체로 만든 가상 공간을 아무런 기억도 흔적도 없는 일종의 ‘비장소(non-place)’로 여기지만, 현존감과 전이, 공감을 통해 현실과 같은 장소성을 만들 수 있다.7

권하윤은 현실의 ‘빈 공간’을 발견하고, 기록과 구술 자료를 조사하고 연구하여 타인의 기억을 되살리며 가상의 공간을 만든다. 관객의 경험과 기억은 이 공간을 새롭게 재편한다. 여러 사람의 기억이 중첩되는 사이에 지평리와 옥산은 현실에는 없지만 분명히 존재하는 장소가 된다. 작가는 우리가 실제로 볼 수 없는 것을 보게 만들고 현실에는 없지만 꼭 필요한 대안적인 세계를 설계한다. 오해와 단절로 메워지지 못하는 현실의 ‘빈 공간’들이 점점 커져갈 때, 작품은 그 공허한 어둠을 밝히는 빛8이 된다. 가상의 장소를 통해 현실의 우리는 조금 더 가까워질 수 있다.



4. 몸과 겹

그리고 이 장소에서 또 하나의 사건이 벌어진다. 〈잠재적인 마법의 순간을 위한 XX번째 시도〉(2021)에는 관객을 따라 움직이는 퍼포머라는 외부 장치가 하나 더 있었다. VR 헤드셋을 착용한 관객은 반딧불을 따라 가상의 정원을 산책한다. 걷기도 하고 무언가를 만지기도 하며 천천히 움직인다. 그러자 1대 1로 따라붙은 퍼포머가 관객의 동작을 그대로 본떠 움직이고, 대구를 이루는 두 사람의 움직임은 마치 함께 춤추는 것처럼 보인다.

물론 헤드셋을 착용한 관객에게 퍼포머의 움직임은 보이지 않는다. 이는 나머지 관객을 위한 장치다. 이 작품은 3명이 동시 입장하여 차례로 작품을 감상하는 구조인데, 먼저 감상 중인 관객은 자연스레 기다리는 관객 앞에서 공연하는 퍼포머가 된다. 감상을 마친 뒤 자리에 돌아오면 다시 또 다른 관객의 공연을 관람할 수 있다. 관객의 위치가 바뀌는 사이에 현실과 가상 현실도 교차한다. 작품의 내용을 이미 잘 알고 있는 훈련된 퍼포머는 안과 밖의 세계를 매개하는 존재이자, 작품에 추가된 신체성과 공연성을 더욱 또렷하게 드러내는 촉매가 된다.

이러한 ‘시도’는 〈피치 가든〉(2020)에서 얻은 아이디어다. 관객의 신체적 자유를 위해 더 넓은 공간을 마련했던 이 작품에서 작가는 아무것도 없는 공간에서 천천히 움직이는 관객들의 모습에 주목한다. 가상 공간이 의미 없는 허무로 남는 것을 막으려면 현실 공간과의 괴리를 메울 필요가 있었는데, 이에 적합한 것이 현존하는 몸의 움직임이었다. 그리고 때마침 기기를 착용하고 〈피치 가든〉 속 가상의 정원을 감상하는 관객의 느린 걸음과 꽃과 나뭇잎을 건드리는 손짓은 매우 시적이었다.

몸의 움직임은 〈잊어버린 전쟁〉에서 더욱 구체적으로 삽입된다. 관객이 VR 헤드셋을 착용하고 어둠 속에서 눈을 뜨면 몇몇 인물들이 제각각 다른 행위를 하고 있다. 그중 한 인물의 등 뒤로 다가가 몸의 위치를 맞춘 뒤 인물의 손에 자신의 손을 포개고 동작을 따라하면 장면이 전환되며 그의 기억이 재생된다. 가상 현실 내에서 사용되는 핸드 트래킹(hand tracking)9 기술이다. 동시에 관람 중인 관객은 제각각 다른 손 동작을 하게 되며, 차례를 기다리는 외부의 관객은 또 다른 퍼포먼스를 관람할 수 있다.

가상 현실은 어찌 보면 가장 신체성이 없는 매체라고도 할 수 있다. 그러나 권하윤은 이러한 방식으로 작품에 신체성을 포함시켜 관객의 현존감을 높이고, 작품 외부에 공연성이라는 겹을 더한다. 작품의 안팎에서 다양한 방향의 진실을 경험한 관객은 지평리 전투라는 사건을 더욱 입체적으로 바라보게 된다. 그리하여 작품의 내부에서 이야기하고자 하는 기억과 경험의 층위가 외부까지 확장된다. 각자의 경험 사이에 겹겹의 구조가 탄생한다.

Hayoun Kwon, The Guardians of Jade Mountain, 2024, Interactive VR installation, color, sound, 3D animation, Dimensions variable ©Hayoun Kwon

5. ‘빈 공간’의 재탄생

권하윤의 작업은 전작과 신작이 밀접한 인과 관계를 이루며, 기존의 구조에 새로운 요소를 더해 차곡차곡 쌓아 올린다. 그는 그동안 시선의 방향과 사건의 다양한 층위를 탐구하고, ‘빈 공간’을 찾아냈다. 또한 개인의 내밀한 기억을 드러내기 위해 가상 현실로 매체를 바꾸고 신체성과 공연성을 더하여 작품의 범위를 확장했다. 신작 〈옥산의 수호자들〉에서는 기존의 특징을 모두 반영한 동시에 새로운 시도를 더하였다.

대만의 일본 침략과 소수 민족의 저항 사이에서 ‘빈 공간’을 찾고, 모리라는 실존 인물의 개인적인 일화를 통해 빈 곳의 여지를 드러냈다. 남겨진 모리의 기록과 부눈족의 문화, 실제 지형의 특성과 동식물 자료를 수집해 구체적인 공간을 만들고, 관객이 보다 현존감 높은 감상을 통해 타인의 기억을 공감할 수 있도록 설계했다. 또한 이번에도 감상 중인 관객의 움직임을 퍼포먼스로 확장했는데, 더 흥미로운 장면을 연출하기 위하여 장치를 더했다. 감상 공간 외부에 나무와 풀숲의 그림자가 프린트된 반투명 장막을 설치한 것이다.

이는 대만의 전통 그림자 연극에서 차용한 장치다. 작가는 이 모티브를 작품의 내부에도 적용했다. 모리의 뒤를 따라 옥산의 깊은 숲속을 탐험하던 관객은 나비떼를 따라 넓은 바위 앞에 다다르고, 이를 손에 든 대나무등으로 비추어 보게 된다. 등불 아래에서 그림자 연극이 시작된다. 리드미컬한 북소리와 함께 일본인들과 부눈족이 대치하는 장면이 은유적으로 이어진다. 그리고 이 그림자 연극을 관람하며 숲속을 거니는 관객의 모습은, 장막의 바깥에서 바라보면 마치 옥산의 깊은 숲속을 탐험하는 모리의 모습처럼 보인다.

〈잠재적인 마법의 순간을 위한 XX번째 시도〉에서 퍼포머의 존재를 통해 관객의 신체성을 작품의 요소로 포섭하겠다는 의지를 보여 준 작가는, 이번에는 그림자 연극을 통해서 공연성을 또한 작품의 겹으로 포섭하겠다고 또렷하게 선언한다. 작품의 안과 밖, 관객의 위치가 바뀌면서 바라보고 다시 보여진다. 이렇게 잊힌 역사의 한 조각은 작품의 안팎을 넘나들며 관객 개개인에게 또 다른 기억으로 새겨진다. 하나의 공간에 겹겹의 층위를 가진 집단의 기억과 경험이 스며든다. 가상의 공간에 장소성이 생겨나는 순간이다. ‘빈 공간’은 이렇게 다시 태어난다.



6. 누구도 소외되지 않는 세계

권하윤은 방대한 리서치와 치밀한 기술적 계획에 따라 가상 현실 작품을 구성하지만, 관객은 그 속에서 은유적이고 단순한 장면을 경험한다. 그는 일부러 주석을 달거나 구체적으로 설명하지 않는다. 당신이 보고 있는 것이 또 하나의 진실이라는 태도다. 현실의 세계 또한 많은 은유로 이루어져 있고, 그것을 포착하고 연결하는 일로부터 새로운 진실이 탄생한다. 우리는 그저 작품 속을 거닐며 전에 없던 세계를 발견할 뿐이다.

기술과 매체 앞에서 인간은 자꾸만 소외되는 것이 현실이다. 매체가 우리의 실제 경험을 대체해 버리고 비평적 사고를 말살시킬 우려가 있다는 안더스의 의견에는 일리가 있다. 특히나 작가가 비평적 사고를 마친 뒤 이를 매체에 담아 전달할 때, 우리에게 도착하는 것은 하나의 의견 뿐이다. 그러나 권하윤은 예술가가 직접 말하는 대신 극 속의 등장 인물들이 직접 말하게 한다.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한 시인의 미메시스다. 정해진 관점이나 교훈이 제시된 이야기가 아니라 은유적인 상황 속에서 관객은 자연스레 타인의 경험 속으로 빠져들고, 각자의 손에 판단의 키를 쥔다. 매체 앞에서 소외되지 않는 관객의 모습은 우리가 기술의 부품에 불과하다는 안더스의 비관적 견해에 대한 반박이 될 수 있을 테다.

또한 권하윤의 작품은 가상 현실과 퍼포먼스의 경계를 해체하고, 최신 기술을 사용한 작품에 가장 아날로그적인 몸을 끌어들인다. 기존과 다른 어법을 구사하는 그의 작품을 보며, ‘신체시(新體詩)’10라는 단어를 떠올려본다. 우리는 어쩌면 같은 매체를 사용하더라도 전혀 새로운 가능성을 엿볼 수 있지 않을까? 실존하는 공간과 단일한 시선을 그대로 가져온 가상은 현실의 모방에 불과하지만, 기억과 경험이 중첩되는 곳은 가상이더라도 또 다른 대안적 현실이 될 수 있다. 이곳에서는 현실에서 드러나지 않는 이야기들이 빛을 낸다. 하나의 주체가 그 밖의 객체를 비추는 ‘계몽의 빛’11은 무의미해졌다. 개별 존재들이 각자의 가능성을 가지고 빛을 내는 이곳은 누구도 소외되지 않는 세계다.

빈 곳마다 진실이 피어나고 관객의 움직임이 겹치면 그 자체로 운율이 된다. 공고하다고 여겼던 기억과 경험의 맥락이 해체되며 겹과 겹 사이가 더욱 풍성하게 부푼다. 역시 우리가 안다고 여기는 것은 거짓이다.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눈앞에 있는 진실을 아직 모른다는 것뿐이다. 빌렘 플루서(Vilém Flusser)가 말했듯이 보이는 것이 전부라면, 여기서부터 다시 시작해야 한다. 어느 시인은, 시는 눈으로 읽을 수 있지만 한편으로 육체로 호흡하며 읽는 것, 같이 읽는 것이라고 했다.12 우리가 권하윤의 작품을 통과하며 새로운 시를 쓸 수 있다면, 그것은 아마도 온몸으로 읽는 시, 같이 읽는 시가 될 것이다.



1. 국립현대미술관 “작가와의 대담”(권하윤 작가, 맹지영 전시 기획자, 손옥주 공연학자, 2021. 2. 25.)

2. 심혜련, 『20세기의 매체철학』, 그린비, 2021, pp. 109–111.

3. 폴 비릴리오, 『시각 저 끝 너머의 예술』, 이정하 옮김, 열화당, 2008, p. 27.

4. 제러미 베일렌슨, 『두렵지만 매력적인』, 백우진 옮김, 동아시아, 2019, pp. 34–57.

5. 제러미 베일렌슨, pp. 122–139.

6. 심혜련, pp. 312–321.

7. 이화영, 김상용, 「VR 환경에서 재현된 개인적 공간 연출의 장소성이 사용자에게 주관적 시점으로 몰입되는 주체화 과정에 대한 연구」, 『한국디지털콘텐츠학회 논문지』, Vol. 25, No. 1, 2024, pp. 39–48.

8. 빌렘 플루서, 『피상성 예찬: 매체 현상학을 위하여』, 김성재 옮김, 커뮤니케이션북스, 2006, p. 304.

9. 사용자의 손동작을 인식하여 컴퓨터를 작동하는 기술이다. 〈잊어버린 전쟁〉에서는 관객이 VR 헤드셋을 착용한 뒤 가상 공간 안에서 만나는 인물의 손동작을 따라하면 이것이 인식되면서 장면과 사운드가 전환된다.

10. 기존의 방식에서 벗어나 새로운(新) 몸(體)과 같은 형식으로 쓴 시를 뜻한다.

11. 빌렘 플루서, p. 363.

12. 황인찬, 『잠시 작게 고백하는 사람』, 난다, 2024, pp. 32–40.

Reference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