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대식(b. 1984)은 이미지와 시간성 사이의 관계에 대한 물음을 바탕으로 작업을 해왔다. 작가는 연필로 작업의 표면을 칠하는 지난한 반복적 행위를 통해 보이지 않는 시간의 흐름을 물질의 층위로 전환하는 회화적 수행을 전개한다. 축적과 반복을 통해 화면은 하나의 기록 장치가 되고, 시간은 물질로 응축된 감각의 흔적으로 드러난다.


편대식, 〈Untitled (cube No.14)〉, 2011, 한지에 연필, 150x130cm © 편대식

편대식은 자신의 작업을 하는 행위가 게임을 하는 것과 같다고 말한다. 그에 따르면, 일정한 규칙을 설정하고 어렴풋이 기대할 수 있는 결과를 향해 가는 점, 그리고 현실로부터 유리된 세계 속으로의 중독이라는 점에서 그렇다.
 
따라서 작가에게 페인팅은 마치 게임처럼 현실이 아닌 가상의 세계를 들여다보는 창이 된다. 작가노트에서 이에 대해 그는 “막막하고 두려운 세계에서 또 다른 작은 세계를 만들고 그 안에서 플레이 하고 있는 것”이라고 말한다.


편대식, 〈Untitled (cube No.5)〉, 2011, 한지에 연필, 150x130cm © 편대식

편대식의 작업은 ‘맹점’에 대한 실험에서 출발한다. 그는 개념적으로만 알고 있던 맹점을 직접 자기 자신의 시지각에 직접 실험했다. 먼저 흰 종이에 20cm 간격으로 그려진 두 개의 점을 두고, 이 중 한 점을 종이에서 50cm 정도 떨어져서 한쪽 눈을 가리고 바라보았다.  


편대식, 〈Untitled (cube No.11)〉, 2011, 한지에 연필, 150x130cm © 편대식

그 결과 작가는 한쪽 눈을 가리고 바라보면 분명히 존재했던 한 점이 시야에서 사라지고 것을 경험했다. 혹은 한쪽엔 점이 그려져 있고 다른 쪽엔 끊어져 있는 선이 그려져 있는데, 동일한 방식으로 한쪽 눈을 가리고 50cm 거리에서 바라보면 끊어져 있던 선이 연결된 선으로 빈 부분이 채워지는 기이한 현상을 경험하게 되었다.
 
편대식은 작가노트에서 이렇게 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보지 못하는 부분이 존재하고, 그 보지 못하는 부분을 뇌에서 자의적으로 채우고 있다는 사실에 충격을 받았다고 밝혔다. 그리고 보았기 때문에 의심의 여지가 없고, 보지 못했기 때문에 믿을 수 없다는 사람들의 태도는 곧 그를 더욱 혼란스럽게 만들었다.


편대식, 〈Untitled (cube No.15)〉, 2013, 한지에 연필, 150x130cm © 편대식

이러한 시지각적 경험은 시각적으로 입체감이나 공간감이 느껴지는 이미지를 표면에 제시하여 관람자가 무엇을 보고 느끼게 되는지 실험하는 작업으로 이어지게 되었다.
 
편대식은 작업을 통해 눈으로 지각하는 시각과 대상이 지니는 본질적 속성, 즉 물성 사이의 균형을 맞추어 보고자 했다. 이를 위해 그는 시각예술에서 보일 수 있는 어떠한 ‘이미지’라는 것을 소거하고, 시간의 흔적으로 만들어 낸 물성을 강조하기 시작했다.


편대식, 〈Untitled (vacant cube)〉, 2012, 한지에 연필, 262.5x260cm © 편대식

작업의 주요한 재료인 연필은 어두운 검은색을 가지면서도 표면의 반짝임을 동반한다. 작가는 그러한 연필을 한 획, 한 획, 정직하게 쌓아 올리고, 그 쌓아 올리는 과정을 그대로 드러내어 시간의 흔적을 담아내는 재료로 사용하였다.
 
작가는 표면을 갈아내어 매끈하게 만들고 그 위에 연필이라는 재료로 시간을 차곡차곡 쌓아 올렸다. 하지만 이렇게 물성을 강조하기 위해 어떠한 감정도 개입되지 않은 검은 사각형은, 오히려 그 물성으로 인해 예상하지 못한 이미지들을 눈앞에 만들어낸다.  


편대식, 〈Untitled (valley)〉, 2014, 한지에 연필, 130.5x391.5cm © 편대식

작업 초반에는 연필로 눌러서 자국 낸 화지의 선을 드러내거나, 연필로 칠한 결을 이용해 공간감을 극대화하는데 집중했다. 가령, 2014년 《ILLUSION》, 2015년 《ENGRAVE》 등의 개인전에서 작가는 평면 안에서 착시에 의해 형성된 환영적 공간을 탐색한 작업과 흔적으로서의 ‘선’ 자체에 집중한 연작을 보여주었다.
 
편대식은 이러한 노동집약적인 작업의 과정에서 남겨진 요철이나 곧지 않은 선 등의 흔적들을 통해 인간 존재의 불완전함을 자각하는 동시에, 이로써 만들어진 착시를 제시하여 관객으로 하여금 인간의 ‘시각’이라는 감각의 한계와 왜곡을 경험하게 한다.


편대식, 〈Untitled (moments)〉, 2017, 한지에 연필, 285x5400cm, 《순간의 연속》 전시 전경(한원미술관, 2017) © 한원미술관

2017년 개인전 《순간의 연속》에서는 50m의 대형 롤작업을 전시장 벽면에 두르며, 연속되는 순간들 속에 존재했던 치열한 개인의 흔적에 집중하고자 했다.
 
작가는 연필로 검게 칠해진 벽에 남겨진, 횡으로 지속되는 각인된 흰 선을 통해 존재의 연속성을 대변하고자 하였으며, 그가 남긴 흔적을 따라가면서 존재의 자취를 쫓아보는 경험으로서의 전시를 마련하고자 했다.


《ENCOUNTER》 전시 전경(홍티아트센터, 2020) © 홍티아트센터

나아가, 2020년 홍티아트센터에서 열린 개인전 《ENCOUNTER》에서 편대식은 과거와 현재, 나와 너, 평면과 공간의 혼재를 ‘직면(Encounter)’하는 경험을 제안했다. 이 전시에서 편대식은 기존에 사용하던 한지라는 재료 대신 나무판을 바탕재로 삼으며, 그 표면을 매끄럽게 다듬고 그 위에 연필로 검게 칠했다.
 
반복된 연필 선으로 시간이 퇴적된 작품은 마치 금속 표면과 같은 광택을 가지게 되었다. 그 앞에 선 관객은 표면에 축적된 연필의 흔적을 마주하는 동시에, 반사되는 표면으로부터 자기 자신과 주변의 현재 상태가 함께 비치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과거의 흔적 위에 현재의 이미지가 비침을 인식하고 계속 응시하면, 표면 위에 비친 이미지가 도리어 연필로 칠해진 표면의 흔적 너머, 화면 내부의 공간으로 이동하면서 전후 관계가 전복됨을 경험하게 된다. 즉, 과거와 현재, 표면과 내부 사이의 경계에서 혼동을 경험하게 되는 것이다.


《등가》 전시 전경(인천아트플랫폼, 2021) © 인천아트플랫폼

마치 거울처럼 표면에 현재의 환영이 투영되는 작업은 더 나아가 전시장 벽면 자체를 표면으로 삼기도 하였다. 2021년 인천아트플랫폼에서 열린 개인전 《등가》가 그 예로, 이 전시에서 작가는 14일이라는 제한된 시간 동안 전시장 공간에서 작업한 결과물을 선보였다.
 
편대식은 전시장의 일부 벽면을 선택하여 돌출된 부분을 갈아내고, 그 위를 연필로 칠해 시간을 쌓았다. 이러한 과정에서 벽면을 갈아낸 분진이 바닥에 내려 앉고, 14일 동안 전시장 공간을 오가는 작가의 움직임은 무수히 많은 흔적을 남겼다.


《등가》 전시 전경(인천아트플랫폼, 2021) © 인천아트플랫폼

전시는 벽면의 검은 이미지와 바닥에 어지럽게 펼쳐진 흔적들이 담긴 공간, 과거의 흔적 위를 걸으며 전시를 보게 될 관객이 남기는 발자국과 검은 화면에 비쳤다 사라질 이미지, 전시장 출입문을 통해 들어오는 빛과 같은 이 모든 현재 진행형의 사건 속에서 생성되는 의미를 찾고자 했다.


《Proxy Data》 전시 전경(아트 프로젝트 씨오, 2025) © 아트 프로젝트 씨오

그리고 최근의 개인전 《Proxy Data》에서 편대식은 오랜 시간 탐구해온 ‘시간의 물질화’라는 회화적 질문을 새롭게 확장하여, 색·행위·기록이 만든 시간의 구조를 다층적으로 제시하였다.
 
전시는 직접 관측 불가능한 과거의 기후와 환경을 간접적 자료를 통해 유추하는 ‘대체 자료(Proxy Data)’ 개념에서 출발한다. 나무의 나이테나 지층의 변화처럼 물질이 품은 시간을 읽는 이 방식은 작가가 회화를 통해 오래 탐구해온 시간의 구조와 깊이 연결된다.


편대식, 〈Proxy Data〉, 2025, 나무 패널에 아크릴, 60x60cm © 아트 프로젝트 씨오

편대식은 제주도에 위치한 레지던시에 체류하며 해안과 숲에서 관찰한 자연의 색을 지속적으로 기록했다. 이렇게 수집된 색들은 아크릴 물감으로 변환되어 여러 겹으로 쌓이고 갈아내는 과정을 반복하며, 화면 속에 다시 시간의 흔적으로 남는다.
 
색의 층이 드러나고 사라지는 생성과 소멸의 과정은 자연에서 마주한 시간의 감각을 회화적 지층으로 전환하며, 전시의 주요 작업인 ‘Proxy Data’ 연작은 이러한 탐구를 가장 집약적으로 드러낸다.


편대식, 〈The Record〉, 2025, 나무 패널에 퍼티, 페인트, 샌딩 후 연필 60x60cm © 아트 프로젝트 씨오

전시는 이처럼 색의 지층을 다루는 ‘Proxy Data’ 연작과 함께, 연필의 반복적 움직임으로 시간을 직접 기록하는 ‘The Record’ 연작으로 구성되었다. 흑연의 미세한 흔적을 촘촘하게 중첩하는 방식은 화면 위에 ‘지속되는 시간’을 직접적으로 축적하고, 이는 색의 물질적 두께로 시간의 흔적을 드러내는 ‘Proxy Data’ 연작과 또 다른 방식의 시간성을 만들어낸다.
 
두 연작은 서로 다른 회화적 언어로 시간과 기록, 그리고 물질의 관계를 탐구하며, 보이지 않는 시간을 어떻게 시각화할 수 있는지에 대한 작가의 확장된 질문을 제시한다.


《정지한 시간》 전시 전경(뉴스프링프로젝트, 2024) © 편대식

이렇듯 편대식은 노동집약적인 행위의 반복을 통해 비물질적인 시간의 감각을 물질적 층위로 변환하는 작업을 지속해 왔다. 그 과정에서 작가는 재료의 물성과 시간성뿐 아니라 인간 존재의 불완전한 속성 또한 드러내며, 존재에 대한 사유를 제시해 오기도 하였다.
 
나아가, 시간이 축적된 물질의 표면으로부터 현재의 이미지가 만들어지는 과정을 관객이 직접 경험해 볼 수 있도록 하며, 감상이라는 시각적 경험을 빛과 어두움, 현재와 과거, 표면과 내부, 현실과 환영 사이의 경계를 오가는 복합적인 사건으로 전환시킨다.

"작품을 연필로 칠하는 행위는 나에게 있어 현재와 맞닿고자 하는 몸부림이다." (편대식, 작가 노트)


편대식 작가 © 인천아트플랫폼

편대식은 고려대학교에서 서양화과를 졸업하고 동대학원 디자인조형학과 조형문화예술 전공으로 석사 학위를 취득했다. 최근 개인전으로는 《Proxy Data》(아트 프로젝트 씨오, 서울, 2025), 《정지한 시간》(뉴스프링프로젝트, 서울, 2024), 《Time Trial》(청주미술창작스튜디오, 청주, 2023), 《뉘앙스》(부평아트센터, 인천, 2022) 등이 있다.
 
또한 작가는 《겹疊_응축과 파장》(아트 프로젝트 씨오, 서울, 2025), 《비정형의 마주침》(청주미술창작스튜디오, 청주, 2024), 《UNBOXING PROJECT 2: Portable Gallery》(뉴스프링프로젝트, 서울, 2023), 《부평영아티스트 2020》(부평아트센터, 인천, 2020), 《퇴적된 유령들》(청주시립대청호미술관, 청주, 2019), 《미니멀 변주》(서울대학교미술관, 서울, 2018) 등 다수의 단체전에 참여했다.
 
편대식은 예술곶산양 레지던시(2025), 청주미술창작스튜디오(2023-2024), 인천아트플랫폼(2021) 등의 레지던시 프로그램에 선정되었으며, 그의 작품은 국립현대미술관 정부미술은행, 서울시립미술관, 양주시립장욱진미술관 등에 소장되어 있다. 

Reference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