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석민(b. 1982)은 회화라는 매체를 통해 시간과 공간처럼 세계를 구성하는 기본 단위를 다루는 작업을 해왔다. 특히 ‘현재’라고 명명되는 시공간에 대한 의구심과 호기심을 바탕으로, 개인의 감각에서 비롯된 사실과 오독의 징후를 회화 매체가 가진 특성들과 연동시키는 실험을 하고 있다. 이로써 작가는 총체적인 지각 경험으로서의 회화를 구현하고자 한다.


《Dubious Gaze》 전시 전경(WWNN, 2023) © 박석민

박석민의 작업은 우리를 둘러싼 세계에 대한 공상과 관찰을 바탕으로 전개된다. 그는 어떤 대상이 본질과 다르게 보이거나, 그동안 겪은 경험과 다르거나, 그전과 달랐거나, 혹은 적확한 설명이나 형용사가 떠오르지 않는 순간에 주목한다.
 
이처럼 작가는 언어로 다 설명하기 어려운 순간들에 대해 고민하며, 일상에서 그러한 느낌과 연결할 수 있는 현상, 사물, 사건, 형상, 단어, 이미지, 스토리 등을 만날 때마다 이를 수집하고 작업의 밑바탕으로 삼는다.


박석민, 〈모형 궤도〉, 2016, 캔버스에 유채, 162.2x112.3cm © 박석민

이를 바탕으로 완성된 박석민의 화면에서는 세계의 조건이자 잔여물인 시간, 공간, 언어, 분위기가 한데 얽혀 있으며, 또 고스란히 드러난다. 한편으로는 디테일이 살아 있는 물체와 사람 그리고 공간으로 보이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모든 것이 중첩된 하나의 추상적 세계처럼 보이기도 한다.
 
이는 정확한 언어로 표현할 수 없는 상황에서 그가 느낀 정서적 동요와 감각적 상태를 반영하는 동시에, 그러한 상황을 관찰하는 작가의 시각 또한 함께 표현되었기 때문이다.
 
정희라 독립 큐레이터는 여기서 그가 표현하고자 하는 것은 “본인만의 응시로 잡아낸, 공유할 수 없는 고립된 감각과 그 감각을 느꼈던 세상과의 접점에서 생성된 관계성이기도 하다”고 보았다.


《New satellite-모형 궤도》 전시 전경(OCI미술관, 2016) © OCI미술관

2013년부터 2020년 초반까지 이어온 ‘모형궤도’ 연작에서 박석민은 ‘임시적,’ ‘가변적,’ ‘찰나적’과 같은 형용사로부터 떠올린 ‘모형’과 궤적, 반복, 흔적의 의미로 따온 ‘궤도’라는 단어를 합치는 실험을 했다.
 
초창기에 그는 일상에서 길들여진 응시가 붕괴되는 찰나의 경험을 현실 공간에 내재해 있는 일련의 구조로 시각화하였다. 예컨대, 네 개의 캔버스를 이어 붙인 〈Phantom Pain〉(2016)은 한 장소에 대한 복잡한 응시의 구조를 살피고 있다.
 
안정된 정방형의 구조는 텅 빈 객석 뒤로 영사기가 놓여있는 극장 내부를 보여준다. 이때 영사기로부터 쏟아져 나오는 강렬한 빛은, 공간 깊숙이 들어가는 화면의 원근감을 상쇄시키며 안정된 현실을 임의로 분할해버리는 비현실적 공간을 창출한다.
 
박석민은 작가노트에서, “물리적인 환경과 비가시적인 영역의 경계를 확장하는 것에 초점”을 두고 현실에 잠재되어 있는 “구조의 오류”를 형상화하거나 재배치하는 초현실적 상상에 대해 짧게 설명한 적이 있다. 그런 의미에서, 〈Phantom Pain〉은 작가가 말한 경계의 확장과 구조의 오류를 형상화한 예로 볼 수 있다.


박석민, 〈부랑자〉, 2015, 캔버스에 유채, 100x70cm © 박석민

동시에, 그 무렵 작가는 정치적 상황들에서 개개인의 목소리와 행동들이 만들어 가는 분위기를 암시적으로 그림에 담고자 했다. 가령, 〈Quiet play〉와 〈부랑자〉 등의 작품에 등장하는 빛의 형상은 작품 안에서 한 방향을 비추거나 여러 방향으로 분산되기도 하면서, 오늘날의 사회, 정치적 사건이나 이슈들을 암시한다.
 
반사되고 굴절되는 빛은 진실이 아닌 것에 집중하고 믿는 우리의 모습을 상기시키고, 진실과 거짓, 실재와 허구의 경계에 대한 질문을 던진다.


《설탕을 녹인 공기》 전시 전경(아트스페이스 보안, 2020) © 박석민

그리고 2018년 이후에는 ‘현재’라는 시공간에 대한 의심과 호기심을 바탕으로 조형 실험을 진행하며, 그 과정에서 총체적으로 불완전한 자극의 완전한 형태를 알아내는 탐구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박석민은 대상의 형상을 마치 시간당 프레임으로 분할한 이미지 데이터와 유사한 방식으로 저장하거나, 또는 동일한 시간 속에 존재하는 대상의 형상을 다면적으로 촬영하는 듯한 형식의 평면 작업을 지속해 왔다.
 
이와 같은 방법론을 통해 작가는 대상을 더는 분해할 수 없는 기본 성분의 합으로 인식하면서, 모호한 감각의 형태를 도출하고자 한다.
 
박석민은 이러한 자신의 작업에 대해 “스스로 생각하는 그림의 과거, 현재, 미래라는 복잡하고 입체적인 좌표 중 한 마디를 끊어내서 특정 시기의 작업으로 실체화하는 행위”라고 설명한다.


《설탕을 녹인 공기》 전시 전경(아트스페이스 보안, 2020) © 박석민

2020년 아트스페이스 보안에서 열린 개인전 《설탕을 녹인 공기》는 세계와 자아 사이에 존재하는 거리와 공백, 그리고 그것을 감각하려는 시도에서 출발한다. 작가는 가까운 존재에게서 느끼는 낯섦과 먼 천체에 대한 설명할 수 없는 친밀감 사이를 오가며, 대상 그 자체보다 대상을 둘러싼 감각과 잔상, 그리고 관계의 틈에 주목한다.
 
작가는 각설탕이 녹아 형태를 잃어가는 과정을 하나의 은유로 삼아, 변화 가능성을 내포한 대상의 본질을 사유하였다. 작품 곳곳에는 설탕, 달콤함, 가벼움, 인공성에 대한 이미지가 스며 있으며, 회화뿐 아니라 조명, 동선, 여백과 같은 전시 공간의 요소들 또한 중요한 구성 요소로 작동한다.
 
서로 인접한 작품들은 잔상과 여운을 주고받으며 연결되고, 관객은 개별 작품을 넘어 공간 전체가 만들어내는 하나의 감각적 궤도 속을 경험하게 된다.


《설탕을 녹인 공기》 전시 전경(아트스페이스 보안, 2020) © 박석민

이를 통해 작가는 회화의 독립적 완결성보다는 화면 안과 밖을 넘나드는 움직임과 관계에 주목하고자 했다. 서사는 의도적으로 절제되고 중심에서 비켜나며, 남겨진 공백은 감각과 사유가 머무는 공간으로 확장된다.
 
즉, 《설탕을 녹인 공기》는 회화를 보다 가볍고 유동적인 상태로 이행시킴으로써, 그림의 흐름이 비어 있는 여백과 매개하여 총체적인 경험이 발생하도록, 이로써 모든 것들이 하나의 궤도/체제로 작동하도록 하였다.


박석민, 〈Depth Study 06〉, 2021, 캔버스에 아크릴, 스프레이, 45.5x38.5cm © 박석민

이렇듯 작가는 일종의 경계선상에 존재하는 감각의 풍경을 시각화하는 시도를 지속해 왔다. 2021년도 즈음부터 전개해온 ‘Depth Study’ 연작에서는 시간이 중첩되어 늘어진 장면이라든지, 빛이 공간과 접촉하여 반응하는 장면 등을 묘사하기도 하였다.
 
이를 토대로 변형한 ‘Mining Depth’(2022-2023) 연작은 화면의 중심에서 주변으로, 또는 모서리에서 중앙으로 나아가는 점진적인 빛의 움직임을 담는다. 다수의 크고 작은 캔버스들은 마치 조각 난 도면처럼 계획적이지만, 논리적이지 않은 구조로서 현실의 벽면을 재구성한다.


《Angle Tail》 전시 전경(에브리아트, 2022) © 박석민

개별 화면 속에서 색의 파동은 다양한 진폭으로 전개되고, 마치 투명한 메아리가 물감을 둥글게 밀어내는 듯 보인다. 이러한 울림은 또 다른 파장과 마주하는 순간 가느다란 현재의 선에 가로막힌다. 한편, 둥글게 비워진 모서리의 부재는 시야의 공백을 만들며, 잡으려 하면 미끄러지고 보고자 하면 사라지는, 미지의 추상의 영역으로 인도한다.
 
서로 다른 규모의 화면들이 서로 결합하여 거시적인 구조를 이루는 ‘Mining Depth’ 연작은, 개별 캔버스의 미시세계를 관찰하고자 하면 스스로 몸을 움직여 시야의 너비를 조정하게끔 만든다. 보기의 방식에 따라 회화의 화면은 아득히 멀어지거나 닿을 듯 가까워지며, 보는 이의 정서와 신체에 감응한다.


《Vortex 8》 전시 전경(에이라운지 컨템포러리, 2023) © 에이라운지 컨템포러리

한편, 2023년 에이라운지 컨템포러리에서 열린 개인전 《Vortex 8》에서 작가는 시공간에 대한 시각적 실험의 연장선상에서 볼텍스(Vortex) 이미지라는 새로운 주제를 가져와 전시를 꾸렸다.
 
전시는 ‘움직임’이라는 키워드를 중심으로 한 ‘Vortex-Counterpoint’, ‘Old Present’, ‘Dark Mining’ 연작으로 구성됐다.


《Vortex 8》 전시 전경(에이라운지 컨템포러리, 2023) © 에이라운지 컨템포러리

태양계가 은하의 중심부를 공전하는 시뮬레이션 영상과 ‘대위법(Counterpoint)’이라 이름 붙여진 모빌에서 출발한 ‘Vortex-Counterpoint’ 연작은 움직임을 시각화하거나, 소용돌이 내부의 고양된 운동 상태로 관객의 시선을 이끈다.
 
완성된 화면은 마치 4차원 공간을 표현한 듯 하지만, 박석민은 물리학적 우주의 공간을 추종하는 것이 아닌 내적으로 번안한 운동성 자체를 표방한다.
 
움직임을 포착하고자 하는 작가의 집요함은 구상과 추상, 물질과 비물질의 경계를 초월한 표현 방식으로 확장된다. ‘Old Present’와 ‘Dark Mining’이 그 예로, 위아래 구분이 없는 조형을 시도하거나 돌출과 침강을 반복해 깊이감을 교란했다.


《Teal Greenhouse》 전시 전경(WWNN, 2024) © 박석민

나아가 2024년 WWNN에서의 개인전 《Teal Greenhouse》에서는 사변적 서사를 바탕으로 한 상상의 세계를 구축하는 시도를 보였다. 사변적 서사 속 폐순환 생태계를 모티브로 삼은 본 전시에서 작가는, WWNN을 전시장일 뿐만 아니라 이곳에 이식된 회화의 생명력을 유지하도록 하는 가상의 온실로 작동시키고자 했다.
 
온실을 뜻하는 ‘Greenhouse’는 변화하는 계절과 무관하게 푸르름이 유지되어 외부와 시·공간적으로 분리된 곳이다. 작가는 이러한 온실의 구조와 개념이 '1970년대 이후 최근까지 포스트 아포칼립스를 다룬 다양한 군의 SF소설에 등장하는 소행성, 돔, 아파트, 섬 등'의 모티브가 되어 '폐순환 생태계'로 정의되는 방식에 주목했다.


《Teal Greenhouse》 전시 전경(WWNN, 2024) © 박석민

이를 바탕으로 작가는 온실이라는 폐순환 생태계의 시공간적 감각에서 출발한 전시를 기획했다. 비슷하고도 다른 2개의 전시가 서로 호응하는 것처럼 구성하면서, ‘틸(teal)’이라는 청록 계열의 색상을 중심으로 1층과 2층에 놓은 작품에 스펙트럼을 각각 다르게 적용하는 등의 계획을 세웠다.
 
밑면이 잘린 원형부터 타원, 직사각, 그리고 비정형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형태의 패널 위에 작가가 구현한 이미지는 온실의 투명한 보호막 밖으로 무한하게 펼쳐진 우주의 모습을 연상시키는 한편, 막 내부에서 통제되고 있는 인공적 생태계를 떠올리게 한다. 즉 패널의 화면 또한 외부와 내부 세계가 맞닿아 있는 임시 경계인 셈이다.
 
또한 여기서 작가는 근미래적 감각을 구현하기 위해 다양한 이미지 생산 방식과 물질적 실험을 병행했다. 이미지 생성 프로그램과 빅데이터 기반 AI를 비롯해 아크릴릭 미디엄, 돌, 건축 재료 등 이질적인 매체를 활용함으로써, 추상적 개념과 조건들을 시각적 형태로 전환하였다.


박석민, 〈Temple Dawn 06〉, 2025, 캔버스에 아크릴, 스프레이, 혼합매체, 73x62.5cm © 박석민

그리고 최근의 작업에서 박석민은 형태와 기운(氣運)의 상관관계를 탐구하며 세계 곳곳에서 현실과 초월적인 영역을 연결하는 지형지물의 조형적 특성을 빌려왔다. 최근 신작들에서 다루고 있는 불탄 나무, 돌탑, 물웅덩이는 염원, 치유, 신성 등 신묘한 기운을 내재한 대상으로서 화면에 자리한다.
 
신작들에서 작가는 물감 안료, 아크릴릭 페이스트, 겔 미디엄 등의 재료를 한 데 섞어 나이프를 사용해 펴 바르거나 에어브러쉬와 붓을 교차로 사용해 두껍고 얇은 질감을 복합적으로 구현해 색을 입혔다.
 
이는 회화에서 지지체의 형태, 재료, 기법의 정형화된 양식이나 방법론에 구애받지 않고, 오직 설정하고 있는 작업 방향에 적합한 재료와 방식을 취하려는 그의 태도를 드러낸다.


박석민, 〈Temple Incognita 01〉, 2025, 캔버스에 아크릴, 스프레이, 혼합매체, 75x75cm © 박석민

이렇듯 박석민은 물리적 세계와 사변적 세계가 맞닿는 경계에 주목해 왔다. 그는 삶의 주변부에서 발견한 사물이나 현상에 특정한 시공간과 감각의 서사를 부여하며 상상의 세계를 실체화한다.
 
익숙한 현실의 궤도에서 벗어난 불분명한 경계를 탐구하는 그의 작업은, 눈에 보이는 세계 이면에서 매 순간 생동하는 또 다른 ‘현재’를 상상하고 감각하게 한다.

"‘현재’라는 미지의 대상에 접근하고자 사유를 향한 ‘바라보기’의 형식을 제안하는 작업을 진행해 왔다. 이것은 그림과 감상자 사이에 일종의 비물질적인 커튼을 설정해 세계의 내부와 외부를 연결하는 새로운 회화의 가능성을 발견하려는 태도이다." (박석민, 드로잉룸 《라그랑주 포인트》 인터뷰 중)


박석민 작가 © OCI미술관

박석민은 홍익대학교 회화과를 졸업했다. 최근 개인전으로는 《Teal Greenhouse》(WWNN, 서울, 2024), 《Vortex 8》(에이라운지 컨템포러리, 서울, 2023), 《Angel Tail》(에브리아트, 서울, 2022), 《설탕을 녹인 공기》(아트스페이스 보안2, 서울, 2020) 등이 있다.
 
또한 작가는 《Rabbit Hole》(기체, 서울, 2025), 《FACE》(미메시스 아트 뮤지엄, 파주, 2024), 《Dubious Gaze》(WWNN, 서울, 2023), 《라그랑주 포인트》(드로잉룸, 서울, 2022), 《Every Where & Here》(더페이지 갤러리, 서울, 2020) 등 다수의 단체전에 참여했다.
 
박석민은 창작공간 달(2021), 국립현대미술관 고양레지던시(2018) 등에서 입주 작가로 활동하였으며, 제38회 중앙미술대전 및 2015 OCI YOUNG CREATIVES에 선정된 바 있다.

Reference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