플라톤은 시인추방론을 펼쳤지만, 스스로는 시학적인 것의 언어로 온갖 생성의 장소이자 우묵한 공간으로서 ‘코라’[Khora]를 이야기했다. 시학적인 것이란 로고스[말씀]의 권능으로만 수렴되지 않고, 거기에 뮈토스[상상력]와 파토스[에너지]가 어우러진 채 혼돈[混沌]의 힘을 현실화하는 것이다. 혼돈은 당연히 이목구비가 없어서 감각할 수 없으면서도 춤과 노래를 즐긴 신이라고 한다. 그것은 ‘코라’를 예찬하는 춤과 노래일 수밖에 없다. “가믈고도 가믈토다”[玄之又玄].
김주리 작가의 전시 《모습 某濕 Wet Matter》은 3개의 작품들이 모두 호흡을 하는 거대한 생명체처럼 설치되어 있다. 송은 아트스페이스 전 층에 걸쳐서 이 환[幻]에 가까운 숨결은 작가의 의도를 살려서 제작되었고, 관람은 그 생명체가 살아있는지 원초적인 의문을 갖고서 그 숨결 가까이 다가가는 형태로 이루어진다. 마치 인류학자 그레고리 베이트슨이나 생물학자 자크 모노가 “외계인이 지구에 당도했을 때, 생명체와 무생명체를 어떤 기준으로 판단하는가?”라는 질문을 던지며, 몇 가지 기준–상동기관과 상사기관의 식별 등–을 제시했던 것이 이 관람에서는 자꾸 상기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작품들은 흙과 물이 각각의 엘리멘탈 미디어[elemental media, 원소 미디어]로서의 본래적 특성을 지니면서도 그 분자적 결합에 의한 새로운 상태로 생성되었을 때, 그러한 기준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음이 명백해진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이 전시 관람은 일단 관람자가 마치 저기 어스름한 호리존트까지 걸어가서 그리스식 커튼–제욱시스와 파라시오스가 겨뤘던 ‘재현’의 극단적 형태–처럼 보이는 작품을 마주하면서 시작된다.
이 주름 장식이 하단까지 물결치는 듯한 작품은 어떤 현실적인, 현실에 근사한 재현으로 보이지 않으며, 되레 작품 제목으로 제시된 중의적인 언어의 트릭에 대한 힌트처럼 보인다. 즉 커튼의 형태를 하고 있기에 통상 시각적 대상으로서의 ‘모습’에 대한 암시인 동시에 그러한 모습이라는 가시성 너머의 잠재적인 것으로서 ‘젖은 물질’을 환히 밝히려는/은폐하려는 의도가 나타난다고 하겠다.
당연히 후자의 ‘젖은 물질’ 쪽으로 작가의 (비)조형적 비중이 기우는 것 같지만, 여전히 ‘모습’이라는 시각적 대상으로서의 지속 혹은 연속성을 완전히 배제하지 않고 있다. 즉 ‘젖은 물질’이 갖는 ‘코라’로서의 성격, 모든 구체적인 생성을 위한 질료[hyle]로서의 모태적 성격을 띠고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더니즘적 ‘원시주의적’ 오브제 같은 위상을 폐기하지 않는다.
김주리 작가의 의도는 이 재현적 ‘모습’과 ‘젖은 물질’ 사이의 균형을 가급적 유지한 채, 전시장 2층으로 오르기를 원하는 것이다. 판단중지 상태에서 현상학적 시선으로 두 번째 작품을 만날 때, 이제 ‘젖은 물질’은 1층의 커튼 형태가 하단에서부터 상단으로 이어지고 있음의 상기와 함께 그 이어짐이 무한할 수 있음에 가닿게 된다. 이는 2층에 설치된 작품이 뭐라고 판단하기 힘든 규모의 더미로서 흙과 물의 결합은 형식인 동시에 내용이며, 담는 것이 없으면서도 모든 것을 잉태하기 위하여 안으로 담긴 것이 되는 듯 보인다.
즉 ‘코라’의 이념은 이 2층에서 흙더미의 표면을 녹이면서 그 표면을 혼돈이나 제강 같은 신격이자 정의하기 힘든 괴수가 숨 쉬는 피부처럼 나타나게 한다. 여기에서 이미 ‘모습’과 ‘젖은 물질’ 사이의 균형은 깨어지며, 기관이 없는 이 거대한 몸체를 구성하고 있는 불변성과 불가해함이 환기된다.
“물은 흙의 죽음으로 살며, 흙은 물의 죽음으로 산다.” (헤라클레이토스)
김주리 작가는 흙, 물, 검게 물듦, 녹아내림, 소멸, 귀환, 존재의 집 같은 키워드로써 살펴볼 수 있었다. 그의 출세작 〈휘경〉에서 엿보이듯 인간의 역사, 특히 근대화와 그 이후의 퇴락한 건축 풍경이자 시간의 아카이브처럼 보이는 건축물의 역운[역사적 운명]이 물의 파괴적 힘에 의해 녹아내리는 일종의 물질적 퍼포먼스로 과거와 현재 사이의 교차시간적 경계지대를 드러내 왔다.
그 경계지대는 소멸의식이 서서한 시간 속에서 마치 제의처럼 진행되는 식역[liminality]–분리와 재결합 그리고 경계화의 영역–이었다. 경계지대는 흙이 물을 빨아들인 검은 섹터이자 그 섹터가 하단을 스스로 붕괴시키며 위로 움직이는 일종의 생명체처럼 작동하는 영역이었다. 이는 장소로서의 벽체이자 사물의 몸체가 고유 환경, 공동체, 시간의 무의식 등을 수동적으로 폐기하면서 파국을 맞이하는 퍼포먼스였다.
이는 1970년대 이후 한국에서 건축법이 바뀌면서 슬라브 지붕의 다세대주택이 무한히 건축되었고, 그 무한증식하는 건축이 대부분 ‘건축가 없는 건축’이자 ‘이웃의 집을 모방한 건축’이라는 사실이 그러한 파국적 특이점과 그 특이점의 계속되는 이동–파괴와 소멸을 동반한 이동–에서 특징적이었다.
왜냐하면 김주리 작가가 하이퍼리얼하게 편집증적이며 강박적으로 재현한 그 미니어처 건축물들은 익명의 민가주택이었고, 그럼으로써 “존재의 집”으로서 “생활세계”[umwelt]의 거처가 되는 이 집의 표상은 한 시대의 건축적 모나드였기 때문이다. 여기서 모나드[monad]란 한 세계를 반영하는 거울 같은 매체를 뜻한다. 그러한 모나드가 물에 녹아서 사라진다는 것, 그리고 본래의 ‘바다진흙’처럼 되돌아간다는 것은 굉장히 문명비판적이면서도 동시에 생성론적이기도 했다.
이 ‘바다진흙’은 죽은 식물과 동물의 부패한 잔해로 이뤄지는 것이 아니며, 빛의 작용으로 흙의 특정 성분이 물과 결합한 것이라는 것이 19세기 『자연철학 교과서』의 주장이다. 여기에는 여전히 근대 이전, 혹은 고대적인 물질론의 발상이 깃들어 있는데, 김주리 작가의 이번 전시에는 이처럼 빛의 작용이 지대하게 개입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태초에 소리가 있었다”라는 명제처럼 빛과 더불어 사운드 역시 결정적으로 이 ‘바다진흙’의 역운처럼 보이는 식역에 작용하고 있었다.
그럼으로써 상동 관계나 상사 관계 같은 기준에 의한 사이버네틱스–동물과 인간 그리고 기계 사이의 동형적인 자기조직화 과정을 탐문하는 기술과학–적인 관행, 다시 말해서 1960년대 이후 미디어아트와 함께 발동되기 시작하는 미디어의 관념은 이 전시에서 유효하기 어렵고, 그보다는 훨씬 광대한 시간적 주름운동, 가령 몇만 년 전의 조산운동이나 앞으로 몇십 년 후의 (대홍수를 포함한) 기후변화 과정이 즉각적으로 상상되며, 교차시간의 속성으로 개입한다.
이를 기존의 용어대로 ‘상상력의 소산’이라고 하거나 ‘숭고’ 개념으로 엮는 것은 부당한 것이며, 정확하게 ‘상서의 미학’으로 접근해야 한다. ‘상서’[祥瑞]란 시간의 흐름 한가운데 내재적으로 몸담고 있으면서 그 시간적 추이 속에서 길흉화복을 판단하는 개념이다. 즉 길[吉]한가, 불길[不吉]한가.
“모든 생명체의 기원인 근본 진흙은 바다 진흙이다.” (로렌츠 오켄, 1809)
테오리아[Theoria]–시각으로 봐서 알게 된다는 뜻의 그리스어–라는 관점에서 접근하는 모더니즘과 그 이후의 시각과 달리 상서의 미학은 질료적인 모태가 ‘코라’로부터 시간 속에서 변해갈 때 그 변화하는 것의 상서로움을 묻는다. 이는 ‘숭고’와는 다른 것이며, ‘바다진흙’으로 되돌아간 원소가 다시 그 ‘바다진흙’으로부터 새로운 생성의 잠재적인 것을 현현시키는 과정의 가치와 의의를 생각하는 것이다. “상서롭다”라는 것은 변화의 흐름 속에서 (비)조형적인 조형의 ‘모습’으로부터 그 사물적 에피파니를 체험하는 일이다.
《모습 某濕 Wet Matter》 전시는 3층까지 이어지면서 이러한 은은한 빛과 소리에 감싸여 숨을 쉬는 듯한 기이한 자기조직화의 생명성 징후를 체험하게 된다. 어두운 조도, 마치 낯선 천체의 낮은 중력 하에서 산책하는 듯한 표면 질감, 의식을 놓으면 금세라도 변성의식 상태[altered states]로 빠져들 것 같은 긴장감이 그 숨 쉬는 흙의 체험을 구성한다.
플라톤이 말한 ‘코라’라는 것은 결국 무엇인가. 김주리 작가의 작품을 음미하다 보면, 그 개념은 결국 ‘흑암’이라는 사실에 다다른다.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영은 수면 위에 운행하시니라.”(〈창세기 2절〉) 여기서 ‘흑암’에 대한 가치판단을 괄호로 묶어낸 중세회화를 참조하면, ‘흑암’의 표면 위에 드리워진 빛의 성격과 그 어둠 속의 빛이 갖는 권능이 그 격에 걸맞게 환히 밝혀진다.
이는 불길한 것이 아니며, 오히려 본래적으로 상서로운 것이었다. 그토록 김주리 작가가 이번 작품들, 물과 흙의 원소적 결합이 생명을 제공하는 물질로서의 물과 그 물이 품고 있는 심연의 성격을 강조하게 된 것에는 이러한 접근이 하나의 재해석이 되지 않을까 한다.
한편, 뒤늦게 관람의 포인트로서 환입되는 것은 작가 자신이 이 흙의 출처이자 과정으로서 특정한 토포스를 지목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작가는 중국 단둥 지역의 대지 풍경을 선택하여 그 습지 식생을 하나의 시간적 과정으로 참조되면서 그 지역이 위에서 말한 경계지대임을 숨기면서 드러낸다. 한반도와 만주, 범한인계와 범한족계, 하나의 한국과 두 개의 조선 등의 구분선은 이 경계지대의 흙의 특정한 상태가 왜 ‘젖은 물질’로서 현전해야 하는가를 의미하고 지시한다.
이 토포스적 정치이자 정치적인 것의 토포스로서의 흙이라는 매체는 김주리 작가가 〈휘경〉 등의 작업에서 일관되었던 역사적 가치의 은밀한 평가와 “역사화하라”(제임슨) 라는 수행성의 실천이 여전히 축축하게 배어있음을 증명한다.
이에 따라 흙이라는 질료는 발효 숙성 과정, 식물적 혼합 과정, 공업적 공정 그리고 흙과 흙 사이의 길항 과정 등등이 지난하게 이어지면서 제작되었다는 것이다. 이는 대지미술에서 흙을 재료로 할 때, 가령 로버트 스미스슨이 소용돌이 형태로 조형하고 호숫물에 잠겨 들게 하여 자연과 미술 사이의 구분선을 무화시키면서 더 이상 현대미술의 대상물로 보지 않게 했다는 설정과는 본질적으로 다르다.
김주리 작가의 작업에는 대지의 특성이나 상징 기호, 자연과 연루된 의미망 같은 수렴처가 없으며, 그 자체의 ‘흑암적’ 확장 내지는 잠재적인 것의 증폭이 강하게 여며져 있다. 오히려 의미를 안으로 머금으며, 쉽게 언어적 포획에 여지를 허용하지 않는다고 할까.
그럼으로써 구체적으로 식별되지 않는 비형태의 형태, 거대한 규모, 언어가 탈구되는 뮈토스적 접근이 우리가 일찍이 경험하지 못했던(!) 고대의 형상, 질료적 조물의 질서, 그리하여 지금의 문명으로 세팅되기 이전, 바야흐로 ‘축의 시대’[Axial Age]가 설치되기 이전으로 되돌아가는 ‘선조성’(퀑탱 메이야수)의 현실을 여기 가만히 구현해놓은 것 같다.
“영구히 마르지 않는 물기”의 상태의 연출이 빚어내는 위상학은 시간축선 위에서 태초의 조건을 불러다 놓는 느낌이다. 빛과 소리 그리고 표면의 환[幻]이 가하는 관람 체험은 분명히 교차시간의 에피파니가 강하게 딸려 나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