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에는 옆 동네였지만, 시야를 돌려보니 그러한 사건은 (재)개발 공화국의 편재하는 현실이었다. 정책이나 경기의 순환주기에 의해 생겨난 집들은 공간을 빠르게 잠식하고 기대수명을 채우지 못한 채 빠르게 사라진다. 그러나 개발이 이루어지는 시간대의 차이 때문에, 어느 지역은 지체 현상을 보이고 곧 사라질, 또는 사라져줘야 하는 과도기적인 풍경으로 남게 된다.
이전 작업인 ‘휘경’ 시리즈에서 작가는 재개발 예정지인 휘경동 풍경으로부터 ‘휘발하는 풍경’을 보았고, 작업실이 있는 동네를 비롯하여 여러 곳에 흩어진 재개발지 풍경들로부터 영감을 얻은 이번 《스케이프 컬렉션》(전시부제) 전은 전시장이 있는 한남동 지역을 대상으로 했다.
남산과 한강 사이에서 멋진 조망 권을 가진 한남동 지역은 주거지에서도 빈부의 격차가 완연하게 갈라지는 동네이다. 널직널직하게 세워진 ‘언덕 위의 하얀 집’들이 모인 부자동네 반대편에는, 이전의 낮은 슬레이트 지붕 집을 밀어내고 1970-80년대 새로 지어진 저층의 붉은 벽돌집들이 다닥다닥 붙어있다.
아마도 탁 트인 조망에 어울리는 고급빌라나 아파트를 목적으로 재개발될 예정인 그 장소들은 언젠가는 완전히 갈아엎으리라는 기대로 인해, 큰 공사가 아닌 자잘한 보수들로 연명하면서 최초의 구조와 형태가 차츰 변형된 곳이다. 그래서 곳곳에 작가의 눈을 끌만한 진기한 생활의 발명들이 심심치 않게 발견된다.
언덕에 있는 그 동네는 한쪽은 4층, 한쪽은 1층으로 된 계단형의 집이나 외벽 없이 ‘따로 또 같이’ 스타일로 붙어있는 집들, 지형이나 땅의 형태에 맞춰진 자연발생적인 집을 비롯, 밀집된 집들 사이의 미로 같은 가파른 골목들이 모세관처럼 뻗어있다. 김주리의 작품에는 어느 날부터 동네의 언덕을 잠식했었을 비슷한 스타일의 벽돌집들은 서서히 변형된 흔적들이 담겨진다.
계획된 인공구조물은 자연화 과정을 밟는데, 작품은 이 과정을 압축 재생하는 것이다. 동질적 몸체를 서서히 변형시킨 이질적인 요소들은 감추어져야 할 병적인 징후가 아니라, 드러내야 할 생성의 흔적들로 강조된다.
낡고 좁은 집들은 시간에 흐름에 따른 공간의 변화, 가령 덧대어지고 집적되며 증식되는 구조들로 포착 된다. 가파른 삶의 굴곡 면을 따라 집들은 끝없이 이어지며, 한 치의 빈틈도 없는 공간은 그자체가 이접의 연속체이다. 잡초처럼 생명력 있게 뻗어나가는 리좀적 형태들이다. 작업을 위해 작가가 모아놓은 풍경 사진들에는 밀집된 집들 사이로 어지럽게 얽혀있는 전선줄들을 발견하게 되는데, 그 또한 근경의 곁가지들처럼 보인다.
리좀의 구조는 미로처럼 길을 잃게 하지만, 리좀이 만들어내는 미로적 구조는 목적을 잃은 효율을 위한 최단거리가 만들어내는 폭력을 유예시키는 방어막이 되기도 한다. 몇 십 분의 일로로 축소한 모델을 통해 무너지는 과정이 극적이다. 이 시간적인 과정은 사진이나 드로잉을 통해서도 표현되었다. 집을 만든 후 하얗게 코팅하여 무너뜨린 후 찍은 사진 작품은 물에 의해 갈라진 표피들이 내부의 살점들과 대조되면서 표현 수위가 더욱 자극적이다.
벽에 걸린 드로잉에는 난간들로만 연결된 구조가 있다. 서로 다른 구조가 시점을 달리하면서 리좀적으로 연결된다. 이러한 우연적 연결망은 누군가에게는 정리되어야 할 무질서로 보이겠지만, 누군가에게는 소수에게나 유토피아를 제공할 새로운 질서와 대조되는 헤테로피아의 풍경으로 다가온다. 헤테로피아는 ‘주어진 사회적 공간에서 나타나는 희귀한 공간들이며, 그 기능이 다른 것과 다르거나 심지어는 정반대’(푸코)이다.
그것은 ‘사회적 결정이라는 뿌리로부터 해방된 공간적 이미지’(데이비드 하비)를 가진다. 총체적으로 계획되어진 것이 아니라 오랜 세월 동안 덧붙여진 구조들은 다소간 무원칙적으로 보이지만, 모두가 필연적인 것들이다. 거기에 그것이 있어야할 이유들이 반드시 존재한다. 이 자연화 된 풍경에는 자연과 마찬가지로 불필요한 여분의 것들이란 없기 때문이다. 작업과정은 집을 짓듯이 치밀하다. 컴퓨터상에서 3차원 도면까지 그린 후에 제작되는 것도 있다. 곧 와해될 집들은 백토로 만든 판으로 거의 사실에 가까운 형태로 만들어진다.
작업의 마지막 단계는 전시 오픈이나 그 전날 물을 부어서 아래로부터 서서히 침식시키는 과정이다. 물과 흙이 만나 반응하는 속도에 의해 파괴의 정도는 다르다. 물을 많이 부으면 2-3일 안에도 스러진다. 물과 중력으로만 변화가 일어나기에, 물의 양은 전시 기간에 따라 조절한다. 백자토로 만들어진 축소모델은 외관이 정확히 재현되어 있지만, 색은 흙색 그대로이다. 그것은 집의 알맹이를 그대로 드러내려는 것이다. 거의 와해되어 터와 흔적만 남은 것도 있다.
무너진 흔적들이 그대로 남아있는 현대판 유적지 같다. 이 전시의 대표작은 축대 위에 7-8채가 붙어있는 집들이다. 닮았으면서 약간씩 다른, 가족유사성을 가지는 집들은 한남동에 있는 실제 건물을 모델로 했다. 그러나 완전히 똑같지는 않으며, 건물의 특정 요소로만 이루어진 환상적 구조물도 있다. 입구도 출구도 없이 난간만으로 이루어진 집이나, 데칼코마니처럼 분열중인 벽돌집은 증식의 방식을 예시한다.
무성생식처럼 분열하는 방식은 원초적이면서도 강인한 생명력을 전달한다. 개체가 증식되는 과정을 담은 이러한 환상적 모델은 굳이 무너뜨릴 필요는 없다. 그것은 구조체의 형태를 갖추고는 있지만 이미 무너져 있거나, 무너진 파편들 속에서 불사조처럼 일어나는 힘을 상징한다. 작가는 왜 그리 누추하고 궁색한 풍경에 주목하는가? 그것은 그러한 풍경들이 하나의 유일하고도 객관적인 시공간 개념을 배반하기 때문일 것이다.
자연 또는 삶의 굴곡 면을 따라 펼쳐지는 중층적 표면들은, 강력한 하나의 깊은 뿌리와 기둥을 가지면서 격자형으로 뻗어나가는 지배적인 권력에의 의지를 거스른다. 오랜 세월동안 미세하게 뻗어온 삶의 그물망은 어느 날 한꺼번에 걷어 내어져야할 쓰레기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독특한 시공간적 경험을 담은 이러한 구조물들은 쓰나미처럼 몰려오는 하나의 힘(권력)에 의해 한시적인 생명만을 부여받는다. 그것은 다양한 가치가 인정되지 않는 사회에서 독특한 실천으로 남아 있으려는 예술에 가해지는 폭력과도 유사하다.
김주리의 작품은 타자가 타자의 편에 선 경우에 해당된다. 추상적인 힘에 의한 구체적인 자리의 소멸은 엔트로피의 법칙에 따라 무질서도가 증가하는 불가피한 과정인가? 그러나 자연력처럼 다가오는 폭력은 정당하지도 불가피한 것도 아니다. 물을 쏟아 부음으로서 자연의 과정을 가속시키는 행위는 그 파괴력을 자연에만 한정시키지 않는다. 물과 흙으로만 생성되고 소멸하는 광경들은 자연이 아니라 사회적 풍경인 것이다. 인간 사회는 자연력을 그들의 기준으로 조정한다.
사회는 하나의 힘에 대해서만 합법성과 효율성을 인정한다. 김주리의 작품은 구체적 특수성이 그대로 새겨진 삶의 자리들이 추상적 보편성에 의해 사라지는 모습을 담는다. 이 추상적 힘은 소수에게 권력을 집중시키는 자본주의의 경향에 의해 발생되고 강화된다. 지리학자 데이비드 하비는 『포스트모더니티의 조건』에서 자본은 과정이지 사물이 아니라고 말한다. 자본은 상품생산을 통한 사회적 생활의 재생산과정이라고 할 수 있는데, 자본의 내재화된 작동규칙은 자본이 쉴 새 없이 사회를 변형시키는 역동적이고 사회조직 양식임을 확인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