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이 글에서 김영글의 돌 이야기에 몇 가지 유의미한 사변을 추가해보고자 한다. 김영글은 이번 전시에서 방대한 ‘돌 이미지’ 수집을 중심으로 동서고금을 가로질러 돌과 관련한 문화 · 예술사적 자취를 훑으며 사적 감상과 미술 비평을 아우르는 풍부한 서사를 구축하였다. 이 글이 여기에 더할 수 있는 역할이 남아 있다면, ‘돌’을 둘러싼 갖가지 사유와 스토리텔링을 주도한 미술 작가 김영글과 김영글에게 사로잡힌 ‘돌’로 투영 가능한 미술(품)의 유물론적 미덕을 상기해보는 것이 아닐까 싶다.
여기에서 유물론적 미덕이라고 함은 단순히 물질적 조건에서의 미술품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미술이라고 가정하는 것, 미술이 아닌 특정한 주제를 지시 refer함으로서 미술이 되는 것, 미술을 제시 present하거나 기록하지 않고, 그래서 미술이 더는 현존하거나 가시적이지 않은 채, 오히려 부재하거나 가려져 있다는 사실을 드러냄으로써 미술을 말하게 되는 미술의 자기 역학적인 법칙과 유사하게 여겨질 수 있다.
이러한 사고의 과정은 따라서 전통적인 범주에서 미술인 것과 미술이 아닌 것 사이의 관계를 둘러싼 변증법적인 논리 안에서 미술을 인지하게 만드는 하나의 현대 미술 방법이라고 볼 수 있겠다. 대상이 형태로 나타나지 않는 미술, 다시 말하면 전통적인 방식에서 창조적인 활동의 결과나 산물이 아닌, 활동 자체가 미술인 미술 실천과 미술 생각은 어떤 면에서 삶과 일치하는 행위이자 수행적인 미술이다. 미술적 결과보다는 미술을 고민하는 과정과 고민의 주체가 고스란히 드러난다는 의미에서 그렇다.
그리고 이러한 사유 행위나 행위의 과정이 미술 전시장에서 나타날 때는 미술적 사고의 수단을 통해 미술을 질문하는 것이야말로 동시대 미술가의 특권처럼 여겨진다. 흔히 말하듯 무에서 유(의 형태)를 창조하는 순수 예술 fine art이 아닌, 현실의 사물들을 건설하고 구성하는 이미지와 사유의 집합체를 통한 탐색만으로 미술이 되니 말이다.
김영글의 《사로잡힌 돌》 전시는, 아니 김영글의 미술적 스토리텔링은 이 전시에서 멸종한 생물 우표 콜렉션으로 만든 콜라주 작업 〈Unposted Letters〉부터 시작한다. 우표는 사전에 우편 요금을 지급한 증표로서 편지를 부치기 위한 통신수단이지만, 동시에 다양한 시대, 역사, 문화, 주제에 따른 이미지 기록을 작은 종이에 담아 보관하는 일종의 ‘예술품’이다.
〈Unposted Letters〉를 구성하는 두 개의 액자에는 양쯔강 돌고래, 큰 나무늘보 여우원숭이, 테즈매니아 늑대, 검치 호랑이, 오스트랄로피테쿠스 등 멸종한 동물들이 한 페이지에 모인 콜라주 이미지와 이들을 부르는 이름 목록이 담겨 있다. 지금은 존재하지 않는 사라진 생명체들이 한자리에 모인 허구의 이미지는 어떤 면에서 이상적인 공동체를 그리는 것 같기도 하고, 제대로 읽거나 기억하기도 힘든 흔치 않은 이름과 사라진 연도의 표기는 지구 생명에 대한 기념비로도 읽힌다.
하지만 이 사적 수집과 기억에 대한 기록물은 오히려 진지한 농담에 가까운 어조로 전시의 서문을 열어준다. 이어서 배치된 한 장의 사진은 옥빛 파도가 넘실거리는 어느 바닷가 풍경이다. 바위 끝에서 파도를 내려다본 시점을 담고 있는데, 〈우화〉라는 이 사진의 제목은 지금부터 펼쳐질 이야기 세계가 신비로우면서 비현실적인 시점의 설정을 두고 당신을 속여보겠노라고 선언하는 듯하다. 이렇게 우리는 바닷속 용왕님을 만나러 가듯 김영글이 제시하는 〈사로잡힌 돌〉이라는 허구의 세계로 진입한다.
큰 직사각형 형태의 전시장에는 김영글이 모은 각종 돌 이미지가 골판지 박스의 한 면씩에 붙어 층층이 쌓여 있다. 〈돌 탐구〉라 이름 붙여진 이 이미지 집합체를 살펴보면 직사각형 전시장 한 면마다 각각 ‘얼굴들’, ‘보시기에 좋았더라’, ‘터무니와 어처구니와 짊어진 자들’, 그리고 ‘불충분한 역사’라는 네 개의 챕터로 나누어 구성됨을 알 수 있다. 첫 번째 챕터 ‘얼굴들’은 제주도 돌하르방, 자유의 여신상, 미켈란젤로의 다비드상, 스핑크스, 불상, 예수상, 성모마리아 상, 멕시코의 올메카 두상 등 길고 긴 인류 역사에서 기억되고, 이야기되고, 만들어지는 얼굴들 이미지 모음이다.
두 번째 챕터 ‘보시기에 좋았더라’는 르네상스 군상 회화와 동자승 석물에서 시작해서 각종 돌탑, 남근석과 여근석 등의 이미지 모음이다. 마치 ‘성인물-우화’ 제목을 연상시키는 부제는 ‘얼굴들’에서 언뜻 비친 ‘성현 hierophany’의 반대항에 둔, 일상적이고 세속적인 것들의 집합으로도 해석될 수 있다. 아무것도 아닌 돌멩이를 쌓아 만든 돌탑을 통해 무엇인가를 염원하고 바라는 마음, 초월적인 존재를 믿고자 하는 마음처럼, 두 번째 챕터로 넘어오면서 우리는 성 profane과 속 sacred의 이중적 구조를 내심 생각해보고, 또 속을 통해 성을 다시 생각해보게도 된다.
세 번째 챕터는 ‘터무니와 어처구니와 짊어진 자들’ 이라는 제목으로 구성되어 있다. ‘터무니’와 ‘어처구니’는 단독으로 쓰이기보다는 주로 ‘없다’라는 동사와 합쳐져서 이치나 도리에 맞지 않는 상황에서 허탈해짐을 표현한다. 이 단어들의 어원을 찾아보면 맷돌을 돌리는 나무막대로 된 손잡이를 ‘어처구니’라 부르고, 집이나 건축물을 세운 자리를 뜻하는 터에 관한 무늬나 흔적을 ‘터무니’라고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어처구니가 없이는 맷돌을 돌릴 수가 없고, 터무니가 없이는 집이나 건축물이 있었던 정황을 알 길이 없으니, 있을 땐 당연하지만 없으면 말이 안 되는 이치나 논리가 바로 이 두 단어인 것이다.
그리고 없을 수 없고 당연해야만 하는 무엇을 ‘짊어진 자들’은 결국 인간과 인간의 삶 그 자체로 연결된다. 마지막 챕터 ‘불충분한 역사’에서는 돌에 새겨진 생명과 표현의 흔적이나 돌 자체로 나타나는 존재 증명의 본질을 되묻는 사진들로 구성되어 있다. 석기 시대 사냥을 위한 돌 연장, 돌에 새겨진 이집트 상형문자, 담벼락 그림, 아르헨티나의 동굴 암각화, 우주에서 본 지구, 인류 최초의 달 착륙까지 일련의 이미지들은 역사의 기록에도 남아 있지 않은 인류와 인류 존재의 신비로움을 들춰준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돌을 지렛대 삼아, 미술 혹은 미술적 삶과 현실 사이의 거리를 주제화하는 김영글의 우화를 완성하는 건 전시장 한가운데에 놓여있는 책 〈사로잡힌 돌〉이다. 전시장에 펼쳐진 이미지와 이미지를 이어붙이며 예술 자체에 대한 적정 거리를 유지하는 징검다리는 그녀의 유려한 말재주로부터 나온다. 이쯤 되면 김영글에게 사로잡힌 게 돌인지 각종 돌을 보며 그녀의 이야기를 듣는 우리인지 헷갈리기 시작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