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수진(b. 1986)은 여행이나 산책에서 마주한 장소와 상황을 기반으로, 기억과 감각, 체험과 환상이 뒤섞인 이미지들을 중첩하며 회화적 공간을 구축해 왔다. 서로 다른 시간과 장소의 파편들이 한 화면 안에서 교차하며, 마치 꿈속에 빨려 들어간 듯 낯설고 이질적인 세계를 펼쳐 보인다.
 
시공간의 질서가 느슨하게 해체된 최수진의 화면 위에는, 기억의 잔상과 마음속 상념들이 층층이 쌓여 있으며, 이를 한 번에 펼쳐냄으로써 독특한 회화적 공간감과 서사적 구조를 만들어낸다. 


최수진, 〈빨강을 건져올리는 사람〉, 2021, 캔버스에 유채, 181.8x181.8cm © 최수진

자전적 서사에서 파생된 또 다른 서사의 재구성으로 다소 일상적이고도 낯선 모습이면서 때로는 몽상으로 가득한 풍경, 정물, 인물들은 최수진의 주된 작업의 소재이자 다양한 정서적 상황을 연출해나가는 기제이다.
 
어느 날 작가에게 유난히 생경하게 다가온 풍경들, 이를테면 울퉁불퉁한 땅과 우거진 나무, 기원이 담긴 돌이나 돌탑, 집 앞에 아무렇게 혹은 의미 있게 놔둔 정경 등은 즉각적인 사진촬영을 통해 일차적인 이미지로 기록된다. 그리고 이 사진 이미지들은 회화로 옮겨지는 과정에서 당시의 기억과 느낌을 이끌어내는 도구로 작용한다.


최수진, 〈구름철망〉, 2011, 캔버스에 유채, 193.9x130.3cm © 최수진

초기의 작업에서 최수진은 불안과 혼란, 무기력과 같은 자신의 심리적인 상태를 바탕으로 뻗어 나간 몽환적이고 수수께끼와 같은 상상의 이미지를 화면 안에 엮어냈다. 작가 자신의 경험이나 기억 속, 혹은 꿈속 기억의 파편들을 그러모아 만들어진 화면은 마치 알레고리처럼 인물 또는 사물들이 새로운 의미연관을 맺는 장이 된다.
 
가령, 어린 시절 어두운 숲을 통과해야 했던 경험에서 각인된 기억과 감각의 결들은 초현실적인 화면속으로 새롭게 자리잡는다. 이와 함께 자주 그려지는 구름이나 안개와 같은 기체 상태의 이미지들은 계속해서 길을 헤매게 만드는 어두운 숲처럼 완벽하게 해석 불가능한, 불확실성으로 가득한 세계에 대한 작가의 인상을 반영한다.


최수진, 〈불안의 노래〉, 2011, 캔버스에 유채, 130.3x193.9cm © 최수진

최수진은 이처럼 꿈꾸듯 흐릿하고 모호한 상태의 세계로 펼쳐진 각각의 작품들에 대해 하나의 소설을 짓는 과정이라고 말한다. 몽상적 세계는 의인화 된 시적 풍경으로 나무와 소년이 서로를 껴안기도 하고 (〈나무를 껴안은 남자〉) 숲을 잠자리 삼아 누워있는 불면증에 걸린 사람을 초현실적으로 재현(〈불안의 노래〉)하기도 한다.
 
미술비평가 정현은 이러한 최수진의 작업에 대해 “형상과 비형상, 인간과 자연, 사물과 비존재는 기체 상태의 회화적 세계를 보여주면서 평화, 공존, 불면, 불안, 막연함, 희망, 유희와 같이 매일 겪어야 하는 작가의 심리적 변이를 세심하게 묘사하고 있다”고 평한다.


최수진, 〈먼지부엉이〉, 2013, 캔버스에 유채, 72.7x116.8cm © 최수진

한편, 2012년 이후 작업에서는 점차적으로 개인의 심리적 상황에서 벗어나 외부와 현실세계에 대한 ‘관찰자’의 시선을 가지게 되었던 작가의 내적 변화를 여러 관점에서 목격할 수 있다.
 
또한 이전에는 그저 배경이었던 풍경이 주제로서 더욱 부각되는 경향이나, 인물의 비중은 줄어들고 동물이나 식물, 캐릭터 등이 주인공이 되거나 인물의 흔적만이 그림 속에 나타나거나, 그리고 풍부하고 다채로워진 색채나 과감한 붓터치 등 소재와 표현에서도 변화가 생기기 시작했다.  


최수진, 〈서귀포의 돌들〉, 2014, 캔버스에 유채, 50x50cm © 최수진

최수진은 여행이나 산책길에 관찰하고 경험했던 촉각적이고 시각적인 감각의 풍경들을 회화적 언어로 옮겨내며 보는 이로 하여금 그림을 통해 그러한 감각을 새롭게 체험해 볼 수 있도록 하였다.
 
이를테면, 세 번째 개인전 《Lumpy Bumpy Ground》(2014)에서는 손으로 만질 수 있을 것 같은 울퉁불퉁한 촉각적 풍경을, 네 번째 개인전 《모서리 산책, 무지개 숨》에서는 산책을 통해 마주한 풍경과 그것이 서로 다른 공간으로 옮겨지며 맺는 관계를 다루었다.
 
이러한 작업들에서 풍경을 보거나 느끼는 감각에 대해 다루었다면, 다섯 번째 개인전 《무지개 숨 제작소》(2017)에서는 풍경이 지워진 까만 배경 위에서 부지런히 움직이는 인물들과 색 자체가 부각되어 나타난다.


《무지개 숨 제작소》 전시 전경(합정지구, 2017) © 합정지구

이 인물들은 전시명인 ‘제작소’에 걸맞게 각자 다들 색을 다루고, 만들고, 고르는 모습을 하고 있다. 여기에 연극의 무대처럼 어둡게 표현된 배경은 색에 대한 인식, 색을 만드는 과정, 보다 정확하게는 적절한 색을 찾아, 형상을 만드는 인물의 동작을 더욱 두드러지게 만들며, 간혹 부분적으로 완성될 회화의 모습을 슬며시 드러내면서 작품 간의 연결고리를 제공하기도 한다.
 
이러한 작업들은 대상을 바라보는 작가적 시선과 인식의 문제가 발현되는 지점, 그리고 그것이 회화의 화면 안에 이미지로 옮겨지는 과정에 대한 보다 근본적인 물음에서 출발한다.


최수진, 〈으랏챠〉, 2015, 캔버스에 유채, 130.3x193.3cm © 최수진

이러한 작업들은 대상을 바라보는 작가적 시선과 인식의 문제가 발현되는 지점, 그리고 그것이 회화의 화면 안에 이미지로 옮겨지는 과정에 대한 보다 근본적인 물음에서 출발한다.
 
그간의 회화가 그림의 대상이 되는 인물 혹은 인물들 간의 관계에 집중했다면, 이 전시에서는 그 대상을 회화적으로 표현하고 싶은 찰나, 작가로서 ‘그리기’를 고민하는 순간들을 회화적으로 표현하는 시도를 담는다.


최수진, 〈어떤 산책〉, 2017, 캔버스에 유채, 200x300cm © 최수진

실제로 호흡이 공기의 운동과 흐름을 만들어내듯 그의 그림에서 대상에 대한 주관적 심리를 은유적으로 표출하는 방식 중 하나였던 ‘숨’은, 다양한 색채와 형체, 리드미컬한 붓의 움직임을 만들면서 물감의 표현과 표면의 요철을 결정하는 중요한 요소다. 무엇보다 숨은 작가가 본능적, 혹은 직관적으로 대상을 회화적으로 인식하는 순간을 의미한다.
 
전시 제목의 ‘무지개’는 공기 중에서 일어나는 현상이라는 점에서 숨의 또 다른 시각적 표현방식이기도 하지만, 색을 통해 대상에 대한 개인의 생각과 느낌을 전달한다는 의미를 지닌다.
 
이러한 맥락에서 ‘무지개 숨’이란 대상에 대한 찰나의 인식을 다양한 색을 통해 회화적으로 표현하는 과정을 의미하며, ‘제작소’는 그러한 과정이 실제로 일어나는 장소로서 작가의 신체, 대상에 대한 인식이 구체적인 회화적 실천으로 옮겨지는 장소, 즉 색과 인물들의 다양한 동작을 통해 시각적 은유가 생성되는 곳을 지칭한다.


최수진, 〈Patchwork AM〉, 2023, 캔버스에 유채, 200x200cm © 최수진

이후의 작업에서 최수진은 되풀이되며 반복되지만 앞으로 나아가는 시간의 덩어리들을 회화로 풀어나가기 시작했다. 이전의 작업에서는 시간을 순간들의 나열로 감각했다면, 시간을 점차 덩어리로 바라보게 되면서 그런 시간에 대한 감각이 회화를 다루는 방식으로도 연결되어 나타났다.
 
또 최근의 작업에서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동물들은 작가가 매일 동네를 산책하며 관찰한 주변의 동물과 새, 곤충들에서 비롯됐다. 작가는 이 생물들의 움직임과 행렬을 유심히 관찰하다 보면 인간의 생태와 별반 다르지 않거나 깊게 연결되어 있다는 느낌을 받곤 한다고 말한다.


최수진, 〈훗투투-훗투투〉, 2023, 캔버스에 유채, 116.8x91cm © 최수진

최수진은 페인팅을 시작하기 전 특정한 색상을 떠올리고 난 후, 매일 일상에서 관찰하는 동물들과 정물들 중 선택한 색에서 연상되는 것들을 골라 화면에 재배치한다. 그렇게 일상의 시간으로부터 만들어진 이미지는 눈부신 색상의 초현실적 풍경들로 완성되고, 또 다른 이야기의 구조를 만들어 나간다.


《Air Pages》 전시 전경(에이라운지 컨템포러리, 2024) © 에이라운지 컨템포러리

2024년 에이라운지 컨템포러리에서 열린 개인전 《Air Pages》에서는 주인공 역할을 해온 생물체들의 비중을 줄이고, 풀벌레 소리가 들리는 초여름이라는 시간대 자체를 화면 안에 진공의 사색적인 공간으로 연출하였다.
 
그는 하루라는 시간 자체를 미스터리한 창작의 에너지가 꿈틀거리는 생성과 소멸의 무대로 바라보고 시간의 주름 사이에 투과·투영되는 기억과 감각을 회화로 재구성하고자 했다.


《Air Pages》 전시 전경(에이라운지 컨템포러리, 2024) © 에이라운지 컨템포러리

먼저, 빈 캔버스 앞에서 색면을 충동적으로 배치한 다음 하늘과 대지 혹은 천장과 바닥이 혼합된 장소를 만들어 들어갔다. 그리고 커튼, 베개, 테이블, 침대와 같이 일상에서 매일 반복되어 사용되는 사물들을 캔버스 안에 기본적인 요소들로 배치하고, 그 위에 미술사 속에서 마음에 와닿는 부분들을 차용하거나, 식물과 동물, 곤충들을 배치하여 구조적으로 가상 서사가 있을 것 같은 화면을 연출하였다.
 
또한 작가는 곳곳에 망상적이고 농담적인 드로잉을 배치하고 화면의 구조를 끊임없이 의심하고 주조색과 밸런스를 의식하며 마무리의 단계까지 끌고 나갔다. 완벽한 표면보다는 조금 흐트러지거나 미완의 표면을 곳곳에 배치함으로써 느슨하고 경쾌한 화면을 만들어 나갔다.
 
이처럼 작가는 매일 반복되는 일상과 기억의 조각들을 패치워크하듯 엮어내어, 몸속 깊이 체화된 시간의 덩어리들을 회화라는 새로운 공간 안으로 펼쳐낸다.  


최수진, 〈Sunset Splash〉, 2025, 캔버스에 유채, 210x170cm © 최수진

이렇듯 최수진은 내면의 상태에서 출발해 그 바깥의 일상적 존재들이 모습을 드러내는 순간들, 그리고 일상에서 축적되어 체화된 특정 시간대의 감각을 덩어리로 떠올리며 회화적 언어로 재구성하는 작업을 해왔다.
 
특정한 색채를 직관적으로 떠올리는 순간에서 시작된 그의 화면은 일상의 파편들과 무의식의 잔상, 기억과 감각들이 촘촘히 직조된 의미의 층위를 만들어낸다. 관객은 그 안에서 작가의 일상과 그에 스며든 감각들을 간접적으로 경험하는 동시에, 문득 자신만의 기억과 무의식의 풍경 속으로 스며들게 된다.

"하루의 출현과 반복으로 펼쳐지고 사그러드는 시간들을 감각하며, 회화로 특정 시간들을 뭉쳐낼 수 있는 오묘한 지점을 탐구하고 있다." (최수진, 작가 노트)


최수진 작가 © 구하우스미술관

최수진은 중앙대학교 서양화과를 졸업하고 동대학원에서 석사 학위를 취득했다. 최근 개인전으로는 《Air Pages》(에이라운지 컨템포러리, 서울, 2024), 《Pastry Pillow》(WWNN, 서울, 2023), 《Rainbow Letter》(Artmia Space, 하이난, 중국, 2022), 《Fruity Buttercream》(AIT, 서울, 2021) 등이 있다.
 
또한 작가는 《Faisandage》(지갤러리, 서울, 2026), 《낮에 꾸는 꿈》(우란문화재단, 서울, 2026), 《The Mutable Line》(지갤러리, 서울, 2025), 《이런 다정함만 있다면》(합정지구, 서울, 2024), 《SUN ROOM》(BB&M, 서울, 2023), 《High, Light – 빛, 예술을 만났을 때》(구하우스미술관, 양평, 2022), 《사유의 베일》(일우스페이스, 서울, 2022) 등 다수의 단체전에 참여했다.
 
최수진은 아트미아 레지던시(베이징, 2020), 관두미술관 레지던시(타이베이, 2019), OCI미술관 창작스튜디오(2015-2016) 등의 레지던시 프로그램에 참여했으며, 그의 작품은 아트미아재단, 포도뮤지엄, 경기도미술관, 정부미술은행, 포스코미술관 등에 소장되어 있다.

Reference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