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유연, 〈어느 날〉, 2012, 장지에 채색, 162x162cm © 양유연

양유연은 풍경을 바라본다. 오래된 낡은 건물, 구멍 난 바닥, 침잠된 벽면, 굴뚝에서 올라오는 검은 연기, 낯선 집, 사고현장 … . 그는 길거리에서 수없이 많은 흠집투성이의 풍경들을 응시하며 자신의 성장기에서 겪은 상처의 기억을 더듬는다. 그 상처는 ‘두려움’이라는 단어로 집약된다.

학부 때부터 이어온 그런 작업성향이 이젠 치유되거나 벗어날 법도 한데 여전히 집착하고 있는 이유가 무엇일까? 늘 궁금하던 차에 2개월 전, 작업실에 들렀는데 한 작품이 눈에 들어왔다. 〈어느 날〉, 이 작품에 또렷이 새겨 진 ‘마음’이란 작은 글씨가 달과 건물의 형태보다 크게 내 마음에 와 닿았다. 순간 그 집착에서 벗어나려는 의지가 엿보였다. 

이 ‘마음’은 건물을 삼킬만한 커다란 달과 거의 맞닿아 있다. 건물 끝, 경계 사이에서 그 ‘마음’은 그에게 있어 새로운 환상을 꿈꾸는 작은 소망과 욕망인지 모른다. “요즘 뭘 그리고 있는지 모르겠다.”는 그의 의중이 그 사이의 경계에 위치되어 있기 때문이 아닐까? 이러한 위치는 ‘세상-나-사회’의 관계를 두루 살피면서 내가 가야할 방향을 모색-실험하는, 20대말 애매한 젊음의 과정에서 당연히 넘어야 할 예술가의 첫 관문이라 할 수 있다. 넘어야 하는 과정에서 고민의 결정체가 ‘어느 날’에 고스란히 담겨져 있다.

태(態)가 살아나서 형(形)을 돋보이게 하는 형국이다. 과분한 표현이긴 하지만 “너무 아름답다!” 그 달은 세상을 비추듯 허름한 건물의 동네를 환하게 비추며 상처 깊었던 그의 마음을 어루만진다. 이런 환상은 그때 그 장소에서 필자가 유일하게 느꼈던 순간의 아우라(Aura)였고, 시공간이 머무르는 현존 그 자체로 다가왔다. 

한 울타리에 공존하고 있는 달과 도시, 함께 있는 의미만 곱씹어도 낭만적이다. 그러나 작가는 사각 프레임 안에 낭만보다는 서로 다른 양면을 대립·긴장시킴으로써 그 사이에서 충돌되는 환상과 그 환상에서 일어나는 약간의 멘탈붕괴를 스스로 노리고 꾀하였는지 모른다. 익숙한 일상의 도시 공간에 낯설고 엉뚱한 풍경의 등장은 시공간을 초월하여 1mm의 종이두께 위에 생경한 환영을 불러일으킨다. 하지만 이상한 풍경을 목격하고도 평안하다. 그 속에 마음이 있다.

아니 그림 속에서 그는 마음을 찾았다. 양유연에게 ‘마음’은 지금껏 그려왔던 상처, 폭력, 흠, 흉 등의 개인적인 찌꺼기들을 지각하고 사유하여 정화시키는 역할을 해왔다. 〈어느 날〉을 중심으로 〈겉면〉, 〈낮달〉, 〈세월〉, 〈환상〉, 〈접점〉 등이 그려졌다. 이들은 모두 그 중심에서 파편화되어 각기 다른 현상을 지니고 있다. 개인적 관심에서 그려진 〈상처〉, 〈멍〉 등의 전 작업에서 사회적 사건, 이슈, 현상 등의 시선을 옮겨놓고 있는 것이다. 

자연의 파괴와 문명의 이기로 인해 변화될 수밖에 없는 현대사회에서 어린(젊은) 작가의 눈과 마음속에는 현실이 부정적으로 오고 그 부정은 환상의 형태로 변모하게 된다는 것을 이 작가를 통해 깨닫는다. 바닥에 구멍 나고, 매일 사건이 터지고, 권력은 또 다른 권력을 낳고, 말로서 흠집 내는 이 사회에서 불안증을 느끼지 않는 것이 이상할 정도다. 양유연은 달과 도시의 환상을 대치시킴으로써 사람들에게 침잠된 의식을 불러일으키게 한다.

마음을 통해 세상을 다시 보려고 하듯, 그의 시선은 부모님의 결혼식 장면을 재현해놓은 〈시작〉이라는 작품에 잠시 머문다. 이내 또 다시 어떤 여정으로 옮겨 탈지 모른다. 그는 형식의 가면보다 내용의 가면을 쓰려고 한다. 그것이 은유적 표현이든, 서술적 표현이든, 서사나 서정적 표현이든 간에 ‘감정’을 ‘마음’이라는 그릇에 어떻게 담아야 하는지를 알았다는 것이 이번 전시에서 그가 얻은 큰 수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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