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유연(b. 1985)은 장지와 먹, 그리고 아크릴 물감을 활용하여 사회 구조 속 불안정한 현대인의 감정 상태를 포착하는 작업을 해왔다. 그의 그림이 가진 특유의 분위기와 수수께끼 같은 화면은 드러난 현상 이면의 그림자와 같은 개인들의 실존적 고민과 고독감을 담아낸다.


제58회 카네기 인터내셔널 전시 전경(카네기미술관, 2022-2023) © 카네기미술관

양유연은 빛과 어둠의 대비를 활용해 오늘날 불안정하고 불확실한 현실 속에 살아가는 개인들의 불안과 소외감 등의 감정의 파편들을 담아낸다. 물감을 흡수하는 장지의 성질과 연한 물감을 여러 겹 쌓아 올리는 기법으로 만들어진 표면은, 이러한 내면 깊은 곳에 자리한 감정의 층위를 한 겹 한 겹 녹여낸다.
 
한편, 소용돌이치는 내면의 감정들을 한 겹 씩 눌러 담으며 만들어진 화면은 감정이 절제된 듯한 부드러운 분위기를 자아낸다.


양유연, 〈Tangled〉, 2022, 장지에 아크릴, 65x53cm © 스테판 프리드먼 갤러리

또 그의 작업에서 드러나는 특징 중 하나는 인물이나 사물의 전체 모습을 담아내지 않는다는 점이다. 언제나 인물이나 사물의 일부분만 포착하고 확대하여 그림으로써 부분들과 표면들이 깊고 무거운, 심지어 숭고하기까지 한, 거대한 존재감을 가진 대상이 된다.  


《옥토버》 전시 전경(아르코미술관, 2017-2018) © 아르코미술관

초기의 작업에서 양유연은 매스 미디어를 통해 접한 정치적인 순간들을 화면에 가져오거나, 직접 보고 경험한 현장에서 촬영한 사진을 바탕으로 현실의 단편들을 은유적으로 그리곤 했다.
 
이때 작가는 원본의 이미지를 변형시키며 의도적으로 그 속에 담긴 인물과 사건의 특수성을 없애고 익명적인 것으로 치환시켰다. 이는 화면을 통해 특정한 사건을 일차적으로 상기시키는 것을 불가하게 만드는 한편, 계속해서 화면을 바라보고 읽어냈을 때 새로운 이야기를 발견하거나 제목을 통해 상황을 유추하는 등 관객만의 주관적인 해석이 이입될 여지를 만든다.


양유연, 〈얼굴 1〉, 2011, 장지에 채색, 41x32cm © 양유연

이러한 작업을 전개해 나가며 양유연은 인간의 삶이 개인의 의지로만 움직이기보다 사회라는 환경에 민감하게 영향을 받는다고 인식했으며, 이는 자연스럽게 이 사회의 한 개인이기도 한 작가 자신에게 시선을 돌리게 만들었다.
 
이를 계기로 작가는 자신의 삶에서 직접 보고 느낀 것들을 화면에 다루기 시작했다. 특히 그는 가장 개인적인 감정이면서도 사회집단에 의해 보편적으로 유발되는 고독과 무력감을 화면 안에 극대화하여 표현해 왔다.


양유연, 〈그 때의 잔상〉, 2009, 장지에 분채, 145.5x112cm © 양유연

이러한 양유연의 작업은 ‘나’의 역사에 대한 인식으로부터 출발한다. 화면에 등장하는 다양한 인물들은 작가의 어린 시절에 대한 기억의 단편들로부터 파생되어 만들어졌다.
 
무채색의 메마른 공간에 부유하며 초현실적인 느낌을 자아내는 인물들은 뇌가 없거나 심장에 구멍이 나 있고 나체로 바닥에 엎드려 있는 등 온전하지 않은 상태로 묘사된다.
 
혹은 기다란 머리칼로 얼굴을 가리고 있거나 눈과 코에서 분비물이 쏟아지고 상처가 나 있는 불안정한 모습으로 그려진다. 이러한 인물들의 모습과 달리, 작품의 제목들은 ‘아무 이유도 없이,’ ‘그 때의 잔상,’ ‘귀가’와 같이 냉소적이고 무덤덤하게 제시된다.
 
이는 과거의 상처를 다양한 인물군상에 투사하여 자기 자신을 제3자의 입장에서 거리를 두고 바라보며 회고하고 현실을 수용하는 작가의 태도를 반영하기도 한다.


양유연, 〈어느 날〉, 2012, 장지에 채색, 162x162cm © 양유연

이러한 작업에서 양유연 작가 자신의 ‘내면’을 은유적으로 드러내 보였다면, 2012년 갤러리소소에서 열린 개인전 《한 낮에 꾸는 꿈》에서는 감정이 전이된 외부세계를 제시한다.
 
작가는 수십만 킬로미터 거리에 떨어져 있는 달을 마치 건물 옥상에서 손을 뻗으면 닿을 듯 커다랗게 과장하여 그려냈다. 밝고 아름다운 이미지의 ‘달’과 달리, 그의 화면 속 달의 이미지는 움푹 파이고 거무스름한 분화구들로 인해 생소하고 심지어는 공포심을 불러일으킨다.


양유연, 〈그 때〉, 2012, 장지에 채색, 100x80cm © 양유연

이러한 달의 분화구의 모습은 그 주변에 있는 낡고 허름해진 건물들과 비슷해 보인다. 일제시대에 지어져 오랜 세월 속에서 여러 역할을 수행했던 충정아파트를 포함한 재건축 아파트들은 금방이라도 무너질 듯하며, 여기저기 색이 바래고 벌레가 갉아먹은 듯 흉물스럽다.
 
양유연은 이처럼 오래된 낡은 건물, 구멍 난 바닥, 침잠된 벽면, 굴뚝에서 올라오는 검은 연기 등 길거리의 수없이 많은 흠집 투성이 풍경들을 응시하며, 자신의 내면 깊은 곳에 자리한 상처의 기억을 더듬었다.
 
퇴색된 건물의 외관과 허름한 내부 모습에로의 감정이입은 지극히 개인적인 ‘나’를 보편적인 대상으로 지각하려는 태도를 유지하며 시선을 ‘나’를 둘러싼 외부로 확장하려는 시도의 과정으로 읽힌다.


양유연, 〈쇼윈도우〉, 2015, 장지에 아크릴, 150x210cm © 양유연

이렇듯 양유연은 실제 풍경이나 인물, 신체 일부분, 상흔 등의 소재를 통해 자기 자신, 그리고 그를 포함한 현대인들의 기저에 깔려 있는 내밀한 감정을 상기시킨다.
 
나아가, 양유연은 2016년 갤러리 룩스에서 열린 개인전 《불신과 맹신》에서 ‘마네킹’과 같은 인위적인 대상에 ‘고독’이라는 감정과 유사한 우울, 분노의 정서를 투영하여 표현했다.


양유연, 〈명암〉, 2016, 장지에 아크릴, 100x148cm © 양유연

그의 화면에는 인간의 형상과 닮아 있는 마네킹의 몸 부분들, 경직된 얼굴들이 생경한 풍경에 작위적으로 등장하였다. 당시 작가는 사회적으로나 개인적으로 알고 있다고 생각한 대상을 향한 의심과 불확실함에 대한 고민을 가지고 있었다고 말한다.
 
이에 작가는 신뢰했던 대상이 불신의 대상으로 바뀌었을 때 느껴지는 당혹감과 배신감, 그리고 그 대상의 정체성에 대한 혼란이 불러오는 공포와 기이함을 마네킹이라는 인위적인 대상을 감정의 대리물로 삼아 이야기하고자 하였다.


양유연, 〈Stuck〉, 2016, 순지에 아크릴, 136.5x98cm © 양유연

김홍기 미술평론가는 이러한 양유연의 화면에서 “불신과 맹신이라는 신뢰의 과잉과 결핍이 서로 화학적으로 뒤섞여 균형을 이루는 데 실패한, 단지 물리적으로 뒤엉켜” 있는 오늘날의 불확실한 세계를 발견한다.
 
또한 양유연의 회화가 “극단의 아수라장을, 불확실성의 폐허를 집요하게 형상화”하며, “강요된 판단을 애써 중지시키고 피로사회의 불확실성을 그 자체로 응시하고 사유하게 만들려는 것”이라고 설명한다.


양유연, 〈빛나는 모든 것으로부터〉, 2019, 장지에 아크릴, 210x150cm © 양유연

이처럼 불분명한 대상에게서 느껴지는 불안과 두려움, 감각들에 대한 심의의 공허함에서 기인한 어두움의 정서를 그려왔던 양유연은, 개인전 《날이 밝을 것을 알고 있다》(아마도예술공간, 2022) 이후로 희미한 음영의 회화적 공간을 통해 자신의 내적 세계로 관객들을 초대하고자 했다.
 
물을 흡수하고 머금고 있는 장지의 성질과 오히려 칠하지 않았을 때 막 뒤로 머무르는 ‘어둠을 밝히는 존재’의 잔상으로 인해 작가의 시선 너머에는 단순한 시각적 관조가 아닌 촉각과 시각 사이의 긴장된 공간이 형성된다.


양유연, 〈그리드〉, 2022, 장지에 아크릴, 45x53cm © 양유연

한편, 2022년 챕터투에서 열린 개인전 《낯》에서는 ‘빛’이라는 요소를 독립적으로 드러내기보다 중심 이미지를 강조하거나 인위적으로 노출하고자 하는 수단으로 사용하였다.
 
이 전시에서 작가는 평소의 기록과 수집한 자료를 기반으로 자신의 주관적인 감정, 기억을 더하여 ‘낯익은 두려움’을 주제로 한 작업들을 소개했다.


양유연, 〈LAY〉, 2022, 장지에 아크릴, 53x45cm © 양유연

장지라는 동양적이고 전통적인 미디엄을 사용했음에도 그의 작업은 모션 캡처, 인공적인 라이팅 흔적 등 디지털 시대의 범용적 요소가 잘 스며들어 있다. 어떤 행동에 몰두하고 있는 대상의 순간이 인위적으로 포착된 것과 같은 효과는 그 대상과 그 대상이 마주친 상황, 그리고 감상자 간의 미묘한 불편함을 선사한다.
 
대상에 직접적으로 떨어지는 과도한 광량의 빛과 이를 애써 외면하거나 가리려고 하는 인물들의 모습 또한 드리워진 감정 선의 기묘한 복선으로 작용한다.


《낯》 전시 전경(챕터투, 2022) © 챕터투

한편, 옅은 물감을 반복적으로 덧칠한 화면은 재료가 가지고 있는 겹의 물성이 극대화되며 부분적으로 어두운 채도를 띄며 서늘한 분위기를 일으킨다. 이러한 시각적 효과는 대상 인물이 처한 상황과 그에 따른 감정의 표출이 즉각 돌출되지 않고 서서히 배어 나오도록 조절하며, 휘발성이 강한 감정의 일시적 표출이 아닌 익숙한 듯 불편한 감정이 조용히 도사리고 있는 듯한 느낌을 자아낸다.
 
그의 그림 속 인물들은 작가 자신이거나 주변의 인물들을 레퍼런스로 삼아 그려졌다. 그러나 작가는 특정한 개인의 특수성을 지우며 이들을 ‘익명’적인 존재들로 남김으로써, 인간 보편의 감정을 포착하고자 했다.


양유연, 〈없는 사람〉, 2026, 장지에 아크릴, 53x45.5cm © 두아르트 스퀘이라

이처럼 양유연은 빛과 어둠의 대비를 섬세하게 조절하고, 익명의 대상을 화면의 중심에 위치시킴으로써 현시대의 만연한 불안의 정서를 담아내 왔다. 또한 그의 화면 속 흐릿하게 번지고 스며든 인물과 사물은 특정한 서사를 드러내기보다 미약하지만 끊임없이 잔존하며 빛의 자리를 좇는 존재의 감각을 조용히 환기시킨다.
 
이러한 양유연의 회화는 보는 이로 하여금 오래도록 화면 내부를 응시하게 만든다. 한 겹 한 겹 물감을 쌓으며 내면의 감정과 감각을 축적한 화면을 바라보며, 관객은 그 안에 담긴 심리적 풍경을 각자만의 시선에서 유영하게 된다.

"한 사람의 삶이 자연스럽게 창작물에 반영되듯, 일상에서 바라보고 느끼는 모든 것을 그려나가고 있다." (양유연, 작가노트)


양유연 작가 © 양유연

양유연은 성신여자대학교에서 동양화를 전공하고 동대학원에서 석사 학위를 취득했다. 최근 개인전으로는 《복기》(두아르트 스퀘이라, 서울, 2026), 《Uncommon Sight》(스테판 프리드먼 갤러리, 런던, 2025), 《With Hands》(Bilndspot Gallery, 홍콩, 2024), 《그 사이에서 빛난 후》(프라이머리 프랙티스, 서울, 2023), 《낯》(챕터투, 서울, 2022) 등이 있다.
 
또한 작가는 《형상은 예외가 아닌 규칙》(하이트컬렉션, 서울, 2025), 《Nostalgics on Realities》(타데우스 로팍, 서울, 2024), 타이베이 비엔날레 2023 《Small World》(타이베이 시립미술관, 타이베이, 2023), 《어느 정도 예술 공동체: 부기우기 미술관》(울산시립미술관, 울산, 2023), 《Is It Morning for You Yet?》(카네기미술관, 피츠버그, 2022) 등 다수의 단체전에 참여했다.
 
양유연은 제58회 카네기 인터내셔널(2022) 참여 작가로 선정된 바 있으며, 한국문화예술위원회 ‘Korean Artists Today 2024’ 및 ‘종근당예술지상 2019’을 수상하였다.

Reference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