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ckerel Safranski, Two hyenas, 2023 © Mackerel Safranski

안녕하십니까. 

저는 나카무라 시게루(中村茂)라고 합니다. 보내주신 편지는 잘 받았습니다. 고모, (아니, 저도 그분을 이제 그녀라고 부르겠습니다) 그녀의 행방을 애타게 찾고 계신 가족 분들의 마음 잘 알고 있습니다. 제가 조금이라도 그녀를 찾는데 도움이 될지 모르겠지만, 그녀와 있었던 일에 대해 아는 대로 말씀 드리겠습니다.

저는 그녀를 도쿄 아사쿠사에 있는 한 지하 바에서 마지막으로 만났습니다. 그때는 사진에 찍힌 친구분들은 함께 있지 않았습니다. 아마도 증발(죠-하츠)을 준비하기 위해 혼자 일본으로 온 것 같았습니다. 그렇지만 그녀는 제게도 명확히 어디로 향할 것인지는 알려주지 않았습니다. 아니 알려 줄 수가 없었겠지요. 왜냐하면 그녀도 완전한 불확실성 속에 놓여 있었기 때문인데, 흥미로운 건 그런 불확실 자체를 그리 꺼리지 않는 것 같아 보였어요.

그녀는 충분한 모험을 할 몸과 맘의 준비가 되어있었습니다. 생각해 보세요. 증발이란 꼭 육체가 사라지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증발이란 곧 익명이 되는 것입니다. 도쿄라는 이 대도시에서 한국에서 흘러온 고등어가 스미다가와나 아라가와를, 아니 신주쿠나 시부야의 인파 속을 헤엄친다 한들 어느 누가 알 수 있겠습니까? 그녀는 이 곳이 한국에서의 못마땅한 증발 속도 따위 필요 없는 최적의 증발 도시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던 것이겠지요. 

저에게 그녀는 마음껏 낯선 지역을 헤매다가 붉은 숲 속 어딘가에 풀과 돌로 보금자리를 만들어 동물들과 각자의 심장을 내려놓고 잠시 누워 쉬기도 하고, 고속버스를 타고는 알지 못하는 도시로 조용히 잠입하여 자신도 알지 못하는 언어로 비밀스런 메시지를 곳곳에 남겨 무지개 속에 사람들이 모일 수 있게도 했다는 이야기를 들려주었습니다.

그녀는 공간에 들어가 자신의 이야기를 만들기 보다, 이야기가 공간을 만드는 일에 대해 말하면서 이를 "공간의 발생"이라고 하였습니다. 사람들이 모이고, 얘기를 나누고, 설화가 나타나고, 신앙이 형성되면서 발생되는 수많은 이야기의 공간 말입니다.

저는 그녀의 얘기를 들으면서 그녀가 자신의 상상과 관념 안에서 무한한 자유를 영위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그 일부를 이미지의 형태로 타인에게는 물론 자기 자신에게도 목격하게 만드는 것 같았습니다. 그녀의 아버님께서 "무언가 풀리지 않은 감각이 가슴 속 깊이 있었던 것 같다"고 말씀하셨던 것도, 자신의 내부에서 솟아오르는 감각의 힘들을 모조리 가시화할 수는 없는 답답함이 아니었을까 생각합니다. 


Mackerel Safranski, Body Image 8, 2019 © Mackerel Safranski

그녀는 이내 주위를 살피더니 비밀스럽게 자신의 그림을 보여주었습니다. 저는 그녀가 그린 그림을 보는 내내, 이미지를 만들어내는 일은 참 어렵고도 즐거운 일 같았습니다. 그건 자신의 삶이 지닌 흥미진진한 기대와 속절없는 절망이 교차하는 일이고, 완벽히 붙잡을 수 없는 어떤 상태를 기어이 이미지로 만들었을 때에도, 금새 다른 무엇인가가 또 다른 감각의 상태를 재촉하는 일이었습니다.

그녀의 그림은 마치 과거 서구의 중세 미술이 강력한 종교적 텍스트를 담담하게 옮겨 놓았듯이, 혹은 모줄임 천정이 높은 저 옛날 석묘 안에 그려진 신비한 이계의 삶과 같이, 이미지의 감각을 탄생시킨 태초의 진동을 품고 있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이 진동은 외부 세계와 자아 내부 모두를 탐구하고, 시공의 현상과 순간들에 강하게 추동 되어 모노크롬의 그림 뿐 아니라, 강렬한 색채의 캔버스 위와 무빙 이미지의 생동 안에서도 존재했습니다. 그녀는 증발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점점 커져서 투명하게 번지고 있었던 겁니다. 

그녀는 자신의 이야기가 발생시킨 공간에 사람들이 모여 각자의 종교를 발견하기를 바랐습니다. 그래서 빛을 만든다더군요. 다섯 번 정도 깜박거리며 빛이 왔다 갔다 할 때, 빛이 공간이 된다고 하면서요. 그 빛의 공간은 천사도, 철새도 이끌려 오는 눈부신 공간이라고 했어요. 하여 그 공간은 어딘가로 끝없이 이동하더라도 결코 사라지지 않고, 늘 빛과 함께 있는 공간이 될 것 같았지요.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이야기를 나누다가 주위를 둘러보니 바에는 우리 밖에 남지 않았더군요. 이 공간에 함께 있던 사람들이 어느새 '죠-하츠' 된 것처럼요. 주인 밖에 없는 바에서 우리는 마지막으로 하루키 소설에 자주 등장하는 보드카 토닉을 한잔 씩 주문했습니다. 하루키를 좋아하는 그녀가 찾아 갔다는 신주쿠 바 보다 아마 더 맛있을 거라고 제가 말했지요.

그 순간 저는 어릴 때 읽은 하루키의 단편 하나가 생각났습니다. 동물원의 아주 늙은 코끼리와 늙은 사육사에 관한 이야기였죠. 평생을 함께 한 코끼리와 사육사는 어느 날 함께 감쪽같이 사라지지요. 저는 그 코끼리와 사육사는 우리 앞에서 사라졌을 뿐 분명 존재하고 있을 거라고 말했고, 그녀도 동의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그날 이후, 저는 그녀를 다시 보시 못했고, 그녀가 지금 어디에 있는지도 알지 못합니다. 그렇지만 머지않아 우리들 앞에 나타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참, 우리가 캄캄한 센쇼지 건너편 어두운 상가 거리에서 헤어질 때였습니다. 제가 일본 어디를 가더라도 너무 깊은 숲은 무서우니 들어가지 말라고 당부했더니, 그녀가 웃으며 말하더군요.

숲이라면 걱정말라고, 자신에게 한때 세계는 숲과 같았다고. 공유될 수 없는 내밀한 장소이자, 무언가를 겪어내는 공간이 바로 자신만이 아는 숲이라고요.[2] 그녀는 아직 숲에 있을까요? 지금쯤 그녀는 하루키 단편에 나온 그 코끼리를 타고 유유히 그런 숲을 유영하고 있을까요? 그러다가 숲에서 나오는 날이, 아마 우리에게 다시 돌아오는 날일지도 모르겠습니다.  

도쿄에서 
나카무라 시게루 드림


[1] 이 글은 고등어 작가가 2023년 금천 오픈 스튜디오의 전시에 발표한 〈frame to frame〉 작업 중 일부인 나카무라 씨에게 보낸 편지에서 착안하여 그에 대한 답장의 형식으로 쓴 것이다.
[2] "제 그림에는 숲에서 벌어지는 상황이 많이 나옵니다. (...) 세계를 숲으로 생각하기도 했습니다. 제가 숲에 있는 사람을 그리는 것도 제 세계관 자체가 사람은 어떤 시스템 안에 높여 있다는 걸 인지하는 데서 오는 것 같습니다. (...) 어떻게 보면 공유될 수 없는 것을 풀어놓을 수 있는 내밀한 장소이자, 무언가를 겪어내는 공간이고, 또 외부의 강요가 덜한 곳인 거죠. 그런 장소가 모두가 공유하는 곳이 아니라 본인만 아는 숲이라고 생각을 했습니다." (고등어 인터뷰 중에서, 「색이 지워지는 사람들, 다른 세계로 이동하는 사람들」, 『보더리스 스토리텔러』, 전주국제영화제, 2022, p. 49)

Reference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