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 있는 사람》 전시전경 © 아라리오갤러리

어둠에 눈이 적응하기 전에 청명한 방울 소리가 먼저 귓가를 울린다. 방울은 예부터 멀리 떠난 누군가를, 불러도 부르지 못하는 존재를 다시 불러오는 도구다. “부르는 목소리는 들리는데/내 목소리는 미치지 못하는/다만 여기는/열매가 떨어지면/툭하는 소리가 들리는 세상”(박목월, 「하관」)이라는 시구절처럼, 어떤 세상은 동시에 존재하지만 만날 수 없도록 분리되어 있다. 서로의 소리를 듣지 못한다. 방울을 흔들면 울려 퍼지는 맑은 소리는 닫힌 결계를 열어낸다. 그러니까, 방울 소리는 저승과 이승을 잇는 소리라고 했다.

소리가 불러낸 것들을 바라본다. 나란히 선 흑백의 존재들, 그들도 언젠가는 색깔을 가지고 있었을 테다. 움직이지 못하는 바위처럼 우뚝 선 그들 사이로 향이 피어오르고 이내 연기가 가득 찬다. 허공을 부유하는 상징들, 여전히 움직이지 않는 존재들, 계속해서 들려오는 방울 소리, 화면 속 세계와 전시장의 어둠이 자연스레 섞여들 때 즈음, 이곳이 이승과 저승의 중간 어디 즈음이라는 사실을 깨닫는다.

이승애의 애니메이션 ‘서 있는 사람’ 시리즈(2023)는 망자의 안녕을 비는 씻김굿을 모티프로 제의에 가까운 이미지를 선보임으로써 상실과 부재의 감각을 환기시킨다. 씻김굿은 망자가 생전 풀지 못한 원한을 씻어내 주면서 편안하게 다음 세계로 가길 기원하는 진도 지역의 전통굿이다.

‘씻김’이라는 말을 생각해 본다. 아기가 태어나면 목욕을 시키고, 사람이 떠날 때에는 염습을 한다. 천주교에서는 세례를 할 때 아기의 이마에 성수를 뿌리고, 이슬람 사원에 들어갈 때에는 손발을 깨끗이 씻어야 한다. 어딘가를 넘나들 때마다 우리는 몸을 씻는다. 다른 세계의 문턱을 넘으려면 몸을 정갈히 해야 하기 때문이다. 씻김굿은 저쪽 세계로의 문턱을 넘기 위한 일종의 통과의례다.

작가는 애니메이션을 커다란 화면의 프로젝션 매핑으로 보여주며 하나의 실감이 나는 공간을 관객에게 제시하지만, 씻김굿의 장면을 현실적으로 묘사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나무나 돌, 흙 등에 종이를 대고 흑연으로 문질러 얻은 이미지들을 오려내어 추상적이고 모호한 재료를 만든다. 마치 씻김굿에서 옷가지 등으로 망자를 상징하는 신체를 만들어 의례를 진행하는 것처럼 잘라낸 종잇조각들로 사람과 비슷한 형상을 구현한다.

티베트 장례의식에서 모티프를 얻은 마리나 아브라모비치의 작품 〈거울 청소〉(1995)는 해골을 구석구석 닦아내는 퍼포먼스를 선보인다. 생전의 나쁜 기억과 원한을 모두 씻어주며 다음 생의 복을 빌어 주는 행위다. 뼛조각이 점차 깨끗해지면서 동시에 원래 해골에 묻었던 먼지가 작가의 신체를 뒤덮는다. 서로 문지르고 문질러지면서 죽은 자와 산 자가 뒤섞이고 이곳과 저곳의 경계가 흐려진다.

이처럼 씻어내고 닦아주는 행위는 몸을 맞대는 일이다. 서로 만지고 만져지며 온기를 더하고 에너지를 전달한다. 물체와 종이, 종이와 흑연, 흑연과 작가의 손이 서로 문지르고 문질러지는 과정 역시 어떤 존재를 어루만지며 씻어내는 행위와 닮았다. 또한 만지는 것은 존재의 반대편에 그것을 새기는 행위다. 이대로 그냥 보낼 수는 없어 어루만지며 새기고 서로가 서로에게 마찰하는 동안 그 사이에는 열기가 더해진다. 경계가 흐려지는 틈에서 뜨거운 애도가 피어오른다.


《서 있는 사람》 전시전경 © 아라리오갤러리

부재와 상실에 대한 애도는 사람에 대한 것이기도 하지만, 때로는 사라질 장소에 바치는 것이기도 하다. 작가는 콜라주 드로잉과 애니메이션으로 구성된 ‘디스턴스 룸’ 시리즈(2021~2022)에서 사라져버린 공간을 담는다. 팬데믹 시기에 런던에 있던 작가의 작업실과 짐을 다른 사람을 통해 정리한 경험을 토대로 만든 이 작품들은 마치 서로의 소리가 들리지 않는 이승과 저승처럼 동시에 존재하지만 서로 닿을 수 없는 세계를 그린다.

물리적 공간은 동일하더라도 그곳에 무엇이 채워졌느냐에 따라 전혀 다른 장소가 된다. 작가가 한때 생활하며 곳곳에 흔적을 남겼던 공간은 짐을 정리하고 문을 닫은 뒤 열쇠를 건네주면 이제 다시 존재하지 않는다. 언젠가는 분명 존재했지만 이제는 사라질, 누군가의 기억 속에만 남아 있을 공간이 된다. 마치 떠난 사람들의 세계처럼 이 또한 닿을 수 없는 세계다.

서로의 경계를 넘나드는 〈서 있는 사람〉과 〈서 있는 사람 II〉, 영상 속 장면과 물성이 있는 콜라주 드로잉 작품을 넘나들며 하나의 연결된 세계관을 이루는 ‘디스턴스 룸’ 시리즈는 관객을 계속해서 이곳도 저곳도 아닌 중간지대에 세운다. 또한 반복 재생되는 영상은 끝을 처음과 이어 붙이며 순환의 고리를 드러낸다.

작가가 위무의 도구를 상징하는 조각들을 이어 붙여 세워낸 형상은 제자리에 우뚝 선 존재들에게 건너가 방울 소리와 함께 애도의 리듬을 건넨다. 〈서 있는 사람 I〉과 〈서 있는 사람 II〉가 섞여드는 사이에 세워낸 사람의 형상은 차츰 무너져 내리고, 이내 불타며 사그라든다. 움직이지 않을 것처럼 제자리에 우뚝 선 존재들도 언제 그랬냐는 듯 흘러가며 사라진다. 모든 것이 무의 상태로 돌아간다. 그러나 완전한 무는 아니다. 머지않아 돌아올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잘 떠나보내는 것은 잘 탄생시키는 행위와도 같다. 씻어내고 닦아주며 먼길 떠날 채비를 돕는 것은 언젠가 새롭게 다시 태어나길, 다른 모양이 되어서라도 돌아오길 기원하기 때문이다. 사라진다고 사라지는 게 아니며, 우리는 돌고 돌아 다시 제자리에 온다. 떠나는 길을 막을 수는 없으므로, 다만 잘 돌아올 수 있도록 얼굴을 씻고 살갗을 어루만진다. 망자가 가는 길을 살뜰하게 닦아낸다. 씻김굿의 후반부에 등장하는 ‘길닦음’의 모양이다.

정성스레 닦아놓은 길을 따라 우뚝 선 존재들은 이제 목소리가 미치지 못하는 세상으로 간다. 우리는 여전히 경계에서 부재의 대상을 그리워하며, 그들의 몸짓과 목소리를 새기기 위해 살갗을 맞대고, 아직 피어오르는 열기에 기댄다. 저곳과 이곳을 잇는 소리가 천천히 잦아들고 방울 소리마저 사라진다. 인사를 마쳐야 할 시간이다. 하나씩 바닥으로 떨어진다. 툭, 하는 소리가 들린다. 이 소리는 이제 저쪽에는 들리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곧 돌아올 것이다. 서 있는 사람들은 이쪽에서 저쪽으로 사라지지만 어딘가에서 다시 태어날 것이고 우리 역시 어느새 행렬의 뒤를 따라야 한다. 또한 누군가는 우리의 뒤를 따를 것이며, 다시 태어난 누군가 역시 먼 훗날 행렬의 뒤에 서게 될 테다. 이쪽과 저쪽의 세계를 관통하며 지배하는 순환의 구조 속에서 죽음과 탄생은 대구를 이루며 영원히 반복 재생된다. 다만 상실은 매번 아프고 그리움은 언제나 새롭다. 애도의 행위 역시 반복되어야 하는 이유다.

Reference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