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가 이승애는 가장 ‘약한’ 도구(연필)를 들고 세상과 대결을 벌인다. 연필로 세상에 횡행하는 슬픔 유발자들에 맞서기 위해서 화가 이승애는 몬스터들을 그린다. 낯선 모습이지만, 이 몬스터들은 ‘슬픔에 대처하기’라는 참으로 고전적인 기능을 가지고 있다. 이 전대미문의 몬스터들은 이성과 중력의 법칙이 닿지 않는 슬픔의 치외법권(인간의 몸속 세포 안 고통지역)에 살면서, 슬픔과 싸움을 하는 선한 존재이다.

그녀가 그린 몬스터들의 모습에서는 식물과 동물이 결합하고 있으며, 사회와 개인의 내면의 공간이 교차하면서 쌓여 나간다. 연필은 흰 종이 위를 종횡무진 달리다 멈추며, 한없는 부드러움으로 잦아들다가 강철처럼 튕겨져 나오기도 하면서 몬스터들의 힘을 표현한다. 가장 약한 도구와 세상의 슬픔에 유난히 예민했던 한 예술가가 만나서 펼치는 몬스터의 이야기가 시작된다.


이승애 작가 © 이승애

낙원에는 모든 것이 풍요롭고 행복으로 가득 차 있을 것이라고 사람들은 상상한다. 생로병사의 고통에서 벗어나 모두가 조화로운 삶을 사는 그곳에서 반드시 실업자가 되는 사람들이 있으니, 의사, 장의사, 경찰, 판검사, 정치인, 그리고 예술가이다. 이 리스트에 예술가가 낀 것이 의외라고?

이유는 간단하다. 낙원에서는 더 이상 아름다울 필요 없이 모든 것이 아름답고 조화로우며, 모두가 더 이상 행복할 필요 없이 지극히 행복하기 때문이다. 예술에 해당할 만한 것이 있다면 여흥을 위한 놀이 정도가 아닐까? 음악, 미술, 문학, 영화가 없는 낙원이 도저히 무료할 것 같기만 하다고? 그렇다면, 낙원보다는 지옥을 닮은 지금, 이곳의 삶을 견디는 것이 옳다.

예술은 “눈물 없는 울음”이라고 아도르노는 말했다. 그에 따르면 예술은 “(사회의) 비화해적인 것을 증언함으로써 사회와 화해를 제시하는 역설, 이 역설을 통해 현실에서 불가능한 ‘화해’를 제시하려고” 한다. 물론 10만 권의 소설이, 100만 장의 그림이, 1000만 개의 노래가 세상의 분쟁을 직접 해결할 수는 없다.

그러나 이 ‘불가능한 화해를 제시’하려는 이 무기력한 구원 행위가 바로 예술의 존재의 의의가 되는 것이다. 역설적으로 예술의 존재 근거는 비화해적인 것으로 가득 찬 슬픈 세상이다.

세상의 슬픔에 대처하고자 화가 이승애는 몬스터를 그린다. 그녀의 그림은 슬픔에 관한 것이 아니고, 슬픔에 대처하는 그림이다.

“나는 약자이다. 절대적인 힘, 감당할 수 없는 힘들이 세상에 있지만, 내가 도와줄 수도 없고, 바꿀 수도 없다. 큰 힘은 없지만, 내가 세상에 대해서 이야기할 수 있는 것은 있다.”


이승애, 〈Brothers of Moon (Fear series II)〉, 2008, 종이보드에 연필, 210 x 170 cm © 이승애

그림은 그녀가 펼쳐 보이는 슬픔과 상처에 대한 항전기이다. 그녀가 그리는 몬스터들은 인간의 슬픔과 상처에 대항하고 치유하는 전사들이다. 이 몬스터들은 방어, 생산, 치유, 전환, 소통을 주요 임무와 파생 임무로 나누어 전담한다.


이승애 작가 © 이승애

‘훤’이라는 몬스터는 그림 의 주인공인데 방어(Defense)이다. 감당할 수 없는 ‘마음의 손상’은 검은 가시가 되어 우리의 영혼에 단단히 박힌다. 훤은 이런 영혼 속에 박혀 있는 검은 가시와 싸움을 벌인다. 상처로 인한 트라우마가 우리를 괴롭히지 않도록, 그것이 ‘좋은 꿈’이 될 수 있도록 훤은 지치지 않는 싸움을 벌인다. 그의 파생 임무는 전환(Transformation)이다. 우리가 받은 상처를 오히려 삶을 견디는 에너지로 전환시키는 임무도 그는 함께 가지고 있는 것이다.

몬스터들은 낯선 존재들이다. 낯선 이유는 그것들이 우리의 가시적인 세계에는 존재하지 않는 것들이기 때문이다. 치유의 기능을 가진 〈달의 형제들〉은 4개의 양의 머리와 화려한 공작새의 깃털과 편형동물 같은 꼬리를 함께 가지고 있다. 비교적 알아볼 수 있을 것 같은 〈그린 아이(Green Eyes)〉는 4개의 눈을 가진 표범을 기본 형태로 하지만 입 주변에는 종류를 알 수 없는 편형동물과 고사리 같은 것이 자라 나오고 있다.

한 번도 본 적 없는 이 괴물들은 동물과 식물이 공생하는 모습을 하고 있기도 하다. 어려서 식물도감과 동물도감을 유심히 보아 온 것이 그림 속에서 자유롭게 결합해서 새로운 존재가 되고 있는 것이다.

두렵고 낯선 감정들이 구체화되어 이야기의 옷을 입은것이 몬스터들이다.

그러나 이승애의 몬스터들은 낯설지만 두렵거나 끔찍하다는 느낌을 주지는 않는다. 치유의 임무를 맡은 〈그린 아이(Green Eyes)〉의 날카로워야 할 발톱은 한없이 부드러운 털로 이루어져 있다. 그린 아이는 극에 달한 상처를 준 대상에 복수를 해 주는데 이 복수는 ‘응징’만이 아니라 ‘관용’의 요소도 포함하고 있다.


이승애, 〈Enemy at the Gate (Fear series I)〉, 2008, 종이보드에 연필, 210 x 170 cm © 이승애

용을 닮은 〈Mother〉는 수많은 어린 것들을 위해서 제 몸을 내주고 있다. 이승애가 그린 몬스터들의 생리는 철저히 이타적이다. 그들은 “자기의 섭식을 위해 다른 생명을 해하지 않고, 조화를 이루는 것이 이들 세계의 절대적 법칙임을 확인”해 주는 존재들이다. 정작 우리가 두려워해야 하는 것은 이승애의 몬스터가 아니라 이 몬스터들을 태어나게 만든 세상의 불의인 것이다.


이승애, 〈Green Eyes (Revenge series I)〉, 2008, 종이보드에 연필, 220 x 225 cm © 이승애

이승애의 세상은 연필과 종이로만 이루어져 있다

“나는 연필의 약함이 좋다. 난 연필의 냄새도 좋고, 화려하고 세 보이지 않는 그 느낌이 좋다. 연필은 나와같은 약자이다. 둘이 힘을 합하면, 작업실에서 모여 큰 힘을 얻게 되지 않을까?”

전지 4장을 이어서 그린 큰 그림 역시 연필로만 그린 것이다. 회화의 체계에서 연필은 가장 기초적인 밑그림을 담당하는 존재로 유화나 수채화 등 재료들에 의해 덮이고 눈앞에서 그 흔적이 사라지기도 한다.

그러나 이승애가 그린 그림 속에서 연필은 ‘약자’가 아니다. 그것은 무한한 표현의 가능성을 가진 존재이다. 때로는 한없이 부드럽고 섬세하고 흐려지다가도 강철처럼 강한 힘으로 튕겨져 나오기도 한다. 그녀의 상상력이 무한하듯이 연필의 힘도 무한하다.


이승애, 〈Nice Dream (Victory series I)〉, 2008, 종이보드에 연필, 255 x 105 cm © 이승애

“불의에 대항해서 외치는 사람들은 희망의 한 가닥을 잡고 있는 것이 아닐까? 부드럽게 넘어가는 것은 체념에서 나오는 것은 아닐까? 그 날카로움을 잃지 않는 게 작가에게 가장 중요한 자세가 아닌가 한다. 나 또한 그렇게 하고 싶다.”

여리디여린 소녀 같은 그녀가 나직한 목소리로 말한다. 이승애는 가장 ‘약한’ 도구(연필)를 들고 세상과 대적한다. 그러나 세상에 슬픔에 대적하는 몬스터를 그려 내는 한 그녀는 약하지 않다. 깊어지면 슬픔도 힘이 된다.

Reference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