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jun Lee, Dream in Dream, 2022 © Sejun Lee

# 관찰 1.

외형상 꽤 다른 두 작가가 있다. 공통점이라면 이들이 화가라는 것 정도뿐, 여러 측면에서 작업의 공통분모를 찾기가 쉽지 않다. 주제적 측면에서도, 회화적 언어로서도 서로 매우 다른 곳을 바라보고 서있는 작업을 하고 있다. 이세준 작가의 경우 그가 그리는 화면은 프레임의 내부를 향한다. 다시 말하면 이세준 작가는 프레임 내부에 모종의 세계를 가설한다. 그가 긋는 붓터치 하나하나는 각자의 존재감을 분명히 하며, 개별의 개체로 캔버스 내부의 세계를 구성한다.

모든 스트로크, 더 나아가 이미지는 물감이라는 물질의 최소 단위로서의 의미에서 시작하여, 각자의 분명한 자리를 차지한 채 병렬로 나열되어 있다. 이를테면 화면 위 새나 나무, 인형 등의 이미지는 물감이라는 물질이 취하는 형상의 변주인 동시에, 붓질의 발현이며, 종국엔 우리가 알고 있는 관념으로부터 거리를 둔 채 모종의 해석적 가능성으로 풍성한 이미지의 외피를 두른 무엇이다.

그렇게 물감에서 비롯된 하나의 몸짓 – 스트로크에서 이미지까지 – 은 주변의 또 다른 몸짓을 파생한다. 심지어 한 화면에 존재하는 매우 넓은 색의 스펙트럼(이세준은 여타의 회화에서 쉽게 보기 어려운 매우 밝은 형광색이나 원색, 검은색 등을 자신만의 논리 안에서 구성적으로 사용한다)은 화면 위 대상들이 차지한 위치와 존재감을 더욱 두각 시킴으로 작가가 얘기하는 프레임속 세계에 깊이와 차원을 배가하고, 분열증적으로 확산된 시각성 속에서 모종의 서사가 충동하기 시작한다. 

반면, 정현두 작가의 작업은 프레임의 바깥을 향한다. 우선은 개별 화면에서 구체적 이미지나 명료한 서사를 전달하지 않는 그의 회화는 이세준 과는 다르게 물감을 바르고, 다시 덮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감각적 순간의 포착이다. 이러한 감각은 곧 공간적 차원으로 확장하곤 하는데, 즉 개별 프레임 너머 바깥에 존재하는 또 다른 프레임 속 이미지와 연동하며 서사 는 확장하고, 그렇게 공간적 차원에서 연쇄하는 감각은 마주하는 관객의 감각으로 확장, 전이되는 식이다.

마치 물감이라는 물질을 뒤섞고, 지우고, 새롭게 구축하는 과정에서 (이세준과는 다르게) 행위의 개별적 의미를 감추고 스스로 명료하게 말하기를 꺼리는 그의 화법은 마치 언어로 정의할 수 없기에 열린 구조 속에서 보기가 이끄는 감각의 진실로 향하게 된다. 그가 보고, 듣고, 경험하고, 상상했던 순간은 명징한 언어의 체계 반대편에 선 감각과 정서의 체계로 번역되고, 두껍게 쌓아 올린 물감의 레이어가 선사하는 밀도와 채도, 그리고 붓질이 지닌 운동성은 사각의 프레임 바깥 더 멀리 모종의 시공을 열어젖힌다.  

이렇듯 외형상 다른 작업에 더해 각 작가의 회화적 태도까지 언급해 보자면, 한 명은 다분 히도 논리적(이세준)이며, 반대로 또 다른 한 명은 매우 직관적(정현두)이다. 붓의 방향이나 스트로크의 길이, 물감의 색과 농도 등에 대해 ‘왜’와 ‘어떻게’를 앞세우는 이세준에 비해, 정현두는 외부 세계에 대한 자신의 정서적 반응을 작가 고유의 감각과 즉흥적 움직임을 동원해 물감의 색과 발림이 만들어낸 충돌과 조화의 상황, 혹은 상태로 펼쳐내 보인다.

개별적인 붓질과 이미지의 자리를 온전히 지키며 화면을 구성하는 이세준의 회화는 고유의 논리 안에서 구상과 추상을 가로지르는 모종의 세계-프레임 내부를 두드리지만, 물감이 겹치고 더해지며 일어나는 중첩의 결과로서 존재하는 정현두의 회화는 온전한 감각에 기대어 추상적 심상을 환기하며 프레임 바깥의 공간과 연쇄한다. 


# 관찰 2.

〈이것은 나(너)의 그림이다(아니다)〉는 변증법적 회화, 즉 정반합의 법칙 아래 서로의 작업에 질문하고, 그로부터 어떤 배움을 얻고자 하는 데 의미가 있다. 이세준 작가의 아이디어로부터 시작한 본 전시는 펜팔과 같은 방식을 취한다. 즉, 편지를 주고받듯 화가로서 서로의 붓질을 나누는 행위, ‘Brush-pal’이라고 명명한 이들의 실험은 서로 다른 각자의 회화적 방법론을 보다 내밀한 차원, 즉 자신의 창작 방법론으로 수용하고, 피드백을 적극적 교환함으로 회화라는 드넓은 지평 위에서 혼자서는 상상하지 못할 미지의 영역을 탐색하려는 시도이다.

서로의 특정 그림을 참조하여 ‘모사’라는 형식을 취하기에 이는 결과로서의 이미지를 구축하는 각자의 회화론, 그 창작의 과정에 주목하는 일과 같다. 기존의 협업 체제와 같이 과정 중심적 공동 창작의 과정을 수반하는 것은 아니지만, 작업의 결과에 선행하는 태도와 실천의 양상들, 이를테면 사용하는 물감 컬러 차트나 붓질의 차이 등 개인만의 회화적 양식이라 할법한 메커니즘에 대한 연구는 기존의 자신이 만들어내던 이미지로부터 거리를 둔 채 오히려 그 내재적 ‘과정’을 곧 창작의 오브제로 치환하게 만든다. 

서로 다른 둘인 만큼 이러한 시도는 ‘전환’의 순간을 확보하게 한다. 여기서 ‘전환’이란 자율적이면서도 동시에 타율적인 발전의 논리를 제안하는데 유용한 개념이다. 다르게는 변화의 과정이라고도 할 수 있는 전환은, 내재적이거나 외재적이며, 또는 종종 두 개의 양상을 모두 포함하곤 한다. 즉 고정된 조건이나 정체된 상태를 내파하기 위한 차원에서 전환은 유효하다. 결국, 이러한 교환의 방법론은 내재적이면서도 외재적인 요인 사이에서 순응과 불응, 타협과 부정이라는 필연적인 요인들을 마주하고 수용하는 역동적인 실험이라 할 수 있겠다. 

자신의 작업에서 당연하게 받아들였던 형식적/ 독자적 언어는 일종의 한계로 작용한다. 유연한 태도는 필수적이며, 기존에 달성한 회화적 성취는 자신에게 당면한 현재의 과제가 되며, 타인의 작업을 모사하는 과정에서 자신의 작업을 진단해야만 하는 상황에 처한다. 그렇게 점진적 발전의 과정을 위해 타인의 방법론을 기꺼이 수용하고, 자연스럽게 발현되는 자신의 회화적 방법론과 충돌하는 타인의 양식을 기꺼이 인정해야만 한다.

서로의 작업을 참조하며 상대의 회화적 언어를 세심하게 뜯어보고 심문하는 이 실험은 오히려 자신의 작업에 이제껏 경험하지 못한 시선의 거리를 가능케 하며, 현재까지 세운 자신만의 회화적 조건과 규칙에 반문하게 한다.

실제로 정현두의 이세준에 대한 모사가 화면 안에서 존재하던 이미지와 물질들을 오히려 견고한듯 보이던 프레임에 전에 없던 진동을 더하는 존재로 전환하듯, 혹은 이세준의 모사가 정현두의 프레임 밖 또 다른 프레임으로 연동되던 감각을 사각의 단일한 평면 내부로 질선 정연하게 자리 잡게 하듯, 이 모사의 과정은 어쩔 수 없이 기존에 자신이 세운 규칙에 반하는 질문들을 양산하게 된다.


# 관찰 3.

모든 작업이 그렇겠지만, 특히 회화라는 장르는 작가 개인의 시선에 한정되는 경향이 두드러진다. 대상을 재현하기 위해, 그리고 그 재현 너머에 가닿기 위해 온전히 일인칭 시점에서 캔버스를 마주하는 일이기에 그렇다. 그리고 그러한 모든 시점에는 시선의 주체로서의 욕망이 존재한다. 그것은 개인이 구축한 관점 아래 어떤 지점을 향한다. 회화라는 같은 멍에를 짊어진 이들에게도 마찬가지이다. 보편으로서의 소실점은 사라지고, 각자 개인이 상상 하는 서로 다른 소실점으로 수렴한다.

하지만, 이세준, 정현두는 각자의 것을 탐닉하는 과정을 선행함으로 기꺼이 기존의 시점에서 거리를 두길 자처한다. 그렇게 두 작가를 제외한 타인들이 이들이 모사한 그림이 누구의 것인지 식별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게 되었다.

하지만, 흥미로운 것은 이 둘은 서로가 따라 그린 모작이 원래 각자의 작업과는 너무도 다르다고 말한다. 사실 여기서부터 관찰자의 시점이 더 깊이 틈입할 희박해지기 사라진다. 생산된 이미지를 독해의 대상으로 여기는 큐레이터에게 결과 이전의 행위 자체는 어쩌면 신비스러운 비밀의 영역이기 때문일 것이다. 회화와 관련된 여러 물질과 도구들을 구축된 이미지의 의미를 뒷받침하는 근거로 제시할 수는 있지만, 창작자로서 그것과 관계 맺는 방식에까지 진입하기에는 ‘그리기’ 그 자체에 대한 이해가 모자라기 때문일 것이다.

이는 어쩌면 오래도록 아카데믹한 학습을 받고, 고독한 수련을 거듭한 창작자들에게만 허락된 영역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렇게 ‘관찰’이라는 이름을 빌미로 또 다른 욕망의 시점을 취하려던 나의 시선은 어느 단계에서 불허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단언할 수 있는 것은 이 실험이 꽤 흥미로운 이미지를 만들어냈다는 것이다.

회화의 화면을 피부라 일컫는다면, 그 피부 표면 위를 부유하는 모종의 존재들과 그들로 구축된 세계(이세준)와 피부의 표층 아래에서 언어로 잡히지 않는 시공간의 감각이 생동하는 화면(정현두)이 교차하는 이 모종의 영역, 즉 서로를 모사함으로 취득한 이 화면들은 그저 상대를 흉내내는 데 그치지 않는다.

이세준 작가는 자신의 작업을 피부 표면, 정현두 작가의 작업을 피부 아래의 것을 그리는 것 같다고 표현하였다. 오히려 지금까지 쌓아 올린 각자의 회화적 언어의 규칙과 조건에 저항하고 반문하는 과정에서 오히려 고유의 회화적 태도와 언어를 더없이 맑게 비추어내고 있다.

글. 김성우 (독립큐레이터)

Reference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