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진한(b. 1982)은 서울과 런던을 기반으로 활동하며 타국에서 경험한 언어적 소외감과 사랑하는 연인과의 이별, 체온을 통해 전달되는 친밀함 등 언어로 표현하기 어려운 사고와 감정을 특유의 추상과 구상을 넘나드는 생동감 있는 회화로 표현해 왔다.


이진한, 〈Yesterday and Today Meet〉, 2026, 린넨에 유채, 91x117cm © 갤러리현대

이진한의 작업 활동은 2007년 런던으로 이주하면서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당시의 작업에서는 사랑하는 이들과 떨어 짐으로부터 오는 외로움과 슬픔이라는 감정과 언어적인 소외감이 주된 원동력이 되었다.
 
15년간의 영국 생활을 마무리하고 귀국한 후 현재까지 그는 개인과 언어, 문화, 각 작품 사이의 간극으로부터 회화만이 전달할 수 있는 ‘번역 불가능한’ 순간을 화면에 포착하고 있다.


이진한, 〈풍경과 함께 스파이더맨#3.3〉, 2011, 린넨에 아크릴, 유채 , 227x182cm © 이진한

이진한의 작업 여정은 전통 회화의 핵심 원리인 소실점을 중심으로 공간을 구축하는 르네상스적 화면에서 출발한다. 이후 2010년을 전후로 전통 회화의 원근법과 모더니즘 회화의 평면성이 하나의 화면 안에서 공존하는 이질적인 회화 공간으로 확장되었다.
 
예를 들어, 2012년 대안공간 루프에에서 열린 개인전 《관찰자의 포스트 모더니즘, 개념의 풍경화》는 과거 르네상스의 원근법과 모더니즘 추상회화의 속성이 공존하는 작품들로 이루어져 있었다.


이진한, 〈풍경에 없는 슈퍼마리오〉, 2011, 캔버스에 글리터, 유채, 아크릴, 과슈, 250x200cm © 이진한

당시 작가는 레이어 사이의 불편하고 상이한 관계를 연구하는 데 초점을 맞췄다. 여기서 레이어 사이의 마찰과 충돌은 동일성으로 규명된 공간(캔버스)과 시간(현재) 위에 이질적인 것들을 공존케 하는 데서 발생한다.
 
따라서 그의 작업에서 이질적인 공간인 하나의 레이어와 또 다른 레이어가, 그리고 이질적인 시간인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가 수평적인 관계 속에 공존하고 있는 광경을 발견할 수 있다. 또한 그의 작업에서는 의도적으로 이질적인 것들을 생성하고 화해시키는 장치들이 곳곳에 부착되어 있다.


이진한, 〈초현실주의자〉, 2011, 캔버스에 오일, 아크릴, 과슈, 글리터, 마스킹 테이프, 250x200cm © 이진한

이를테면, 배경 위에 마스킹 테이프를 부착한 채 그 위에 덧칠을 하고, 기존의 테이프를 제거하면서 배경이 바깥으로 드러나 다른 형상들과 공존하게 되는 것이라든지, 과거 초현실주의자들이 사용하던 드리핑 기법 등의 자동기술법을 폭넓게 활용하면서, 평면 위에 물감의 부피만큼 생겨난 또 다른 레이어가 또 다른 우연적인 관계를 형성하게 한다.
 
전시 서문에서 김지혜 큐레이터는 이러한 방식으로 이진한의 회화에는 “물리적인 레이어들이 탄생하였”으며, “이렇게 생성된 이질적인 공간들은 마찰과 충돌의 시간을 극복하고, 서로의 존재를 인정하고 이해하는 과정을 거치면서, 결국에는 타자로 인해 현-존재를 공고히 하는 단계에까지 이르고 있다”고 평했다.


《안녕, 안녕 그리고 안녕》 전시 전경((투게더)(투게더), 2023) © (투게더)(투게더)

이진한의 작업 전반에 걸쳐 소개되는 ‘발’, ‘해와 달’, ‘꽃’ 등 다양하게 변주되는 모티프 또한 그의 작업 세계를 가로지르는 특징 중 하나로, 이는 삶 그 자체와 같이 항상 생동하는 언어, 인간관계, 그리고 기억과 맞물려 움직인다.
 
약 2008년부터 2021년까지 영국에서 제작한 작업에서는 작가와 그를 둘러싼 타국의 언어와 문화가 타자 대 타자의 관계로 드러나며 일상 속 특정한 경험을 하나의 모티프로 표현했다.


이진한, 〈Hi, Bye 안녕, 안녕〉, 2016, 린넨에 유채, 70x60cm © 이진한

예를 들어, 2016년 작업인 〈Hi, Bye 안녕, 안녕〉은 작가가 오랜 기간 영국에서 거주하는 동안 외국인 친구와 거리에서 스치듯 인사를 건네며 헤어질 때의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감정을 벚꽃이라는 모티프로 표현한다.
 
“하이” 하자마자 “바이”하고 멀어지는 찰나의 순간으로부터 느낀 붙잡을 수 없는 것에 대한 슬픔은 화사하게 피자마자 금세 떨어지고 마는 벚꽃에 겹쳐진다.
 
작가는 이러한 그림에 대해 ”이렇게 덧없이 흘러만 가는, 차마 붙잡지 못하는 인연과 시간에 느끼는 아쉬움을 겹치며 외국어–모국어, 사고–감정, 글–그림 사이를 오가고, 복잡하고 난해한 감정을 단순하게 표현한다.”고 설명한다.


《안녕, 안녕 그리고 안녕》 전시 전경((투게더)(투게더), 2023) © (투게더)(투게더)

현재까지 그의 작업에 자주 등장하는 모티프인 ‘맨발’과 ‘꽃’은 작가의 유년 시절에 대한 기억에서 출발한 것이기도 하다.
 
4대가 함께 사는 대가족 안에서 성장한 작가는 맨발을 타인에게 드러내는 것을 조심스럽게 여기는 어머니의 모습을 보며 자랐다. 이 기억은 발을 가장 가까운 관계에서만 허락되는 친밀한 신체의 경계로 각인시켰고, 이후 그의 작업에서 발은 사랑을 직접 말하기보다 그 감각을 전하는 회화적 언어로 기능하게 되었다.
 
이러한 ‘발’이라는 요소는 그의 그림에서 점점 매끈하게 추상화되어 가며, 모티프보다는 하나의 상징적인 공간이 되어갔다.


이진한, 〈Heatwave〉, 2023, 린넨에 유채, 아크릴, 150x200cm © 유니온퍼시픽

또 최근의 작업에서 자주 등장하는 ‘꽃’은 가부장적인 가정 환경 속에서 성장한 경험을 반영한다. “딸이라면 무릇 이래야 돼”가 분명했던 집안에서, 그것도 차녀의 위치에서 자라면서 작가는 스스로를 시들시들한 꽃으로 여겼다고 고백한다.
 
이로 인해 그의 그림 속에서 꽃은 파스텔 톤의 밝은 색보다 빛이 바래거나 어두운 색을 띤다. 즉, 가부장적 질서와 규범 속에서 형성된 자기 인식은 빛을 잃거나 시들어가는 꽃의 이미지로 치환되며, 이를 통해 작가는 여성에게 요구되는 사회적 역할과 내면화된 감정을 은유적으로 드러낸다.


《EXTENDED REALITIES》 전시 전경(비콘스필드 갤러리, 2021) © 비콘스필드 갤러리

나아가 2021년 레지던시에서의 가상현실(VR) 실험을 계기로 회화의 본질적 언어를 고민하며 바깥쪽으로 돌출하는 듯한, 동양 서예와 유사한 붓질이 3차원적 공간감을 형성하는 화면까지 형식적인 진화를 거듭해 왔다.
 
강렬한 붓질, 화려한 색감, 분명한 명암 대비로 이루어진 그의 화면은 작가 내면의 실체를 더욱 거침없이 드러낸, 구체성을 담은 풍경이 되어 왔다. 작가는 이 풍경에 가까워지기 위해 강렬한 붓터치로 작업을 진행하는 사이사이, 캔버스를 지긋이 바라보는 시간을 갖는다.


《마사의 소문》 전시 전경(누크갤러리, 2021) © 누크갤러리

2021년 누크갤러리에서 열린 개인전 《마사의 소문》에서 작가는 미국 출신의 개념미술가 마사 로슬러의 일화를 바탕으로 한 작품을 통해 회화가 언어의 역할을 대신할 수 있는지에 대한 질문을 던지고자 하였다.
 
전시에 소개된 모든 그림에는 바이올린을 켜는 여자의 모습이 주도적으로 등장했다. 이는 2015년 이진한이 참여했던 한 학회에서 마사 로슬러가 누군가에게 던진 뜻 모를 농담에서부터 비롯되었다.
 
당시 마사 로슬러는 “개념미술도 좋지만, 작품에서 무언가를 느끼고 싶다”는 관객의 말에 “작은 바이올린을 켜는(playing a tiny violin)” 제스처를 취했다.
 
이진한은 이 저명한 예술가가 허공에 바이올린을 켜는 시늉을 하며 냉소적인지 다정한지 모를, 농담을 하는 그 장면을 오래도록 자주 곱씹어오며 그림을 그려왔다.


이진한, 〈가장 작은 바이올린을 연주하는 마사〉, 2015, 린넨에 유채, 160x220cm © 갤러리현대

이 제스처는 사실 영어권에서 지나치게 불평하는 사람을 조롱하는 표현인데, 이진한은 나중에 검색으로 알게 된 제스처의 의미와 자신이 직접 느꼈던 참여자들의 긍정적이고 따뜻한 반응 사이에서 괴리감을 발견했다.
 
마사 로슬러의 제스처에 관객들은 웃음을 터트렸고, 이진한은 그의 행위를 무례가 아닌 일종의 환대로 받아들였던 것이다.
 
이 때의 경험은 작가의 작업 세계에 일종의 변곡점이 되었다. 당시 작가는 언어적 소외감을 떨치기 위해 신조어나 K-POP 가사를 작업의 소재로 삼곤 했으나, 이날의 경험을 계기로 언어나 행위의 주관적 해석에 대한 긍정적인 관점을 가지게 되었다.


이진한, 〈Martha’s Red Violin〉, 2021, 린넨에 유채, 아크릴, 160x220cm © 누크갤러리

작가는 마사 로슬러의 행동과 관객들의 반응을 ‘이해할 수 없는 상황과 말’이 아닌 관객들과의 우정에서 비롯된 행위로 해석하면서, 본래의 의미가 아닌 그 자리에서 경험하고 느낀 것 또한 소통하는 의미가 될 수 있지 않을지 새로운 가능성을 모색하기 시작했다.
 
이를 바탕으로 하는 전시 《마사의 소문》에서 이진한은 자유분방한 붓터치와 강렬한 색채를 통해 화면을 구축하면서도 “그려진 것보다 그려지지 않은 것, 캔버스 표면 위 보이는 것뿐만 아니라 그 뒷면에 보이지 않는 무수히 많은 무언가가 있다는 점”을 강조한다.


이진한, 〈Light Night〉, 2025, 린넨에 유채, 아크릴, 150x200cm © 유니온퍼시픽

한편, 최근의 작업에서 이진한의 그림에는 그간 등장했거나 새롭게 모습을 드러내는 다양한 모티프들이 한 화면에 융합되고 그들 간에 독특한 리듬과 서사적 연결성을 갖는 화면을 구축하기 시작한다.
 
그간 이진한의 회화는 초현실적으로 구성된 풍경과 은유적 상징을 통해 관객의 감각에 조용히 스며들어 왔다. 최근작들에서는 특히 유기적으로 얽힌 모티프들이 점차 밀도 있게 축적되어, 끊임없이 연상되고 전이되는 상징, 은유, 대치의 언어를 만들어내는 특징이 더욱 돋보인다.


이진한, 〈The Glitch in the Garden〉, 2026, 린넨에 유채, 150x200cm © 유니온퍼시픽

이렇듯 이진한은 언어로 다 포착할 수 없는, 즉 ‘번역 불가능한’ 사고와 감정을 특유의 회화적 언어로 화면을 구성해 왔다. 작가의 말에 따르면, 이러한 그의 회화는 “작가의 사적 언어와 세상의 언어가 충돌하는 공간”이 된다.
 
이진한은 회화를 기존의 언어 체계로는 나타낼 수 없는 “주관적 이해를 위한” 대안적 언어로 실험함으로써, 동양과 서양, 모국어와 외국어, 사고와 감정, 글과 그림 사이의 경계에서 파생되는 충돌의 감각과 실패한 언어적 경험을 환각적이고 환상적인 풍경으로 변주시킨다.

"나는 어떤 작업을 하고, 그리고 삶의 경험들, 예를 들어 사랑의 실패 같은 것들을 끊임없이 들여다보게 되는 거예요. 이런 질문에 대한 답은 작가마다 다를 텐데, 그 시점에 제 답은 현실에서 불가능한 것을 이루어지게 하는 매체로 그림이 존재한다는 것이었어요." (이진한, 작가 노트)


이진한 작가 © 갤러리현대

이진한은 홍익대학교 회화과를 졸업하고 런던 세인트마틴과 골드스미스 대학에서 석사 학위를 취득했으며, 런던 UCL 슬레이드미술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마쳤다. 최근 개인전으로는 《Whispers》(갤러리현대 뉴욕 프로젝트 스페이스, 뉴욕, 2025), 《Lucid Dreams》(갤러리현대, 서울, 2024), 《안녕, 안녕 Hi, Bye》(스페이스 이수, 서울, 2023), 《마사의 소문》(누크갤러리, 서울, 2021) 등이 있다.
 
또한 작가는 《Vampire Problem?》(N/A, 서울, 2024), 《Drop Scene》(챕터뉴욕, 뉴욕, 2024), 《Alone Time》(유니온퍼시픽, 런던, 2023), 《Magnetic Fields》(BB&M, 서울, 2022), 《The Day in the Evening》(스페이스K, 과천, 2018) 등의 단체전에 참여한 바 있다.
 
이진한은 비컨스필드(2021), 윈저앤뉴튼 엘리펀트 랩(2019), 더 리 알렉산더 맥퀸 재단 레지던시(2015), 블룸버그 뉴컨템포러리(2015), 사치 갤러리 뉴센세이션(2012) 선정 작가이며, 그의 작품은 현대캐피탈, 중앙일보, 사라방드–더 리 알렉산더 맥퀸 파운데이션, 바르셀로나 소호하우스 등에 소장되어 있다.

Reference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