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편 값으로 두 편, 심지어 서너 편도 볼 수 있는 영화관을 동시상영(同時上映, double feature) 영화관이라 한다. 연속 상영이 더 정확한 말일 텐 데, 그럼에도 그것이 동시상영(同時上映)으로 정착되었던 데는 한 편의 가격으로 두 편을 본다는, 두 편을 동시에(at the same time) 시청한다는 나름의 논리가 있었기 때문이다. 두 편의 영화의 차이는 중요하지 않으며, 중요한 것은 두 편이 채우는/떼우는 시간, 가령 3~4시간의 동질성이다.
변두리 허름한 극장에서 우리는 우수한 영화나 시간가는 줄 모르는 영화가 아닌, 철지난 영화, 그저 영화인 영화를 시청하는 것이다. 달리 할 일이 없어서, 갈 데가 없어서, 혼자서 메우는 시간이 동시상영관의 시간이다. 그리고 그렇듯 텅 빈 선형적인 혹은 양화된 시간을 전담한 동시상영관은 이제 폐관되고 있거나 한 편에 2000원을 내면 되는 실버영화관으로 탈바꿈하고 있는 중이다.
동시상영관은 그 이름, 그 기능 방식, 그 생존 방식에서 가장 근대적이었지만, 오늘날의 초-근대적 시간의 흐름에서 밀려났고, 서울의 흉물스런 건물들이 그렇듯이 새로운 건물주나 어마어마한 담보 보증 대출금이 나타나지 않는 한 제 자리에서 ‘늙어가는’, 즉 기이한 ‘유기체’ 행세를 하고 있게 된다.
나오미 작가는 2010년 폐관한 청계천의 바다극장을 섭외해서 10.27~11.2일 사이에 〈동시상영(同時上映, simultaneous screens)〉이란 제목의 전시를 열었다. 작가는 동시상영관이었던 바다극장을 ‘동시에 존재하는 장막’이란 작가의 주관적인 의미에서 재전유했고, 그렇게 해서 사라지는 문화나 장소에 개입하는 자신의 미적 방식을 전시 제목에도 반영했다.
철지난, 즉 새로움을 욕망하는 관객의 흥미와의 ‘동시성’을 상실한, 어긋난 채 지금여기에 도착한, 과거인 채로 현재인 그런 시간성이 동시상영관인 바다극장을 매개로 무대에 오르게 된다. “동양과 서양, 현실과 이상, 전통과 현대”의 동시성, 그 둘의 분리불가능성에 천착해 온 작가의 바다극장인 것이다. 동시에 두 개의 막이 오르는 극장에서 우리는 그때와 지금의 혼종성을 경험하게 된다.
“지금은 사라져버린 근대화, 산업화의 상징인 삼일고가도로 옆에 위치한”(작가의 말) 바다극장도 역시 사라질 것이다. 역사주의의 “동질적이고 공허한 시간”(벤야민)을 동시상영이란 형식으로 보유했던 바다극장은 근대적 시간성의 ‘실재’로서, 근대의 환상 속 타자로서, 그렇기에 초-근대적 환상을 위해 이제 사라질 것이다. 살아있을 때나 죽어가고 있을 때나 바다극장은 흐르지 않는 물이 고인 늪 같은 곳이었다.
이제 기능도 맥락도 잃어버린 내부에 고인 시간, 2010년 이후로는 문을 열지 않은 이곳에서 ‘흐르는’ 죽은 시간에 작가는 집중한다. 이런 곳은 당연히 이야기, 상상력이 주인인 이야기가 흥건하기 때문이다. 작가는 작년 9월부터 이곳을 방문했고, 1997에 벽에 붙여놓은 ‘관람자 준수사항’이란 문서나 3시 42분에 멈춰있는 시계처럼 망각과 부재를 따르는 예술가가 좋아하는 물건들/아카이브들이 주인공인 이야기를 회화적 이미지로 만들었다.
극장의 ‘주인’인 듯 살고 있는 비둘기나 1970년대 산업화의 역군이셨던 작가의 아버지가 초현실적인 화면에 등장하기도 한다. 이곳은 무한질주하는 동질적 시간에 착취당하는 사람들에게 그에 합당한 꿈이나 환상을 제공하던 극장이었고, 이제 남은 것은 낡고 늙고 추레한 먼지투성이의 ‘내부’이다.
그리고 과거, 이상, 추억을 물화하는 대신에 그것이 지금, 현재, 욕망으로 지속되고 있음을 말하려고 이런 공간을 ‘활용’하는, 자신의 개입을 통해 ‘일시적으로’ 살아있게 만들고자 하는 타자의 방문이 있게 된다. 나오미는 서양화를 전공하고 무대미술, 사극영화미술에 참여했었고, 문화재연구소에서 복원모사가를 꿈꾸었던 작가로 자신을 설명한다. 사극 영화 미술팀에서 이류미술인 ‘민화(民畵)’를 그리는 일은 작가에게는 아주 흥미로운 일이었다고 한다.
그것은 주지하다시피 ‘예술’이 아니다. 민화는 “정식 그림교육을 받지 못한 무명화가나 떠돌이화가들”이 “서민들의 일상생활양식과 관습 등의 항상성(恒常性)”을 바탕으로 그린 그림이기에 “정통회화에 비해 수준과 시대 차이가 더 심하다”(네이버 지식백과). 즉 민화는 미술사의 내재적, 발전적 연속성에 등재되지 못하며, 그것을 만들어낸 시대, 서민들의 욕망, 희망을 직접적으로 반영한 도구적 산물이다.
서양화에서 민화로 ‘내려간’ 나오미는 평범한 사람 혹은 인간 일반이 욕망하는 “불로장생 (不老長生)”의 욕망이 민화란 형식 안에 다양한 도상들을 통해 표출된 데 흥미를 갖게 되었고, 이렇듯 직접적이고 집단적인 도상들에 대한 회화적 개입 혹은 회화로의 변용을 시도하고 있다. 언뜻 민화에 대한 충실한 반복·모방으로 보이는 나오미의 회화는 그러나 기존의 민화의 도상들을 자신의 주관적인, 나아가 동시대인의 집단적인 욕망과 접합, 융합함으로써 민화의 현재화에 골몰하고 있다.
사적인 것으로 가정된 우리의 욕망은 사실은 민화를 출현시킨 조선시대 사람들에게 그랬듯이 집단적인 도상을 경유해서 시각화된다는 깨달음에 근거하여, 나오미는 민화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동시대 인간의 욕망에 대한 주관적 해석에 가까운 회화를 만들어내고 있다. “정통회화”에서 밀려난, 이제는 한물간 민화에 개입하는 것이나 멀티플렉스 영화관에 밀려난, 한물간 동시상영관에 개입하는 것은 나오미 작가에게는 같은 것이다.
그녀는 초근대의 가치인바 ‘최신식’에 도착하지 못한 패자들, 그러나 엄연히 지금도 우리의 욕망을 보유한 기이한 형식이나 공간으로서 공존하는 타자들에게 ‘기회’를 주는 것, 사라지고 잊혀질 것들에게 생을 되돌려주는 것이 그녀의 관심이고 임무인 것 같다.
일상이나 현실에서 미술과 문화가 어떻게 권력과 연동하는지를 목격한 작가가 뒤져야하는 것은 전통이나 ‘향수’일 것이다. 전통은 향수와 연동하면서 현재의 헤게모니에 결탁하기 마련이고 예술가는 전통을 지금-시간으로 불러들여 그것에 생명을 수여함으로써 지나간 것은 지금도 살아있다는 것을 증명하려고 한다.
나오미는 민화를 회화와 접합하고 바다극장을 자신의 ‘무대’로 재설치함으로써 그렇게 한다. 이번 전시가 “금강산 관광을 주제로 시작한 2017년 〈유랑극장 프로젝트〉의 일환”이며 다음 전시가 인천의 미림극장에서 열릴 예정인 것도 그런 연유이다.
작가는 남한과 북한 모두가 금강산에 수여한 문화적, 집단적 향수-욕망의 근거를 평양 출판사에서 발간한 〈천하절승 금강산〉의 문장들에서 확인해낸다. 금강산의 바위나 암자의 위치, 이름의 유래와 또 각각의 장소나 이름과 연결된 전설을 기록한 평양에서 나온 책은 이곳 한국인의 금강산 여행을 오래된 꿈, 전사(前史)로의 여행으로, 마치 극장에서 우리가 욕망했던 꿈으로 고정시킨다.
작가는 바다극장의 무대 위에 절정에 이른 단풍, 두 개의 계곡에서 쏟아지는 폭포, 단단하게 솟아있는 바위들로 구성된 일종의 ‘총천연색 시네마스코프’, 혹은 저급한 키치 풍경화, 혹은 싸구려 공연장의 무대배경, 아니면 북한의 선전선동 공연의 뒷배경이어도 충분할 그림을 걸었다. 그리고 전시 오프닝인바 무대공연의 사회자 역할을 바다극장에서 37년째 일하고 있는 김경주 과장, “배우가 꿈이었던 관리인”에게 넘겼고 그렇게 해서 한 사람의 오래된 꿈이 뒤늦게 실현되었다고 볼 수 있다.
1970년대 이후로 바다극장을 방문한 사람들을 기억하고, 그 평범하고 시시한 사람들의 꿈과 희망이 담긴 흑백 사진을 찾아내 “컬러링”하고, 멈춘 바다극장을 일주일간 움직이게 만들고, 금강산을 방문하는 사람들의 기억을 ‘조잡한’ 풍경화로 보충하고, 지금도 살아있는 현재인 1970년대식의 풍경(“양지리” 같은)을 회화로 재현하고, 심지어 작가 자신이 대학을 졸업할 무렵 지나가다 받았던 청계시장상인들의 집회 호소문을 전시하는 나오미의 부산하고 따듯하고 겸손한 개입은 변두리 사람을 자처하는 예술가의 전형적 태도이다.
사라지는 것들을 살아있는 것으로 재조정하는 일은 우리의 초근대적 동시대성의 잔혹한 ‘학살’에 대한 미약한 저항일 것이다. 변두리는 조금만 살고, 덜 사는 방식으로, ‘최선을’ 다해서 사는 중심과는 다른 삶을 향유한다.
굳이 거대한, 과시적인 저항이 아니어도, 낡고 늙고 후진 삶의 동시대성을 소환하려는 시도에 불과하더라도, 제 때와 제 자리를 차지하지 못한 것들, 즉 시대착오적 존재들을 위한 무대에서 우리는 사라진 것, 사라질 것, 그렇기에 늘 돌아오고 있는 것들을 떠올리는 일의 게으름에 박수를 치고 있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