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어둠 속에서 빛나는
동공처럼, 빈 방에 몇 발자국 들어서면 작고 파란 구슬이 반짝인다. 발
밑으로 하강하는 계단 모서리에 불가능하게 멈춰 서 있는 파란 색의 유리 구슬은, 제 형태가 갖고 있는
내부의 힘과 제 형태를 둘러싼 외부의 힘 사이에서 정지해 있다. 이 파란 점은 “모서리의 돌”처럼 보이지 않는 벽들을 지탱하며 이 큰 공간 전체의
균형을 담당하고 있을 지도 모른다는 비약적인 암시와 상상을 불러온다. 발 밑에 놓였던 구슬은 계단으로
하강하던 몸이 그 계단 끝에서 부채꼴의 호를 그리며 회전할 때 다시 눈 앞의 어떤 한 점으로 나타나 허공에 반짝이는 환영을 만들어 놓기도 한다.
“지새는 달”이라는 말이 있다. 먼 동이 틀 때 서쪽 하늘에 떠 있는 반달을 부르는
이름이다. 지새는 달은, 밤새도록 하늘에 포물선을 그리며
천천히 움직이다가 해가 뜨면 노란 빛을 거두고 흰 색을 띠며 허공에 잠시 머물다 태양 광선 속으로 사라진다. 지새는
달을 본다는 것은, 밤과 낮의 경계에서 땅에 눕혀 있던 감각을 다시 일으켜 세워 허공을 응시하는 것으로, 그 밤과 낮 사이 공백의 시공간에 현존하는 수수께끼 같은 실체에 대한 상상과 지각을 동반한다. 파란 구슬에서 시작된 (몸의) 하강과
상승, 정지와 회전 같은 움직임의 연쇄가 거대한 중력이 다스리는 발 아래의 감각을 조율한다면, 사방에서 밀려 들어오는 채광과 공간 모서리마다 드리워진 그림자가 서로 교차하며 요동치는 허공에는 지새는 달처럼
유령 같은 형상의 출현이 시선을 붙든다.
❉ Parallel Drawing
(semicircle, gold) #1(2022)은 공간에 침투한 빛과
그림자 사이에 존재하면서 마치 지새는 달처럼 현존과 응시의 간극을 오간다. 금색의 얇은 체인을 천장에서
사선으로 나란히 늘어뜨린 채 허공에 멈춰있는 반원의 정체는, 텅 빈 공간에 침투해 있는 외부 세계의
조건에 반응하며 제 존재를 끊임없이 변형하는 마술적인 실존을 드러낸다. 애초에 기하학적 반원의 실체는
차오르거나 이지러지는 불완전한 상태의 존재를 규명하는데, 얇은 금색 체인의 반짝임으로 인해 현실의 어디서도
그 형태를 온전히 헤아리기는 어려워 보인다. 이 불확실함의 현존은 빛과 그림자 속에서 나타났다 사라지기를
반복하며 삼차원적인 실체로서 존재하기 위해 누군가의 “지각”과 “상상”을 요구한다.
이 사태는 누군가에게 조각적인 사건을 암시할 텐데, 오래 전에 조각가들의 친구임을 자처했던 허버트 리드(Herbert Read)가 “조각이란 무엇인가”에 대해 사유한 문장을 되새겨 보면 된다. “삼차원적인 형체로서 물체를 형상화하기 위해서는 상상력이나, 아니면
적어도 정신적인 노력이 요구된다. 우리는 이러한 작업 과정에서 촉감이나 중량감과 같은 감각 또는 감각
일체를 동원하게 된다.”[허버트 리드, 『조각이란 무엇인가』, 이희숙 옮김, 열화당, 1984(원서: 1954), p.34.] 오종의 Parallel
Drawing (semicircle, gold) #1은 리드의 조각에 관한 사유를 경유하여, 허공에서 반짝이는 반원의 실체에 다가갈 일체의 감각을 헤아리도록 한다. 마치
해가 떠오르기 시작하는 하늘에서 지새는 달의 실체를 단순히 지각하는 것 이상의 감각으로 알아차림으로써 공간 속에 형상화 하는 능력을 서서히 드러내게
하는 것처럼 말이다.
그 대각선 옆으로 파란 구슬이 있는 계단은 Line Sculpture #22(2022)로 명명된다. 직각 구조를 반복하는 계단 가장자리의 반쯤에 이르면, 벽과 계단의
바닥 면을 딛고 허공에 떠오른 흰 색 난간이 하나의 사물로서 기능하고 있다. 부드럽게 꺾인 난간의 모서리가
둔각을 이루며 사선으로 하강하는 움직임의 여분을 비워둔 채, 한 점에서 (보이지 않는) 다른 한 점으로 이어져 또 다시 하강하며 회전하는
감각을 상상하게 한다. 이때, 파란 구슬은 모서리의 돌처럼, 혹은 어둠 속에서 확장된 동공처럼 허공에서 “어떤 형상”의 현존을 지각하여 그 실체의 차원에 접근하려는 몸의 움직임을 이끈다. 이
지각과 상상과 움직임의 주체는 그[작가]와 나[관객]의 몸을 동기화 하는 “인간
형상”으로 모아져 삼차원의 조각적 경험을 형성한다.
리드는 인간 육체가 삼차원성을 자각하는 능력에 대해 말했는데, 그는 “신체적인 감각”을
통해 자신의 “육체에 대한 상을 구상”할 수 있으며, 그러한 “자신의 실존을 형상화 하는 수단”에 의해 타인/대상의 삼차원적인 상이 경험되는 것임을 강조했다. 말하자면, 어떤 형상의 삼차원적 현존에 대한 자각은 자신의 신체적
감각과 실존적 형상을 대상에 반영하고 투영함으로써 구체화되는 것이다. Line Sculpture
#22는 지각과 상상이 교차하는 그러한 신체적 감각의 반영과 투영을 통해 구체화 된다. 오종은 벽과 계단과 난간의 건축적인 구조를 조건 삼아 선적인 요소들로 일련의 지지체(props)를 구축하였다. 큰 벽과 짧은 계단이 교차하는 모서리를
점유해 절대적인 균형을 이루며 서로 지탱하고 있는 물체들은 하나의 완결된 윤곽선을 거부하면서 움직이는 신체에 의해 시시각각 변형되는 감각을 공간
속에 축적한다. 그렇게 서로가 서로를 반영하고 투영하는 가운데 축적된 감각은 텅 비어 있는 공간에서
마치 꽉 찬 진공 상태처럼 유령 같은 양감을 지각하거나 상상하게 한다.
❉ 오종의 Line Sculpture는 제목에서 가늠해 볼 수 있는 것처럼, 조각이 공간을 점유하기 위해 필요했던 요소들 중에서 선의 역할과 가능성을 극대화 한다. Line Sculpture #24(2022)는 파란 구슬이 있던 계단에서부터
계속해서 하강하여 닿게 되는 막다른 벽과 바닥 사이에 자리한다. 점을 포함한 곧은 선들이 삼차원적인
구조를 구축하고자 일련의 균형 상태를 힘껏 과시하고 있는데, 이는 어떤 육체들을 바닥으로부터 일으켜
세운 것처럼 (한 조각가의 표현대로) “몸에 관한 추상적인
언급”을 흐릿하게 암시하면서 그것에 의한 새로운 공간을 표명한다. 임의의
형태를 공간 속에 일으켜 세워 지탱시켜 놓는 힘의 역학-균형, 압축, 마찰 등-은 인체의 해부학적 구조뿐만 아니라 신체와 신체 사이의
물리적 관계를 비약적으로 상기시킨다. 조각가인 리처드 세라(Richard
Serra)가 이본 라이너(Yvonne Rainer)와 트리샤 브라운(Trisha Brown) 같은 안무가들의 무용에서 신체와 신체가 혹은 신체와 사물이 주고 받은 힘을 통해 공간
속에 서게 되는 평형의 순간들을 자신의 조각적 지지체들과 관련시켰던 것처럼 말이다.
Line Sculpture #24에서는
선과 선이 직각으로 만나 투명한 면을 이루고, 면과 면이 직각으로 인접해 하나의 모서리를 공유한 기하학적
공간을 구축한다. 그 (새로운) 공간은 임의의/다수의 형상을 포괄할 수 있는 지지체를 끊임없이 변형시키는데, 이는 구축된 대상들 간 힘의 반영뿐만 아니라 구축된 공간과 실제의 공간을 매개하는 육체의 (지각과 상상과 움직임에 관한) 반영에 의해서도 이루어진다. 세라는 오래 전에 이 문제를 “조각”에 관한 사유로 구체화시켜 살핀 적이 있다. 납이나 철 등의 금속판을
이용한 그의 초기 지지체는 몸과 관련되어 있다. 세라는 특유의 방식으로 바닥에서 평면의 물체를 일으켜
세웠을 때, 그 물체가 공간을 침범하고 구획하여 마침내 전체 공간을 표명하게 된다고 말했다. 그는 그렇게 평면으로 구축된 지지체로서의 조각이 (안무적인) 몸과 유사하다고 했는데, 그것이 공간 속에 세워졌을/나타났을 때 일련의 장이 활짝 열려 그 공간을 표명하는 하나의 사건이 만들어지기 때문이다.
오종은 지각과 상상을 통해 공간을 표명하는 일련의 조각적 사건에
접근하는 과정에서, 공간을 침범하고 신체와 힘의 역학을 주고받을 수 있는 추상적인 단위로 선을 제시한다. 그가 다루는 선은 일종의 광선처럼, 혹은 그림자의 윤곽처럼 끊임없이
당겨지고 압축되고 회전하는 감각과 연결되어 있다. 때때로 이 선들은 무거운 돌과 추를 매달아 중력의
힘으로 곧게 세워지기도 하고, 견고하고 단단한 물성을 내세워 벽과 바닥과 계단 위에 서서 다른 물체나
신체들과 힘을 주고 받곤 한다. 한편 중력으로부터 떨어져 부유하는 선들은 공간과 신체를 아우르면서, 환영과 현존 사이에서 지새는 달이 수수께끼 같은 착시를 일으키던 것처럼 크고 느린 회전 운동을 하며 스스로
땅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는 실존의 감각을 나타낸다.
❉ 이번 개인전 《낮은음으로부터》는 공간을 수직적으로
규명해 보려는 작가의 속내를 가늠하게 한다. 오종은 둘로 끊어져 어긋나 있는 지각의 단층처럼 바닥면의
높이가 어긋나 지그재그 구조로 연결된 것처럼 보이는 전시 공간의 건축적 특성을 이용했다. 이로써 공간과
공간의 경계를 창과 계단과 모서리가 효율적으로 연결하는 가운데, 공간 안에 깊숙이 잠재되어 있는 나선운동의
감각이 오종의 드로잉과 조각으로 활성화 되었다. (띄어쓰기가 없는)
“낮은음으로부터”라는 말은 매우 시각적인 기호로서, 이
수직적인 공간의 움직임을 파악하는데 중요한 단서처럼 보인다. 하나의 덩어리로 압축된 언어는 마치 공간
내부의 무게중심을 자처하기라도 하듯, 중력과 양감과 무게 등 삼차원적인 감각을 함의한다. 중력이 크게 작동하는 맨 아래층에는, 발 밑의 파란 구슬의 상징처럼
무거운 추와 구슬이 일체의 선들을 공간 속에 수직으로 세워놓는 일에 몰두하고 있다.
Room Drawing (light) #2(2022)는 (지각과 상상에 의해) 바닥이 어긋나 있는 공간의 중간층에서 벽과
난간을 지지체 삼아 얇은 체인과 색을 입힌 실 등으로 어떤 평형의 상태를 보여준다. 사실 Room Drawing (light) #2에서는 삼차원의 형태 내지는 공간을
경험하는 것의 물리적 한계선을 극단적으로 상상하게 되는데, 신체[나]와 물체[선으로 구축된 지지체]와
빛[태양광선] 사이의 힘과 거리와 응시의 끝없는 반영을 한
순간 경험하기 때문이다. 발 밑의 중력이 허공에 이르러 태양광선으로 전환되는 일종의 우주적인 힘에 의해
삼차원의 윤곽을 (환영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신체 앞에서
대면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First Echo #2(2022)는
어떻게 말해야 할까. 천장 사이 움푹 파인 허공에 수평으로 눕혀 있는 직육면체의 구조물은 공기에 의한
미세한 파동과 빛에 의한 미세한 분절을 드러내면서 눈앞에 유령처럼 출현한다. 순식간에 공간에 대한 감각을
전복시키는 First Echo #2는, 나선운동을 통해 상승한 신체를 마술처럼 저 아래 바닥으로 되돌려 놓는다. 마치
우물 밑에 서 있는 것처럼, 내가 본 Parallel
Drawing (semicircle, gold) #1이 어쩌면 실체가 아니라 우물에 비친 달의 환영/그림자였을 지도 모른다는 상상이 더해져, 한 사람의 지각과 상상은
서로를 반영하며 삼차원의 공간 경험을 환영과 현존 사이에 가져다 둔다. 공간 속에 떠 있는 것들은 모두
반짝이므로.
전시 제목이 “낮은음으로부터”와 “First Echo”를 나란히 병기한 것처럼, 중력과 태양광선, 땅과 허공, 현존과
환영, 지각과 상상은 서로 다른 쌍둥이처럼 신체가 물체와 공간을 삼차원적으로 매개하는 감각을 설명해준다. 이는 삼차원의 조건을 지닌 공간 속에서 최소한의 물체와 신체의 제스처를 가지고 서로의 관계 안에서 “드로잉”과 “조각”의 태도를 규명해 온 오종 특유의 미학적 성찰로 보여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