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해민선, 〈고요한 삶_침전물〉, 2023, 인화지 위에 아크릴릭, 115.3 x 93.3 cm © 이해민선

오늘의 회화는 자신을 부정하고 갱신해야 하는 숙명을 기꺼이 받아들이곤 한다. 회화사에 기록된 대단한 회화들은 스스로를 부정하는 모순을 감행하며 회화에 대한 담론을 지속시키는 선례를 보여주었다. 더 이상 새로울 것이 없다고 하면서도 회화는 끊임없이 회화 자신에 의해서 갱신된다. 이해민선의 회화도 앞선 회화들이 만들어 놓은 기존의 좌표, 흔한 롤모델을 따라 움직이지 않으려 한다는 점에서 중요하다.

그는 그간 도시화라는 큰 맥락에서 인간 중심적인 시선이 자연과 인공의 공존 문제를 어떻게 재단하는지를 바라본 ‘덜 죽은 자들’ 시리즈, 동네 산책과 같은 행위를 통해 발견한 우리 주변 풍경의 구성 요소들이 어떤 식으로 접촉, 결합, 연대하고 있는지에 중점을 둔 ‘물과 밥’ 시리즈, 그리고 인화된 사진을 화학약품으로 녹여 이를 물감 삼아 개발이 방치된 땅이나 황량한 풍경을 그린 작업으로 구성된 ‘살갗의 무게’ 시리즈, 이후 좀 더 황무지에 가까운 풍경에서 발견한 사물을 통해 삶의 본질을 사유한 〈덩어리〉와 〈바깥〉 시리즈로 이어지는 작업을 진행해 왔다.

그간 이해민선의 작업은 작가가 존재가 구성하는 풍경 안에서 사물과 사물이 아닌 것의 경계와 그 접촉에 주로 시선을 둔 것이라고 하면, 이번 신작들은 지난 2-3년간 단순히 사물이라고 일컬을 수 없는 어떤 강렬한 상태를 한동안 마주한 작가가 고심 끝에 내놓은 결과물이라는 점에서 그의 작업 여정에서 새로운 전환이 될 것으로 보인다.

이해민선은 신작을 통해서 정물/스틸 라이프(still life)를 ‘고요한 삶’으로 해석하고자 한다. 스틸 라이프만큼 작가의 주관적 해석에 의해서 다양한 의미가 파생하는 미술 용어도 없을 것이다. 미술사에서 스틸 라이프는 정지, 죽음, 특히 관습적으로는 메멘토모리와 결부되어 덧없는 삶과 같은 메시지를 담곤 하지만, 이해민선의 사물 보기는 시간이 영원히 정지하여 죽음과 다르지 않은 사물의 상태에 대한 시선이 아니라 비로소 모든 것들이 동등해진 물질 세계에 대한 시선이다.

즉, 작가에게 사물은 물질로서 엄연히 현전하는 것이며, 사물이 머문 흔적은 부재를 지시하는 것이 아니라 실재에 대한 증언이자 사물의 시간이 모여서 형성된 자국이다. 신작 〈고요한 삶: 침전물〉(2023)은 이를 잘 보여주는 작업이다. 작가는 테이블 위에 오랫동안 놓여 있던 화분이 ‘사라지고’ 남은 흔적을 그렸다. 그는 화분의 흔적을 사물의 부재한 상태로 바라보기보다는 침전물 자체를 사물로 놓고 그렸기 때문에 흔적이라는 표현보다 침전물이라는 표현을 하고 싶었다고 말한다.

그리고 침전물을 ‘역동이 끝난 이후 가라앉는 고요한 시간’이라고 은유하였는데, 여기에는 작가의 사물 보기를 예민하게 만드는 물질에 대한 감각과 시간에 대한 감각이 모두 포함되어 있다. 특히 사물의 시간에 대해서 그는 사물과 사물이 관계하였던 접촉의 시간, 상태 변화의 시간을 모두 사고하고 있다. 그래서 〈고요한 삶: 침전물〉에서 테이블과 화분이 접촉하여 관계를 형성한 시간은 침전물이라는 또 다른 사물을 만들어냈고, 작가에게 이 물질은 부재하는 사물의 시간을 기억하는 의미심장한 것이다.

사물 간의 결합, 연대, 관계를 중시하는 이해민선의 사물 보기는 특히 낡고 쓸모없는 것으로 치부되는 사물들로 향하곤 하는데, 내장재로 많이 쓰이는 스티로폼, 철거 중인 건물에서 붕괴된 시멘트나 철근 잔해, 무언가를 잔뜩 적재한 뒤 하나로 덮어 싸버린 비닐 거적 등이 그 예다. 이들은 인간의 삶에 너무 유용한 산업 소재이지만 용도를 다하게 될 경우, 낡고 부서지고 찢긴 채로 우리 주변 곳곳에 흩어져 잔존하는 사물들이다.

작가는 이들 사물이 지니는/지녔던 시간뿐만 아니라 사물의 안과 밖에 존재하였던 열기와 온기에 대해서도 사유하는데, 건물 철거 현장에 오랫동안 방치되어 있던 스티로폼을 주워와 단면을 자른 후 펼쳐 놓은 상태를 그린 〈고요한 삶: 내장재〉(2023)나 동네를 지나다니는 길에 철거 중인 건물 내부를 바라본 모습을 그린 〈거주하는 사물〉(2023)을 예로 들 수 있다.

시멘트 벽체가 붕괴되어 가는 현장은 또 다른 사물화가 진행되어지는 장소로, 폐허가 되어가는 곳에 널브러진 사물에 대한 작가의 시선은 한때 이 사물이 제 용도를 할 때 품고 있었던 온기에 대한 생각으로 이어진 것이다. 한편, 이해민선은 해빙, 폭설, 폭염과 같은 상태를 이미지를 해석하는 개념과 연관지어 본 적이 있다. 특히 겨울 동안 결빙과 해빙이 진행되는 강의 풍경을 바라보면서 언 강과 녹는 강의 관계를 사색하게 되었는데, 작가에게 언 강은 이미지가 붙들린 사진의 상태로, 그리고 녹는 강은 사진을 녹이는 일 또는 사진의 이미지를 해석하는 행위로 생각되었다.

이미 인화지에 인쇄한 사진을 화학약품으로 녹인 후 이를 물감 삼아 다시 그림으로 그려본 적이 있는 이해민선은 강의 결빙과 해빙을 지켜보면서 “사진의 표면을 녹여내 작업했던 감각”이 자주 떠올랐고, “본 것을 이미지로 얼리는 것이 사진이라면 그 사진 속에서 각자의 ‘기의’를 만나면 그것이 표면이 녹는 점이 아닌가” 하는 생각으로 이어졌다.

이해민선이 주목하는 사물의 관계는 경계의 풍경에서 발견되는 것이다. 오래전부터 그는 개체와 개체가 접하는 순간과 이들이 상호작용하는 경계에 주목해 왔다. 개인전 《물과 밥》(아마도예술공간, 2013)에서 그가 작업의 재료가 되는 사물을 채집하여 연결하는 주요 수단은 끈이나 철사와 같은 재료였다. 작가는 개체와 개체의 물리적 접촉이 발생할 때 개체의 성질을 변질시키지 않고 연결시켜 주는 재료들을 통해 평범하고 약한 일상의 존재들이 상호 존중의 방식으로 연대하는 것을 보여주고자 하였다.

사물의 관계에 대한 사유뿐만 아니라 작업을 위해 이미지를 만들어내는 과정에서도 이해민선은 프로타주나 캐스팅처럼 접촉의 방식을 많이 사용한다. ‘가로수’(2017) 시리즈는 가로수의 몸통에 종이를 대고 연필로 문지른 후 드로잉을 추가하여 완성한 초상 작업이다. 가로수의 울퉁불퉁한 몸통 표면에서 노인의 얼굴에 담겨 있는 마른 세월을 읽어낸 작가는 사물의 표면 그 자체에서 세상의 본질을 발견하곤 하는 것이다.

이때 이해민선의 회화는 사물의 환영을 보여주는 것에 함몰되지 않는다. 구체적 대상을 제시하는 이미지를 만들지만 그가 화면 위에 재현하는 것은 광학적 시각으로 인지한 사물의 외양이 아니라 작가가 지속적인 사물 보기를 통해 파악한 사물이 세계와 관계하는 방식, 즉 진정한 사물의 본질이다. 이 사물의 본질에 대한 고려에는 사용하는 종이나 캔버스, 물감, 붓 등 하나의 작품을 위해 거치는 과정과 동원되는 모든 재료들의 본질까지 포함된다.

그래서 환자들의 몸에서 떼어낸 석고 깁스에서 촉발된 이번 신작들은 이해민선에게 하나의 강렬한 사건이 되었다. 사람의 신체에 붙어 있던 석고 깁스에는 자세하지는 않지만 분명한 타인의 흔적이 남아 있었고, 이런 상황에서 이해민선은 석고 깁스를 통해서 생명과 사물의 경계에 대한 강렬한 느낌을 대면할 수밖에 없었다. 이 모아진 깁스들을 바라보는 것 자체가 작가에게는 하나의 사건이었기에 그는 깁스를 보는 방법부터 점검하지 않을 수 없었다.

2022년에 참여한 3인전 《워키토키쉐이킹》(보안1942, 2022)에서 그는 일단 깁스를 대놓고 보고 그리기를 하기도 하고, 일부러 불편한 자세나 섬세한 조절이 어려운 도구(롤러)를 사용하여 깁스에 대한 감각을 질감으로 나타내 보기도 하였다. 사물의 본질에 대한 탐구는 눈으로 관찰하기에 그치지 않고 직접 석고 깁스를 만들어 보기도 하면서 물과 만난 석고가 발열을 하다가 식으면서 굳는 과정을 관찰하기도 하였다. 그에게는 잔열이 빠져나간 후의 석고가 비로소 사물로 인식되었던 것 같다. 〈덜 굳은 사물〉(2023)은 이 과정에 대한 사색에서 나온 작품이고, 사물이기보다는 사물이 되어 가는 상태를 지시하는 작품이다.

한편, 이번 신작들에서 이해민선은 천 캔버스를 사용하지 않고 반광의 사진 인화지를 선택했다. 그는 프레임된 캔버스 천 위에 붓질을 할 때 느껴지는 캔버스의 탄성을 ‘허공’에 비유하며 이를 선호하지 않는다고 하였다. 그래서 이번 신작들은 딱딱하고 매끈한 벽면에 인화지를 펼쳐 붙인 채로 그려진 것이다. 이 인화지는 여러모로 작가의 회화에 대한 신념을 반영하는 듯하다.

인화지는 그 자체가 만만치 않은 물성을 지닌 하나의 사물로서, 물감의 풍부한 물성, 다양한 회화적 제스처를 이용해서 이미지의 환영을 만들고자 하는 화가들의 흔한 목표에 대한 기대를 처절하게 저버리는 성질을 지녔다. 이해민선은 반광의 인화지 위에 뻑뻑한 붓질로 묽은 아크릴 물감을 수십 차례 얹고 또 얹어서 희미한 그림을 그려내었다. 종이는 작가의 신체를 반사하듯 작가의 붓질을 냉정하게 받아쳐 내고, 물감은 사물의 환영을 쉽사리 만들지 못하고 무기물처럼 화면 위에 착상되어 있다.

그간 이해민선이 다뤄왔던 사물 간의 관계가 인화지 위에서 이미지와 지지대의 관계로도 나타나는 것 같다. 본디 인화지는 사진 이미지를 견고하게 붙들어 주는 역할을 하지만, 이해민선에게 이 인화지는 이미지를 견고하게 붙들어 주는 데 인색하기만 할 뿐이다. 그렇지만 이 인화지야말로 이해민선이 누누이 강조한 ‘모든 것이 동등한 물질 세계’, ‘사물을 화면으로 불러들이고 그것이 화면에서 이미지인 동시에 사물이기를 기대한다’, ‘재료는 단지 도구가 아니며 그 역시 물질’이라는 말을 실천하게끔 하여, 작가의 붓질에 몹시 버티는 성질을 지녔고 물감과 혼연일체가 되지도 않는다.

그래서 그의 그림은 “나는 여기 있다”라는 현수막 구호처럼 인화지의 물성에 고스란히 맞서서 그려졌다. 한때 회화의 지지대 문제는 회화의 이데올로기인 양 중요한 문제였던 적이 있으나 오늘날에는 화가 개인의 실험이나 신념 정도로 축소되었다. 또 회화가 이미지의 환영을 만드는 숙명을 가지고 있고 추상회화조차도 환영을 만든다는 것을 부정할 수 없다.

그런데 이해민선이 인화지를 사용하는 것은 여전히 이미지의 본질이 무엇인가에 대한 사유를 끌어내는데, 그의 회화는 이미지의 환영보다 사물의 본질을 추구하면서 자신의 화면에서 이미지의 환영이 사물의 본질을 소거하지 못하도록 부단한 노력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의 사물 보기가 언제나 실재 세계, 즉 실존을 향하고 있다는 점은 중요하다. 그의 회화는 항상 비물질 이미지가 아닌 물질 세계의 이미지로서 출발하고 물질 세계의 물질로서 실존한다.

Reference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