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시장 입구에서 관객과 가장 먼저 마주하는 작품은 〈강〉(면 천에 리소그래피 인쇄, 혼합 채색, 기둥에 설치. 246 x 1,866 cm. 2023)이다. 두 전시실 사이의 복도를 가로질러 길게 드리워진 설치 작품은 애도의 메시지를 적은 포스트잇의 물결이 형성하는 추모 공간을 재현하고 있다. 언젠가부터 우리 사회에서 사회적인 사건과 재난이 있을 적마다 사건 발생의 장소와 시청 앞 광장 등의 공공장소에는 이와 같은 추모의 공간이 생겨나고 있다.
사무용품이자 문구용품으로 분류되는 포스트잇은 주로 학생이나 직장인이 ‘기억’을 위한 메모의 용도로 일상에서 흔히 사용하며, 대개 한정적인 시간 동안만 남겨둔다. 온라인의 댓글 문화가 확장되어 현장으로 옮겨진 포스트잇 추모 공간은 즉흥적이고 자발적인 공감과 참여의 문화에 현장성과 의례적 행위가 더해진 새로운 문화 현상이다. 과거의 대자보나 현수막과 다르게 동시대의 포스트잇은 가볍고 유연한 ‘모바일 미디어’이며, 제도가 생략된 ‘투표 용지’가 된다.
한편, 불특정 다수의 감정적 메시지는 사회와 시대라는 공동체의 몸을 감싸는 ‘스킨’처럼 많은 사람이 공유했던 특정 시간을 각자의 방식으로 기억하게 한다. 작품은 포스트잇 모음이 생성했던 추모의 공간과 시간을 박제해서 가둬 두는 형식을 취하지만, 동시에 각각의 포스트잇에 적힌 텍스트가 마치 물에 젖어 흐려진 것처럼 읽을 수 없어, 작품을 사실적 재현에서 각색된 이미지로 재위치 시킨다.
각색된 이미지는 미디어와 아날로그, 과거와 현재, 현존과 부재, 죽음과 삶이라는 다층적 경계를 가로질러 부유하는 기호를 끌어당긴다. 모바일의 참여 문화가 현장의 행위로 연결되고, 과거의 임시 공간은 작품이라는 현재적 현현으로 재구성 된다. 생략된 감정의 텍스트는 주체의 부재를 강조하지만, 동시에 인쇄된 부재의 이미지는 카메라가 처음 등장했던 시기 사람들이 믿었던 마법과 영혼의 논리처럼, 가시화될 수 없는 죽음을 드러내는 기계 장치가 된다.
〈강〉은 작품의 제목이나 외형 어디에도 이태원을 지시하지 않지만, 우리의 인식과 생각은 자연스럽게 그곳과 그 시간으로 연결된다. 그것은 아마도 포스트잇 추모를 통한 애도와 위로의 적극적인 발화가 가장 두드러졌던 사건이 이태원 참사(2022) 였고, 이태원역 1번 출구를 나오면 바로 이어지는 그 골목과 긴 골목의 벽을 채웠던 포스트잇 물결이 작품의 외적 형상에서 지속되기 때문일 것이다.
이태원에서 유난히 위로의 말들이 적극적으로 발화되었던 상황을 사후적으로 살펴보면, 아마도 같은 강도의 비난과 혐오가 동시에 쏟아졌던 당시의 상황 때문인 것으로 추측된다. 이태원은 미군기지, 다문화의 유입과 확장 통로, 퀴어와 하위문화 등 우리 사회에서 ‘이방인의 뜰’로 표상되는 장소이다. 이태원을 중심으로 활성화된 할로윈 데이는 그 기원을 살펴보면 고대의 켈트족이 죽음과 유령을 찬양하며 벌인 축제에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겨울이 시작되기 전 10월의 마지막 날, 죽은 사람이 유령이 되어 찾아오는 것을 기념하는 축제문화가 북미로 이동하면서 특정 기호와 풍습을 생산하였고, 한국에서는 외형적으로 북미의 할로윈 축제 의식과 유사한 새로운 놀이 문화로 자리 잡았다. 동시에 여기에는 세대 차이, 문화적 간극과 경제 논리의 충돌이 존재한다. 한쪽에서는 한국의 할로윈을 문화 제국주의나 자본주의 특수 아이템으로만 축소해서 미숙하고 철 없는 사람들이 ‘일탈’을 즐기는 날처럼 편협하게 인식해 온 것이 사실이다.
반면 다른 한쪽에서는 초등학생부터 성인들까지 하이브리드된 청년 문화를 가감없이 꺼내어 놓는 축제의 장으로 즐기고 소비한지 오래되었다. 이태원 참사는 새로운 문화에 관해 이해 방식과 무관하게 이미 진행되는 상황에 대비한 준비가 없었던 우리 일상의 무능함을 표상한다. 그리고 참사를 향한 애도에 위계가 있다는 식의 퇴행적 반응, 그것의 정치적인 왜곡과 미숙한 공동체 의식으로 확장된다. 현존의 강도를 통해 죽음을 기억해야 마땅한 추모식에서 피해자의 위패나 영정 사진 없이 모두 익명의 비존재로 전환되었던 사실은 특정 죽음을 타자화 하는 태도로 밖에 이해될 수 밖에 없다.
이처럼 전시의 서사는 구체적인 사회적 사건과 그곳에 얽힌 죽음, 죽음과 삶의 경계를 더듬는 시도와 충동으로부터 출발한다.〈강〉이 재현하는 것은 사건을 둘러싼 정치적 입장이나 이해 관계가 아닌, 사건으로 촉발된 우리의 감정이 사회적으로 작동했던 공통의 감각이다. 정동 경제 연구자 사라 아메드는 『감정의 문화정치』(2023)에서 두려움, 고통, 증오, 공포, 역겨움, 수치심 등의 감정과 이것의 언어적 발화와 몸의 현상 간의 관계가 작동하는 방식을 논리화 한다.
그는 감정이 개인적인 소유나 상태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정동적 가치로 전환되고, 기호가 되며, 자본처럼 작동하는 과정을 분석한다. 신자유주의에서 자본이 그러하듯이, 특정 사건이나 상황에 반응하는 감정이 권력구조, 지배 이데올로기, 역사를 비가시화하고 오로지 감정으로 연결되는 개인과 집단을 재구성하여, 시민권을 규율하는 문화정치의 핵심이 된다는 것이다.
그는 이 과정에서 프로이트의 무의식적 감정을 언급하며, 의식에서 억압된 것은 정동적 충동과 같은 ‘느낌’이 아니라 잠정적으로 연결된 ‘생각’이며, 이와 같은 정신분석학이 사회적 감정의 움직임에 연상의 과정을 수반하게 된다는 점을 시사한다고 말한다. 따라서 ‘느낌’은 다양한 개인의 여러 가지 의미화 과정을 가로질러 과거와 현재를 통시적으로 오가며 형상 사이를 미끄러지고, 과거의 역사를 다시 불러일으키지만, 다시 미끄러짐을 통해 특정한 대상이 감정의 원인처럼 받아들여지게 만든다.
이태원 참사를 통해 경험하거나 공유했던 여러 감정들은 이와 같은 정동 경제에 비추어 생각해볼 수 있다. 참사의 원인이 명백한 인재이고, 희생자가 젊고 어린 생명들이었다는 점에서 이태원 참사는 자연스럽게 세월호 참사(2014)와 연결된다. 그리고 감정의 대상이 공시적이면서 통시적으로 순환하면서 감정 가치가 증식하는 작용으로 이어졌다.
포스트잇 추모를 비롯해서 이와 같은 정동 경제에 참여한 사람들의 감정은 포스트잇과 그것에 적힌 메시지 보다는, 그것이 온라인에서 순환하고 움직이면서 여러 사람들의 기억과 잠정적 생각을 끌어들여 더 많은 정동적 가치로 확장하였다. 아매드는 프로이트의 이론에 이어 감정과 생각의 ‘주체’가 부재와 상실의 고유한 장소라고 상정한 라캉의 논의를 덧붙인다.
시간의 흐름에 따라 축적되는 정동 경제에서 ‘주체(시민 혹은 국가)’는 실존하기 보다는 하나의 교차점에 지나지 않으며, (공통의) 무의식은 주체, 대상, 기호, 타자 사이의 관계성이 실체화되지 않은 상태를 가리킨다는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우리의 감정은 정신, 사회, 대상이 명확하게 분리되지 않는 집단의 ‘표면’으로서 물질화를 거듭한다. 집회에 참여한 특정 집단의 발언, 이것이 보도된 뉴스 푸티지, 그것을 다시 풍자하는 일러스트와 밈의 연쇄 작용은 정동적 충동을 강화하는 대신 생각과 분석을 약화시킨다.
그러니까 이 작품에서 지워진, 혹은 감춰진 포스트잇 속 문자들은 이와 같은 정동 경제의 물질화된 표면을 마주하게 하면서 동시에 자본처럼 작동하고 축적되었던 ‘주체’ 없는 공통의 감정을 거둬내는 시도일지 모른다. 작품이 재현하는 ‘감정의 몸’은 우리가 자동적으로 공감할 수 밖에 없었던 느낌을 소환하지만, 동시에 읽을 수 없는 문자는 그것에 멈춤 버튼을 누르고 물질 그 자체를 마주하게 한다.
팽팽하게 마주하는 양가적 입장은 사건 너머의 공간, 공간 너머의 시대, 시대 너머의 죽음이라는 인간 보편의 조건으로 이어지며, 이것이 동시대에서 어떤 의미로 작동하는지, 그리고 미술에서 이와 같은 주제를 다루는 것이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를 생각하게 한다.
작가 노트에서 이제는 ‘몸에 잔존해 있는 감각과 기억을 발굴하고 가시화하는 일에 집중’했다고 쓴다. 오랜시간 ‘몸’이라는 주제를 탐구한 작가에게 ‘몸’은 화면에서 재현되는 몸, 시대를 살아가는 몸, 과거를 기억하는 몸, 회화를 행위하는 몸까지 다양한 ‘몸’을 아우른다. 메를로 퐁티는 유명한 저서 『몸의 현상학』(1955)에서 공간의 지각을 통해 대상을 지각하는 데카르트와 칸트식 사유의 반대에서 자신의 신체적 공간과 연결된 경험성을 설명한다.
우리가 자신의 신체를 경험하는데 있어서 경험은 단지 외피(인터페이스)이고 객관적인 공간 아래의 신체적 ‘존재’가 합쳐지는 과정을 통해 몸이 원시적 공간을 찾게 한다고 쓴다. 이제의 작품 세계에서 몸은 퐁티 식으로 말하면 ‘경험하는 몸’에 관한 것이다. 미술사 정전 속의 여성 미술가들은 공통적으로 신체를 통해 젠더, 섹슈얼리티, 정치학과 시대적 알레고리를 투영해왔다.
하지만 한국이라는 지정학적 배경에서 등장하는 미술적 이미지로서 신체는 그보다 더 복합적인 맥락에서 형상화 되기에, 그만큼의 다층적인 독해가 필연적으로 요구된다. 이를 테면, 작가 이불의 초기 퍼포먼스 작품들을 생각해볼 수 있다. 그들은 여성의 재현, 남성적 시각과 권력/이데올로기의 문제를 질문하는 작가적 인식이 퍼포먼스의 수행성을 통해 완성된 비판적 작업들이다.
일련의 사진과 비디오 기록으로만 남아있는 이 작품들은 1980년대라는 시대적 배경에서 공권력의 폭력적 사건과 관련한 기억을 불러일으키고, 여성성이라는 신화적 기표나 전형적 텍스트와 대립하며, 오리엔탈리즘을 내면화한 한국의 근대화 프로젝트를 풍자하는 몸의 정치학을 실천한다. 과거의 수행적 몸과 이제의 몸이 생성된 사회적 조건을 연결 지어 생각해보면, 한편으로 유사한 정치적 장으로서 여성의 몸을 생각해볼 수 있다.
물론 이번 전시에서 이제의 몸은 여성의 신체를 넘어 다양한 젠더, 신체와 정신적 외상의 메타포로서 몸까지 더 확장된 범주를 아우른다. 하지만 대부분의 작품이 외형적으로 온전한 몸을 재현하지 않는다.
〈강〉은 물론이고, ‘세계는 계속된다’ 연작(캔버스에 유채, 리소그래피 인쇄 부분. 각 130 x 130 cm. 2024)에 등장하는 다양한 몸과 몸의 메타포들은 취약하고, 끊어지거나, 삭제된 몸, 혹은 그것의 파편을 암시한다; 사고가 나서 찌그러진 자동차, ‘재난’의 풍경을 연상시키는 주인 없는 신발 더미, 남녀가 머리만을 맞대고 다른 방향으로 누워있는 〈림보〉, 달빛이 드리운 강가를 바라보는 여성(이것은 아이러니하게 현재의 정치적 상황에 관한 풍자가 되기도 한다), 식사 풍경의 윤곽, 리어카 수레에 잔뜩 매어 있는 짐 보따리에 가려진 노동자, 모여 앉은 여성들의 발과 발목, 거칠게 마무리되어 윤곽이 뚜렷하지 않은 산등성이 등은 전체가 아닌 부분만을 제시한다.
구체적인 주체가 삭제된 일련의 ‘상황’들은 생략되거나 부재하는 몸을 경유하여 고유한 관점을 드러내고, 보이지 않는 연결과 분리를 반복한다. 그리고 종국에는 핏빛으로 물든 바닥 뒤로 색이 없이 찌그러진 자동차 이미지와 그 앞으로 피어난(혹은 시들어가는) 푸른 꽃을 통해 우리는 이 모두가 이른바 ‘충격’에 빠진 어떤 상태에 관한 이미지라는 것을 알게 된다. 기술적으로 이 평면 작품에서 연속적으로 마주하는 색상과 그것의 조합은 모두 낯설고 강렬하다.
현실적인 재현과는 거리가 있는 색이며, 주로 빛과 어둠의 극적인 효과를 위해 선택된 듯 하다. 그동안 작가가 사용해왔던 ‘중간 색’보다는 원색과 보색 중심의 팔레트는 대칭과 중첩의 운동을 통해 캔버스를 빈틈 없이 채운다. 어떤 이미지들은 중심이 되는 대상을 흑백으로 처리하고, 그 주변에 혹은 그 위로 색-면을 채워서 언뜻 엑스레이 촬영을 한 필름의 네거티브 이미지처럼 표현하기도 한다. 마치 외상을 겪고 있는 세상에 엑스 광선을 비추어 눈으로 볼 수 없는 속사정을 면밀하게 들여다보는 것처럼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