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기성(b. 1988)은 개인의 감각과 기억이 물리적 경계와 충돌할 때 드러나는 내면의 상태를 조형 언어로 번역하는 작업을 해왔다. 특히 그는 변화하는 도시 풍경 속 재개발 지역, 철거 예정지, 원도심, 음지 공간 등 불완전한 장소들에서 탈락하거나 소멸해가는 대상들 사이에 남겨진 감각과 흔적을 해체와 복원의 과정을 통해 탐구한다.


엄기성, 〈수집된 이야기 조각들 - 춘천 다실 관계망〉, 2024, 세라믹, 46x34x49cm © 엄기성

엄기성의 작업은 불완전한 이미지를 수집하는 행위에서 출발한다. 주변에서 느끼고 경험하고 보고. 들은 여러 가지 불완전한 이미지를 개인적인 감성과 혼합하여 조형 작업을 풀어나간다.
 
예를 들어, 초기 작업에서 엄기성은 버려진 사물이나 빈티지 물건들을 수집하고, 이에 그의 전공인 도예를 접목시켜 새로운 작품으로 탄생시킴으로써 과거와 현재, 버려진 것과 새로운 것, 사물과 예술 등의 경계를 실험하기도 하였다.


엄기성, 〈TERRIBLE 혼종〉, 2021, 복합재료, 52x35x153cm © 엄기성

이처럼 쓰임과 기능이라는 도예의 범주에서 벗어나 주변의 환경 및 대상들과 자신의 감각을 연결 짓는 시도는 2021년 개인전 《불완전한 하모니》에서 더욱 확장되어 나타난다.
 
엄기성은 생활 폐기물, 스티로폼, 스테인리스, 합성수지, 장난감 등 우리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일상 소재부터 반짝거리는 네온이나 금, 은과 같은 값비싼 재료까지 그의 취향대로 선택한 재료들을 도자에 결합하거나 장식으로 더했다.
 
도자에 버려진 일상 오브제를 결합하거나, 화려한 장식과 대중적인 소재를 활용한 작품은, 흙을 기반으로 하는 전통 도예의 매체적 한계와 정해진 틀에서 벗어나 자신만의 예술 언어로 도예를 확장해 나가는 작가의 태도를 보여준다.


《불완전한 하모니》 전시 전경(아트숨비센터, 2021) © 엄기성

전시는 도자 퍼니처부터 도자에 현대의 재료를 결합한 입체 조형물, 가면을 모티프로 한 오브제까지 현대 도예의 다양한 형식과 창의적인 발상을 친숙한 방식으로 풀어낸 작업들로 이루어져 있었다.
 
그중, 〈KAT〉(2021)는 2020년도 작업인 〈TAL(NEO SCULTURE)〉의 연장선에서 제작된 것으로, 무겁고 유약 특유의 반짝거림이 있는 도자의 매체적 특성과 가볍지만 덩어리 감을 낼 수 있는 스티로폼의 특성을 결합시키며 새로운 이미지를 실험하는 작업이다.


엄기성, 〈KAT〉, 2021, 복합재료, 98x45x108cm © 엄기성

엄기성은 도자와 스티로폼이라는 서로 다른 매체를 통해 동일한 덩어리감 안에서 디테일과 색채가 어떻게 달라질 수 있는지를 탐구한 〈TAL (NEO SCULPTURE)〉을 발전시켜, 〈KAT〉에서는 고양이라는 특정한 이미지를 매개로 새로운 조형적 가능성을 모색했다.


엄기성, 〈수집된 이미지 조각들-오직 산뿐〉, 2023, 세라믹, 레진, 종이, 철사, 에폭시, 25x26x22cm © 엄기성

이후의 작업에서 엄기성은 자신의 심리적 불안이나 새로운 경험에서 오는 다양한 감정들을 작업에 녹여내는 조형적 실험을 전개해 나갔다.
 
이를테면, 2024년 클레이아크김해미술관에서 열린 단체전 《일상의 풍경》에서 작가는 본인의 주거주지인 서울과 임시적으로 거주하고 있는 김해 진례의 상반된 모습들과 함께, 그로부터 떠오르는 개인적인 심상과 감정 등을 도자 위에 이미지로 표현하였다.


엄기성, 〈폐허된 문명-한남3구역〉, 2025, 세라믹, 디지털 전사지, 21x21cm © 엄기성

그리고 2025년 인천아트플랫폼 레지던시 프로그램에 참여하던 당시 작가는 ‘재개발’이라는 이름 아래 철거되고 덧씌워지는 풍경들 속에 남겨진 희미한 감각과 흔적들을 추적해 나가기 시작했다.  
 
작가는 인천 원도심과 재개발 예정지, 과도기적 상태의 임시 공간을 탐색하고 공간에 축적된 시간의 물리적 잔상이나 흔적의 부유물을 탁본 방식으로 채집했다. 그리고 다시 조형화하는 과정을 통해 과거와 현재, 상상과 실제가 충돌하고 교차하는 지점을 탐색하고자 했다.


《흐릿한 경계의 잔상들》 전시 전경(인천아트플랫폼, 2025) © 인천아트플랫폼

그 결과물을 선보인 개인전 《흐릿한 경계의 잔상들》(인천아트플랫폼, 2025)은 폐허가 된 일대를 배회하며 철거된 담장과 허물어진 구조물과 잔해, 사라진 동선의 빈틈에서 감지된 시간의 파편들로 이루어져 있었다.


엄기성, 〈송월동 판타지〉, 2025, 세라믹, 디지털 전사지, 36x31x52cm © 엄기성

엄기성은 그가 수집한 수많은 층위를 압축시키기 위한 구체적인 방법론으로서 조각 작업을 수행해 나갔다. 여기서 재료가 되는 흙은, 작가의 말에 따르면 “이 모든 잔상들을 담아내는 감각의 피부”가 된다.
 
손의 압력과 시간의 층위를 고스란히 저장하는 축축한 흙의 재료적 특성을 활용한 그의 조각에는, 갈라짐과 꺾임, 흘러내림이 가득한 표면이 남게 된다.


엄기성, 〈폐허된 문명의 색채들 – 한남3구역〉, 2025, 세라믹, 디지털 전사지, 가변크기 © 엄기성

이러한 불완전한 표면은 이도 저도 아닌 경계의 상태에 놓인 도시의 물리적 기억과 감각을 호출한다. 즉 그의 조각은 형태적 완결보다는 일시적 가변 상태로서 서서히 소멸하는 흐름을 드러내며, 규정되지 못한 채 스러져가는 것들-공간의 기척, 기억의 온도, 그리고 파편화된 존재의 조각들-에 대한 작가의 애처로운 애정을 담는다.


엄기성, 〈균열된 표면〉, 2025, 세라믹, 각 33x43cm © 엄기성

이러한 장소들 안에서 작가는 기억과 망각, 존재와 부재, 개인적 경험과 사회적 구조 사이에 놓인 보이지 않는 선을 사유하며, 그 경계에서 부유하는 감각과 기억의 단면 조각들을 붙잡을 방법으로써 탁본이라는 새로운 조형적 실험을 구상했다.
 
그는 탁본 방식으로 흔적의 빈 틈을 메꾸며 다시 조형화하는 과정을 통해 과거와 현재, 평면과 입체, 상상과 실제의 경계를 넘나드는 실험을 지속해 나갔다.
 
이러한 조형적 탐색을 통해 작가는 “우리는 어떤 경계를 기억하고, 어떤 경계를 잃어버렸는가? 그리고 그 사라진 경계의 잔상들은 지금 이곳, 나의 몸과 감각에 어떤 방식으로 남아 있는가?”라는 질문을 던진다.


《탁본수집 프로젝트 01 – 사이트 레코즈》 전시 전경(부연, 2026) © 엄기성. 사진: 최철림

이처럼 흐릿하고 불안정한 선 위에서 엄기성은 구체적 형태로 말해지지 않은 감각, 사라지는 것들의 고요한 목소리를 더듬으며, 사라지는 것들을 위한 물질적 기념비이자, 잊혀가는 것들을 붙잡기 위한 조형적 저항으로서 작업을 이행해 나갔다.
 
이러한 작업의 연장선에서 열린 개인전 《탁본수집 프로젝트 01 – 사이트 레코즈》(부연, 2026)은 사라져가는 장소의 피부와 작가의 신체를 밀착하여 물질적 실존의 층위로 복원해 내는 고고학적 아카이빙 행위로서 탁본을 수행한 ‘탁본수집 프로젝트’의 결과물로 이루어져 있었다.


《탁본수집 프로젝트 01 – 사이트 레코즈》 전시 전경(부연, 2026) © 엄기성. 사진: 최철림

이 작업에서 작가는 탁본을 단순히 특정 장소나 대상을 시각적으로 재현하거나 재진술하는 도구적 차원으로 다루지 않는다. 그에 따르면, 탁본은 대상을 고정하는 최종 결과물이 아니라 장소가 머금은 삶과 역사를 물리적으로 깨우고 두드리는 최초의 매개체에 가깝다.


《탁본수집 프로젝트 01 – 사이트 레코즈》 전시 전경(부연, 2026) © 엄기성. 사진: 최철림

전시 《탁본수집 프로젝트 01 – 사이트 레코즈》는 재개발 지역에서 진행된 탁본 수집 아카이브 영상부터 지질학 샘플을 원료적으로 분석하여 평면으로 치환한 평면 시리즈, 장소의 장소성을 탈구시켜 또 다른 시공간으로 이동하는 과정을 보여주는 복합매체 시리즈까지 다양한 형태의 작업들로 구성되었다.
 
이 일련의 작업들은 사라져가는 장소를 기반으로 지리적 지표를 재정의하고, 시간과 공간을 횡단하는 물질들의 존재론적 여정을 새로운 감각적 형태로 드러낸다. 


엄기성, 〈재구성된 풍경-한남3구역〉, 2025, 세라믹, 디지털 전사지, 50x71cm © 엄기성

이처럼 엄기성의 작업은 오늘날의 사물과 도자를 결합하여 전통과 현대, 버려진 것과 쓸모 있는 것 사이의 경계를 실험하는 것에서 출발해, 지금 여기 우리가 서 있는 장소의 보이지 않는 경계들을 추적해 나가는 조형 실험으로 확장해 나갔다.
 
작가는 불완전한 대상에 남겨진 감각과 흔적들을 조각 또는 탁본이라는 신체적 행위로써 더듬어 나가며, 물리적‧개념적 경계가 흐려지는 모호한 과정 속에서 무엇이 사라지고, 무엇이 새롭게 형성되는지를 끊임없이 질문한다.

"이 흐릿하고 불안정한 선 위에서 나는 구체적 형태로 말해지지 않는 감각, 사라지는 것들의 고요한 목소리를 더듬고자 한다. 이 작업은 결국 사라지는 것들을 위한 물질적 기념비이며 잊혀져가는 것들을 붙잡기 위한 조형적 저항이 아닐까?" (엄기성, 작가 노트)


엄기성 작가 © 인천아트플랫폼

엄기성은 상명대학교 세라믹디자인과를 졸업하고 국민대학교 대학원에서 도예학과 석사 학위를 취득했다. 개인전으로는 《탁본수집 프로젝트 01 – 사이트 레코즈》(부연, 부산, 2026), 《흐릿한 경계의 잔상들》(인천아트플랫폼, 인천, 2025), 《불완전한 하모니》(아트숨비센터, 서울, 2021), 《Unbalanced Harmony》(마루누마 예술의 숲, 아사카, 일본, 2019) 등이 있다.
 
또한 작가는 《현장의 증거: 세 개의 시제》(임시공간, 인천, 2026), 《2025 플랫폼 아티스트 : 열하나의 말들》(인천아트플랫폼, 인천, 2025), 《마루누마 예술의 숲 5주년기념 한일교류전》(주일한국문화원, 도쿄, 2024), 《일상의 풍경》(클레이아크김해미술관, 김해, 2023), 《내방의 창》(한국공예디자인문화진흥원 윈도우갤러리, 서울, 2022) 등 다수의 단체전에 참여했다.
 
엄기성은 인천아트플랫폼(인천, 2025), 춘천예술촌(춘천, 2024), 클레이아크김해미술관(김해, 2023), 마루누마 예술의 숲(아사카, 일본, 2019) 등의 레지던시 프로그램에 입주 작가로 참여한 바 있다.

Reference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