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이연, 〈닿을 수 없다 하여도〉, 〈Unveiled 02〉, 2012, 프로젝션 매핑 설치, 가변크기 © 강이연

‘변기’를 전시한 뒤샹의 행위는 예술작품의 권위에 물음을 제기하고 미술관의 경계를 파괴하고자 한 급진적인 행위였다. 그에게 예술품과 기성품의 경계는 허물어야 할 벽이었다.

하지만 백남준이 속했던 ‘플럭석스’ (fluxus) 운동은 예술과 일상의 벽을 결코 허물고자 하기보다는 말 그대로 유동적으로 두 영역의 경계를 자유롭게 흘러서 표류하고자 하였다. 경계를 의식적으로 허물고자 하는 것은 결국 그러한 경계로부터 자유롭지 못함을 의미한다. 경계를 억지로 허물기보다는 경계를 가로질러 영역들을 자유롭게 넘나들 때 경계는 더 이상 벽이 아닌 소통의 길이 된다.

백남준에게 텔레비전은 바보상자라는 일상적 사물이기도 하지만 어느 순간 그것은 새로운 표현의 수단이기도 하다. 경계가 없다면 플럭석스(넘나듬) 또한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바이올린이나 첼로가 오선지 악보에 적힌 인위적인 소리를 내는 예술의 도구일 수도 있지만, 육체의 고통이나 환희를 표현하는 일상적인 소리(소음)를 내는 물건일 수도 있다.

이러한 넘나듬은 경계 자체를 파괴하는 것이 아니라 경계의 기능을 바꿀 뿐이다. 경계란 두 영역을 가로지르는 질곡일 수도 있지만, 그것은 문과 같은 소통의 경계일 수도 있다.

강이연의 작품은 경계를 넘나드는 플럭석스의 운동을 보여주기보다는 경계가 지닌 이중성을 보여준다. 말하자면 그의 작품은 경계가 벽이 될 수도 있으며 동시에 소통의 관문이 될 수도 있는 경계의 이중성 자체를 대상화 한다. 그녀의 작업이 경계를 허물고자 하는 아방가르드의 몸짓이거나 혹은 자연스럽게 경계를 넘나들고자 하는 플럭석스의 행위로 단순하게 환원시킬 수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작가의 작업은 두 가지 가능성 모두를 담고 있으며, 이 가능성 자체를 대상화하고 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도 도상적인 측면에서 보았을 때 이러한 특성은 매우 강하게 드러난다. ‘between’ 시리즈에서 캔버스는 분명 표현의 공간이다. 빈 캔버스는 작가에게 소통을 위한 매체이자 자신이 표현하고자 하는 것을 담아낼 수 있는 프레임(frame)이다. 그러나 정작 이 캔버스에 채워진 도상들은 몸부림의 제스처를 반영하는 섬뜩한 손짓이다.

캔버스의 뒷면에서 꿈틀거리는 이 손짓은 마치 캔버스를 찢고 앞으로 튀어나고자 하는 듯하다. 그러나 이때 캔버스는 그러한 해방과 탈출을 가로막는 프레임의 역할을 한다. 캔버스는 소통과 표현을 위한 공간이지만 동시에 그러한 소통과 표현을 가로 막는 공간이기도 하다.

〈Warmth〉를 도상적 측면에서 접근할 경우에도 이러한 특성이 명백하게 나타난다. 마치 부유하는 꽃처럼 보이는 이 작품은 관객이 접근할 경우 부착된 센서에 의해서 따뜻한 조명이 들어온다. 환영의 제스처이며, 제목이 암시하듯이 포근함과 따뜻함을 느낀다. 이러한 따뜻함은 분명 소통의 징표일 것이다. 사람들이 타자와 소통을 확신하는 순간 따뜻함을 느끼게 되는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매우 흥미롭게도 가까이 다가가서 이 작품을 보는 순간 꽃잎처럼 보이는 가닥들은 매우 날카롭고도 예민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다가가면 갈수록 오히려 섬뜩하고 날카로운 실체를 발견하게 되는 것이다. 일정한 경계 내에 들어서게 되면 센서가 작동하여 따뜻한 불빛으로 환영하는 듯하지만 바로 그러한 경계에 들어서는 순간 멀리서 보는 환상과 달리 더 이상 다가설 수 없는 날카로움이 도사리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 경계는 소통과 단절이라는 이중적 성격을 드러낸다.


강이연, 〈우리가 만날 확률〉, 2012, 인터랙티브 공간 설치, 600 × 500 × 250 cm © 강이연

작가의 초기 작품인 〈Scene 1/2/3〉에서도 이러한 성격은 보다 직접적으로 드러난다. 벽면에 걸린 세 개의 디지털 액자에는 마야로 만든 가상 이미지가 담겨 있다. 이 이미지를 자세히 보기 위해서 관객은 액자로 가까이 다가서지만 센서에 의해서 조명이 희미해지면서 가까이 다가갈수록 이 이미지를 보는 것은 어려워진다. 이 작품에서 작가는 프레임의 이중성을 보다 직접적으로 드러내고 있는 셈이다.

그러나 작가의 작품은 결코 도상적 측면에서만 이렇게 경계의 이중적 측면을 드러내고 있는 것은 아니다. 작가의 작업 자체가 이러한 이중성을 담고 있다. 가령 ‘between’ 시리즈의 〈Can't reach You〉는 캔버스에 매우 정교한 방식으로 가상의 이미지를 투사한다. 캔버스에 투사된 이미지는 역시 마야에 의해서 정교하게 가공된 이미지이다. 물론 이 이미지는 실제로 캔버스를 만지는 손을 촬영하여 다듬은 것이다.

작가가 3D 툴을 사용해서 주로 작업한 것은 아마도 실사 촬영한 영상이미지에 대한 매핑 작업인 듯하다. 주지하다시피 매핑 작업은 3D에서 모델의 표면적 질감을 입히는 것이다. 매핑 작업은 주로 시각적인 것과 관련이 있다. 전통적으로 캔버스는 시각적인 이미지를 창출하는 도구이자 프레임이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정교한 시각적 매핑 작업은 시각적 효과보다는 마치 진짜 캔버스 뒤의 생명체가 캔버스를 만지고 있다는 힘의 느낌을 만들어낸다.

이러한 힘에 대한 느낌이나 위협은 결코 시각적인 체험이 아니다. 캔버스라는 시각적 틀은 힘에 대한 결코 시각적으로 지각할 수 없는 틀이 되어버리고 만다. 작가가 〈unveiled〉에서 캔버스의 시각적 환영이 만들어지는 허구적 과정을 노출시키고 관객의 몸을 개입하게 만드는 순간, (어쩌면 작가의 의도와 달리) 이러한 이중성은 훨씬 더 배가된다.

작가의 작업이 경계의 이러한 이중적 측면을 대상화하고 있음은 틀림없지만, 한편으로는 그러한 경계를 자유롭게 넘나들고자 하는 욕망을 노출한다. 가령 〈scene series 05〉는 커피 잔 있는 탁자 위로 캡슐처럼 생긴 물체가 떨어지는 장면을 3D 프로그램으로 랜더링한 작품이다. 흥미롭게도 고체라는 특성을 지닌 이 캡슐의 낙하는 전혀 고체의 속성을 보여주지 못한다. 질감은 고체지만 낙하의 속성은 고체와 일치하지 않는다. 이러한 어긋남을 통하여 작가는 물질의 경계를 자유롭게 넘나든다.

〈Metamorphosis〉 또한 3D 프로그램으로 랜더링한 영상물이다. 한 가상의 물체(물방울처럼 보이기도 하고 고체처럼 보이기도 함)를 마치 초근접거리에 카메라를 댄 후 점차 트래킹 아웃하여 멀어져서 찍은 듯한 이미지를 보여준다. 초근접거리에서는 점성이 높은 젤 상태처럼 보이다가 점차 멀어지면서 바다나 호수의 물결로 변하면서 차츰 물방울로 변해서 결국은 하나의 알 수 없는 물체로 변한다.

동일한 사물이 눈의 거리에 의해서 다른 표면적 질감 효과로 느껴지게 됨을 가상적으로 표현한다. 여기서 하나의 사물은 시야의 거리에 따라서 젤, 액체, 고체로 지각될 수 있음을 가상적으 보여준다. 그럼으로써 사물은 고정된 속성을 벗어나 그 경계를 자유롭게 넘나드는 것이다. 물론 이는 디지털 프로그램으로 만들어진 가상적인 이미지에 불과하다.

이러한 점에서 작가에게 디지털 매체는 단순한 표현의 수단이 아니다. 그것은 기존의 프레임에 대한 재해석과 넘나듬을 위한 수단인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미디어 아티스트에게 기술로부터 자유로워진다는 것은 그만큼 기술에 천착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말하자면 작가의 기술에 대한 지식과 습득의 정도에 따라 표현의 범위가 그만큼 넓어진다는 것이다. 미디어 아티스트에게 기술은 표현을 위한 프레임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표현을 제약하는 프레임이기도 하다.

작가의 작업에서 발견되는 예술적 완성도는 바로 작가 자신이 이러한 경계를 넘나들 수 있기까지의 노력에서 비롯된 것이다. 따라서 기술과 예술의 경계를 넘어서 자신이 의도하는 바를 표현할 수 있는 자유로운 넘나듬은 예술과 다른 기술이라는 영역에 대한 끊임없는 예술가의 노력에서만 얻어질 수 있다는 평범한 진리를 작가는 보여준다.

이 평범하고도 근본적인 진리를 다시 각성시킨다.

Reference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