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이연의 'between'이라는 명제는 시각적 역설, 즉, 보려고 할수록, 소통하고자 할수록 멀어지는 실체를 좇고 있다. 대부분 사회적 규범은 시각적인 문제와 연관되어 있고, 다양한 시각적 기호는 우리가 알고 있다고 생각하고 연상하도록 배운 것에 근거하고 있다. 강이연은 다양한 미디어를 이용해 실체를 좇거나 새로운 가상을 만들려고 하지만, 그럴수록 멀어져가는 실제를 다룬다.
흔적으로만 드러나는 신체의 움직임을 스크린에 투사하는 방식, 존재하지 않는 사물과 상황을 3D로 작업한 사진-이미지, 잡으려 하면 흩어지는 글자 덩어리들이 그것이다. 이처럼 작가의 작업을 관통하는 것은 실상과 허상, 그리고 그것을 가로지르는 소통의 문제이다.
공간 속을 부유하는 흔적들. 빠른 속도로 스크린 표면을 뚫고 나올 듯 역동적인 움직임의 흔적이 전시장을 가득 메운다. 화면 뒤에 보이지 않는 실체가 만들어내는 팽팽한 긴장감은 그 실체를 알 수 없다는 점 때문에 더욱 강화된다. 알 수 없는 실체가 표면에 가하는 힘의 세기에 따라 스크린 표면은 뚜렷한 흔적을 남기며 호기심을 자아낸다.
공간 속에 떠도는 이미지들은 신체의 움직임이 표면과 닿아 생기는 접촉과 흔적으로, 이같은 이미지는 존재를 증명하는 자국이자 지표이다. 그럼에도 이미지는 이미 과거에 촬영된 것을 재생하는 것이기 때문에, 드러나지 않는 실체는 스크린 뒤에 무엇인가 실체가 존재 할 듯이 보이게 하는 일루전이 된다. 결국 이 모두는 스크린에 투사된 빛일 뿐이다.
작가의 관심은 시선의 문제에 있다. 즉, 보는 방법, 보이는 방식과 그 대상에 관한 문제를 다룬다. 보는 감각, 시각성은 다변화된 미디어 환경 속에서 새로운 양태를 띤다. 동시대 미술에서 보는 방법은 순수하고 투명하게 ‘보는’ 인식에서 공감각성, 비물질성을 속성으로 하는 다양한 인지방식을 요구한다. 폴 비릴리오에 따르면, 현대인들은 사실상 더 이상 보려하지 않으며, 시청각적 원격투시성의 수단을 모조리 동원해 오직 보이기만을 원한다.
대상과 실체를 명확히 드러내지 않고, 그 흔적만을 이용해 공간을 가득 메우는 강이연은 더 이상 보려하지 않는 현대인의 속성을 역설하는 듯 보인다. 스크린 너머에 존재할 것 같은 실체를 보고 싶은 관음증적 시각충동을 좌절시키고, 재현의 미학을 넘어선다.
모호한 실체는 그것이 남긴 실루엣에 의해 신체라는 것을 암시한다. 실체가 파악되는 순간, 화면 뒤의 인체는 작가라는 것을 어렴풋이 알 수 있다. 즉, 스크린에 투사된 것은 한 때 작가가 움직였던 ‘행위의 기록’이다. 실제 천과 스크린을 동일시하며, 실제 공간의 천에서 이루어졌던 행위를 스크린에서 실제 시간에 다시 투사하여 과거의 시간을 재생시키되, 현재의 시간처럼 보이게 한다. 그런 점에서 재현과 닮아있다.
실제 시간의 실제 공간이라는 명제와는 달리, 기록과정과 재생과정의 동시성으로 인해 생기는 트릭이다. 실시간으로 이루어졌던 움직임의 기록을 재생한 것이다. 실제로 이루어지는 장소와 비디오 화면에서 지각할 수 있는 것으로서 그 과정의 극단적인 소외를 초래한다. 가상현실은 아니지만, 실재와 가상의 경계를 뒤섞어 우리의 인식을 혼란스럽게 하는 것이다.
이같은 인식은 관람자로 하여금 실체 없는 이미지와 교감하고 싶은 욕망을 자극한다. 이 지점에서 관람객들은 보려하지 않고, 오히려 보이길 원한다. 보이지 않는 실체에게 보이기를 원하며, 자신에게 반응하기를 기대한다. 관람자는 순간적으로 연기자로 변신해 실체 없는 움직임(이미지)에 반응한다.
하지만 이 같은 기대는 곧 좌절하고 만다. 움직임은 단지 투사된 이미지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는 순간, 기대는 좌절로 바뀐다. 이같은 소통 불가해함, 실시간이 아닌 과거 시간의 재생은 관람자의 예측을 불발시킨다.
액자의 역할을 대신하는 스크린이 바닥에 놓여 있다는 점은 실제 공간을 그의 작업에 끌어들였음을 의미한다. 그리고 스크린은 스크린처럼 보이지 않고, 사물처럼 보인다. 즉 영상이 상영되어야 마땅한 스크린이 아니라, 의외의 사물에 영상을 투사함에 따라, ‘실제’의 문제는 더욱 강화된다.
실제 공간에 놓인 스크린과, 그곳에 투사된 이미지들은 배경이 되는 캔버스와 그 속에 그려진 대상-이미지의 관계와는 다른 위치를 점유한다. 결국 스크린이 놓인 방식으로 인해 그림처럼 실재계와 동떨어진 작품처럼 배치되지 않고 실재계와 허상계가 교차되는 것이다.
그러나 이같은 재현의 문제는 20세기처럼 단순히 ‘구상’과 ‘비구상’의 문제가 아니라, 작품의 실제 공간에서의 재생의 문제, 그리고 퍼포먼스, 설치와 같은 비시의적이고 동적인 사건과 사고들의 순수하고 단순한 실시간 현시이다. 결국 재현은 재생의 문제로 전환된다. 작가가 구축해 놓는 공간 속에는 허구와 가상이 공존하며, 가상적인 실제의 탐험을 통해 관객들의 마비되었던 감각과 인식은 각성된다.
한편, 3D로 만들어진 디지털 이미지의 대상은 아날로그 작업과는 달리 존재하거나 존재했던 것이 아니다. 그 작업은 대상을 다시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존재하지 않는 비물질적인 어떤 것이다. 그 작업이 만들어 내는 것은 존재할지도 모르는 어떤 것의 시뮬레이션이다. 만들어진 어떤 것을 다른 것으로 변화시킬 수 있는 가능성이 언제나 존재한다는 것은 그것의 본질적인 전제조건에 속한다. 존재하는 것은 단지 데이터 덩어리밖에 없다.
강이연은 우리 의식 너머 재생된 이미지와 잡히지 않는 실체의 딜레마를 환기시키며 우리의 인식을 교란한다. 마치 실재와 허구 너머 잡히지 않는 실체를 추적하지만 늘 좌절하고 마는 인식체계를 드러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