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이연, 〈비트윈 04〉, 2010, 프로젝션 매핑 설치 © 강이연

#1. 적요寂寥 ; 고요하고 텅 빈

그것은 마치 어떤 무대를 닮았다. 음조를 조율한 현악기처럼 팽팽하게 당긴 ‘장막帳幕’, 모노 타입의 빛 세례와 먹먹한 어둠, 그리고 장막 뒤에서 펼쳐지는 배우의 몸짓이 하나의 풍경을 이루고 있으니, 그 풍경은, 독백이나 대사도 없이 혹은 상황을 판독할 수 있도록 유도하는 지문도 없이 그저 장막의 저편에서 벗은 몸으로 쓰는 해독 불가능한 ‘짓’의 풍경이자 언어다. 배우는 잘 짜인 각본 없이 그 세계로 들어가 몸이 이끄는 몸짓을 펼친다. 오직 한 순간의 찰나와 살아있는 몸이 반응해 리듬을 타는 그 동세, 그 움직임들.

의식과 무의식이 한데 어울리기에 둘의 경계를 말하기는 불충분하고, 현실과 초현실의 시간을 투영시키는 것조차 무의미해 보이는 행위의 순간들이 발아한다. 그는 이 발아된 몸의 씨앗을 터트리듯 자근자근 장막을 누르고, 쓰지 않아 상실한 근육들을 조율해 나간다. 손, 손끝, 팔, 어깨, 종아리, 허벅지, 등···.

그것들을 연결하는 미세한 근육들이 몸짓과 몸짓 사이의 ‘막 act’을 이룰 때 ‘행行’의 실체들이 물밀어든다. 가고, 걷고, 나아가고, 달아나고, 돌아다니고, 겪고, 흐르고, 보내고, 일하고, 쓰고, 베풀고, 행하여지는 그 모든 행의 뿌리들이 말이다.

장막의 이쪽에서는 그런 몸의 흔적들이, 행위의 찰나들이 빛 세례를 받아 강렬하게 꿈틀거리고 있다. 불쑥 튀어 오르고 사라지고 자근거리는 그림자들, 멈칫하면서도 급박하게 돌아가는 몸과 빛, 그리고 어느 순간 그런 장막을 타는 숨결이 텅 빈 공간을 떠돈다.


#2. 탄금彈琴 ; 몸을 타다

그것은 마치 현의 묵음默吟이 아닐까. 몸이라는 활과 장막이라는 현이 부딪혀 훅훅 음을 내고 있으니. 활이 아닐지라도 몸은 거문고를 타듯 몸의 가락들로 막을 탄다. 자, 손가락이다. 손끝을 오므리고 펴면서 날렵하게 찌르고 튕기고, 여기 저기 곳곳의 장소를 문지르고 밀어내고. 이번엔 팔과 다리. 장막의 판이 바람인 듯 대지인 듯 맞받아 안고 뒹군다. 모든 행위는 음에 맞춘 정렬이 아님으로 비조화, 비음계이며, 순박자를 벗어난 엇박자에 가깝다.

몸과 장막이 아니라도 그는 자신의 몸을 타고 있다. 몸을 타는 것은 단순히 어떤 행위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율동에 가까운 것이며, 더 적극적으론 춤에 가깝다고 할 것이다. 헛헛한 공간을 통나무의 가지들처럼 몸의 팔다리로 휘저어 가는 동세의 구조가 춤이라면 더더욱.

그러나 그의 몸은 춤을 위해 단련된 몸이 아니다. 음에 반응하는 악기로서의 몸도 아니고, 우리의 시선을 순식간에 압도하는 절정의 몸도 아니다. 그의 몸은 장단으로 가지 않고 변주만을 타전한다. 바로 그것이 엇박자로서의 ‘짓’이고, 얘기치 못한 격렬함이 흐르는 침묵의 소리일 터이다. 그는 몸의 내부로 울리는 내밀한 소리가 커질 때 잠시 행위를 멈춘다.

갇힌 고통을 드러내거나 내면의 ‘탈아脫我’를 보여주기 위한 몸짓이 아님에도 그의 몸은 한 흐름이 지난 뒤의 새로운 ‘막 act’으로 향할 때 근육의 통증을 수반한다. 몸을 타는 행위 자체가 그에게는 큰 고통일 수 있으며, 숱한 마디들이 울리는 고통은 곧 장막과의 불균형을 이루며 무너질 수 있다. 거기에 ‘멈춤’이 있고, 몸의 눈물이 있다.


#3. 시선 ; 너를 본다

그것은 마치 황홀한 빛과 같다. 빛과 어둠은 팽팽한 장막처럼 서로를 밀고 당긴다. 광막한 암흑을 뚫고 장막의 표면에 뚝 떨어진 빛, 그 빛에 베인 어둠이 먹물 번지듯 물러날 때 서름서름하게 물밀고 오는 저 것, 저 몸의 음표들. 빛은 밀고 오는 것들을 더 강하게 혹은 여리게 비춘다.

메조 피아노(조금 여리게), 메조 포르테, 포르테, 포르티시모(매우 세게)-크레센도(점점 세게), 데크레센도, 그리고 악센트-알레그로(빠르게), 모데라토, 안단티노(조금 느리게)의 여리고 셈, 빠름의 음표를 따라 빛은 몸의 윤곽을 흐르고 가락을 탄다. 알레그로, 악센트, 피아노가 섞인 음표는 이제 빛이 된다. 빛의 음표가 되어 발광한다. 어둠 속에서, 텅 빈 무대 위에서 장막은 몸을 타는 빛의 음표가 되는 것이다.

장막의 저 편에 카메라가 놓여 있다. 카메라는 고요하고 텅 빈 어둠의 장막에서 몸을 타는 ‘너’를 보고 있다. 카메라는 ‘너’의 세계와 ‘나’의 세계를 연결하는 유일한 통로, ‘너/그’는 장막의 안쪽, 저 너머에 존재하나 ‘나’는 장막의 바깥, 바로 여기에 존재한다. 너와 나에겐 ‘사이’가 있다. 그 ‘사이’에는 너와 나의 정체를 묻는 윤리적 시간(역사)과 정치적 공간(장소)이 존재하지 않는다.

반대로 시간의 윤리와 공간의 정치가 파고든다. ‘너’는 언제나 동일하면서도 일정한 시간의 흔적으로 존재하고, ‘나’는 그런 ‘너’의 흔적이 상연되는 공간 속에서 ‘너’를 만나기 때문이다. 차원의 변수 혹은 변동 가능한 차원으로서 네 “demension variable”은 바로 거기에 있지 않겠는가.

나에게로 오기 전, 너는 수 없이 많은 행위들의 단편들을 모아서 빛의 음표를 구성하게 되었을 것이다. 고통을 제어하고 눈물을 닦아버린 너와 몸들은 그래서 부사와 동사만 있는 언어일지도 모른다. 스멀스멀, 꿈틀꿈틀, 빨리빨리, 가다, 걷다, 나아가다, 달아나다 처럼. 그러나 그런 언어들이 모여 빛을 이룰 때에는 맑은 소리가 난다. 아마도 너는 너의 심부心府에서 그런 빛 소리를 타전하고 싶지 않았을까, 생각해 본다.


#4. 전시-공간-작품 ; between

강이연의 영상 설치 작품 〈between〉은 어두운 전시공간에 사각의 흰 펼침막(스크린) 여러 개를 설치한 후 거기에 빔프로젝션하는 것이다. 크기가 다른 스크린을 벽에 고정하거나 겹겹이 기대어 놓았는데, 영상이 상연되기 전의 그것은 흰 캔버스로 보이거나 백색의 모노크롬, 미니멀리즘으로 비쳐지기까지 한다. 그리고 그것들은 빛이 있기 전까지 암흑 속에 존재한다. 그의 〈between〉이 제대로 상연되기 위해선 그런 완전한 어둠이 필요하다.

플레이가 시작되면 화면 위에 빛 그림자가 나타나는데, 순간 우리는 환영과도 같이 드러난 몸의 율동을 보게 된다. 그것은 마치 화면의 뒤에서 누군가 꿈틀대고 있는 형국이며, 고치 속의 애벌레처럼 자신을 둘러싼 장막을 걷어 내기 위해 몸부림치는 것으로 느껴진다. 그러나 몸짓이 지속될수록 저 내부의 몸이 그런 강렬함에 휩싸여 있거나 혹은 밖의 관객을 향해 구원의 손길 따위를 바라고 있지 않음을 알아차리게 된다. 그는 화면을 조율하듯 조금씩 몸을 움직여 그 흔적을 새기고 ‘여적餘滴’을 남길 뿐이다.

어떤 작품은 몸 전체로 빛 그림자를 새겨 나가고, 다른 어떤 작품은 손에 의해서만 이뤄진다. 전시공간에 설치된 화면들은 각기 다른 몸의 언어를 타전하고 조율한다. 그러므로 그것은 마치 하나의 화음으로 가기 위해 존재하는 자아의 현신으로 느껴지기까지 한다.

그러나 화면에 투사된 모든 영상은 작가 자신이고, 그 언어는 하나의 몸에서 잉태된 것들이다. 화음과 몸이 미세한 ‘사이’를 두고 전시공간을 흐르고 있다. 그의 ‘사이’는 화면과 관객인 ‘나’의 사이일수도 있고, 몸의 분절들이 만들어 낸 그 내부의 ‘사이’일 수도 있음을 보여준다.

그런데 흥미롭게도 그런 의문과 분석들이 다소 의외의 지점에서 파편화 된다. 그 움직임들이 빔프로젝트의 빛에 불과할 뿐이라는 사실을 인식하는 순간에 말이다. 그러므로 실제인양 움직이고 있는 화면은 단지 카메라에 저장된 영상이 투사되고 있을 뿐이며, 우리가 보는 몸짓은 그런 영상이미지에 불과하다. 환영, 마술, 판타지, 일루전의 혼합은 시선의 트릭이고 논리적 단계가 상실된 알고리즘일 터인데, 강이연의 작품은 어쩌면 바로 거기에 위치할 것이다.

그것은 마치 상실과 여적, 그 사이에 존재하는 강렬한 잔상, 존재의 흔적일지 모른다. 그의 작품이 상연되는 공간에 잠입한 우리 모두는 그런 흔적들이 투영되는 화면을 통해 고요한, 텅 빈 심연과 마주하게 된다. 그곳에서 음조를 조율한 현악기처럼 팽팽하게 당긴 ‘장막帳幕’, 모노 타입의 빛 세례와 먹먹한 어둠, 그리고 장막 뒤에서 펼쳐지는 몸짓이 하나의 풍경을 이룬 ‘나’의 세계와 조우한다. 아무것도 없는 이 공간의 통로를 넘어 서는 곳에 ‘너’와 ‘나’를 메우는 사이가 존재하는 것이다.

Reference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