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태준은 2013년부터 현재까지 시각 매체에 대한 다양한 탐색을 보여주는 사진 작품들을 발표해왔다. 그는 사진의 존재론부터 매체의 확장까지 사진에 대한 사유를 넓혀 나갔으며, 최근에는 디지털 환경에서 감각적 표현의 가능성을 모색하고 있다. ‘회한의 무게’부터 ‘미들턴’까지 사진의 작업 내용과 작업 방식 그리고 전시 스타일은 각기 다르지만, 거의 모든 시리즈를 관통하는 한 가지는 '돌'을 소재로 삼고 있다는 점이다.
윤태준의 작업에서 돌은 사진의 객관적 기록성을 대변하기도 하고, 사진 재현에 대한 진실성에 균열을 가하기도 하며, 디지털의 공간에서 현실과 가상을, 물질과 감각을 매개하기도 한다. 그리하여 여기에서는 윤태준의 '돌의 궤적을 중심으로 작업의 양상을 살펴보고, 사진적 여정을 따라가 보고자 한다.
윤태준의 2013~2014년 작 ‘회한의 무게’는 얼음이 녹고 있는 일상적 사물들을 기록한 사진 연작이다. 작가는 시계, 사진, 돌, 신발, 명찰, 일기장 등 과거의 특별한 기억, 의미 있는 경험을 떠올리게 하는 물건들을 얼렸다. 작가는 마치 사진이 지속하는 시간과 변모하는 공간의 한 단면을 절단해 평면의 프레임 안으로 고정하는 것처럼, 물질과 기억을 얼음 속으로 얼려 가두고 싶었다. 그리하여 돌이킬 수 없는 시간의 파괴로부터 그 경험을 안전하게 보호하고자 했다. 망각의 위기에서 그 기억을 지켜내고자 했다.
그러나 얼음은 무엇보다 불안전한 보존 장소였다. 결빙과 해빙을 거치며 사물의 형태는 변형, 변질되어 본래의 모습을 잃어버렸다. 시계는 멈췄고 사진은 변색되었으며 잉크가 번진 일기장은 더는 그 시간을 동일하게 회상해 줄 수 없었다. 시간이 팽창과 수축의 물리적 운동을 통해 물질에 변형을 가한 것처럼, 기억에도 영향을 끼쳤다.
기억 자체가 시간성을 포함하고 있기 때문이다. 기억은 발생한 시점과 그것을 불러오는 시점 사이에 발생되는 시간차 때문에, '변형, 치환, 전도 내지는 복구' 등의 기억 왜곡이 생기게 마련이다.
한 기억학자는 이것을 '활력의 기억'이라 말한다. 기억은 입력값과 출력값이 동일한 컴퓨터 파일이 아니므로 기계적으로 재생되지 않으며, 새롭게 생산되는 정신의 활동인 것이다. 작가가 진정으로 기록하고자 한 것은 이러한 기억의 불완전성이었다. 그는 기억이란 고정된 장면이나 시간이 아니라, 시간의 지속성 안에서 유동하는 것임을, 그것을 기록할 때 또 다른 의미가 생성되는 것임을 얼음의 유약함으로 보여주고자 한 것이다.
‘회한의 무게’는 시간이 지날수록 줄어드는 얼음의 무게 혹은 사물의 변형과 더불어 불완전한 기억과 시간에 대한 사유를 사진적인 방식으로 풀어내고 있다. ‘회한의 무게’는 카메라 앞의 대상을 기계적으로 재현한 사진이다.
사진으로 포착된 돌과 얼음 덩어리, 그리고 녹아 흐르는 물의 이미지는 프랑스의 철학가이자 비평가 롤랑 바르트(Roland Barthes, 1915-1980)가 명명한 '과거에 존재했음(ca-a-ete)'을 증언한다. 그러나 사진의 진실성에 대한 일반의 믿음은 어디에서 오는가? 사진의 가치는 어떻게 형성되는가? 윤태준은 사진의 증언적 지위에 의문을 제기한다.
2015년 작 〈북두칠낙〉은 사진의 진실성, 증언가치라는 개념에 대해 해체를 시도한 프로젝트이다. 작가는 박물관의 학예사나 고고학자 혹은 민족지학자의 역할을 수행했다. 우선 그는 문헌상으로 존재했다고 여겨진 인물 '낙씨'에 대한 자료들을 조사했다.
그다음 그에 대한 역사를 환기하는 유물들과 관련 서사를 사진으로 재현하고 이를 아카이브 형식으로 재구성했다. 〈낙씨의 탄생바위〉와 같이 화면의 중앙에 자리한 바위의 사진이나 일련번호가 매겨진 돌 조각 등은 고고학적인 맥락에 의해 전설의 장소 그리고 역사적 유물인 것으로 제시되었다.
미국의 문예평론가이자 사회운동가 수잔 손탁(Susan Sontag, 1933-2004)은 "사진을 찍는다는 것이 곧 대상을 중시한다는 것"임을 지적한 바 있다. 등록 번호가 붙은 돌 조각이 카메라 앞의 대상이 되어 사진으로 기록된 순간, 널린 자연물의 하나에 불과했던 돌 조각은 역사적 인물의 존재를 확증하는 특별한 가치를 부여받는다. 이러한 점을 손탁은 사진의 '고유한 경향'이라 말한다. 그렇지만 윤태준은 〈낙씨의 겨드랑이에 나 있는 깃털〉과 같이 허구의 이미지를 슬쩍 끼워 넣어 관람객의 믿음에 균열을 가한다.
작가는 사진이 대상을 재현하는 것과 그것이 어떤 가치를 가지게 되는가 혹은 무슨 의미를 전달하는가는 전혀 별개의 문제임을 지적하고 있다. 가상과 허구가 뒤섞인 사진의 재현을 통해 그는 보이는 것을 의심 없이 받아들이는 태도가 관습과 학습에 의해 의식화된 시각임을 인지시킨다. 이는 박물관이나 미술관 같은 제도권에서 사진이 수용되는 방식을 차용하며 어떻게 사진이 역사적 증거로서 가치가 부여되는지 또는 문화로 번역되는지를 역설적으로 보여준 것이다.
2017년 작 〈환상계단〉은 북서울시립미술관에서 열린 《2017 커뮤니티아트 안녕하세요》(17.4.4.-17.6.25)에 참여한 설치 작업이다. 〈환상계단〉은 추상의 존재를 현실의 이미지로, 물성을 가진 오브제로 치환시킨다. 윤태준은 허구를 현실 속으로 깊이 개입하게 만들어 실상과 허상이라는 상반된 개념의 경계를 보다 모호하게 더욱 불분명하게 만든다. 〈환상계단, 철거민〉은 망판 인쇄술로 출력한 것처럼 망점이 찍힌 이미지를 보여준다.
그 형체는 추상적인데, 서로 다른 크기의 망점들이 이미지를 드러낼 듯 감추고 보여줄 듯 은폐해 버리기 때문이다. 손탁에 따르면, 사진은 앞서 언급한 '고유의 경향' 때문에 내용과 상관없이 대상을 '우상화'한다. 사진의 미학적 경향은 대상을 아름다운 이미지'로 변질시킨다.
그리하여 사진에 나타난 고통이나 슬픔 등을 중화시켜 버린다. 그러나 작가는 망점의 장치를 통해 이미지를 모호하게 만들면서 사진의 '우상화'를 차단하고, 고통을 미화시켜 소비하는 사진의 미학적 경향을 경계한다. 한편 〈환상계단, 철거민〉은 비닐 용지로 출력하여 제작 방식에 변화를 주기도 했는데, 그는 이를 계기로 사진과 디지털 매체에 다양한 실험을 가하면서 현대적 시각을 모색하게 된다.
2019년 이후 윤태준의 사진적 관심은 디지털 기술과 사진의 융합으로 이행한다. 우선 작가에게 디지털 기술은 물질이 가진 본래의 성질, 정체성이라는 개념을 해체할 수 있게 하는 도구이다. 합성과 추출, 모방과 변형 등 가공이 자유로운 디지털 환경에서 세계에 존재하는 모든 개체가 가지는 원본성, 항구성, 불변성이라는 개념은 더는 유효하지 않으며 통용되지도 않는다.
그에게 물질세계는 시공간을 초월하는 것, 가변적인 것, 어떤 형상으로도 변화할 수 있고 어떤 성질과도 결합할 수 있으며 이를 통해 새로운 감각을 일깨우는 것이다. 정보통신혁명, 로봇, 인공지능 등으로 대변되는 기술 진화의 시대에 개체만의 독자적인 형상, 본질은 모조성, 가변성, 복제성에 자리를 내주었다. 〈낮고, 빠르게 쏘기〉 〈미들턴〉은 이러한 개념에 근거한다.
우선 작가가 선택한 돌을 사진으로 촬영하여, 데이터의 세계로 완전히 편입시킨다. 그리고 다양한 이미징 소프트웨어 프로그램들로 돌의 형상과 물성을 이질적이거나 상이한 개체로 탈바꿈시켜 돌이 가진 본래의 정체성을 전복시키고, 전혀 다른 시각적 산물로서 재구성한다. 작가에게 돌은 현실 세계를 대표하는 자연의 산물로서, 현실과 디지털, 물질과 감각이라는 두 이질적 영역을 매개하는 역할로 주어진다.
이러한 디지털 프로세스를 통해 작가는 현실의 사물과 그래픽 이미지 사이의 중간지점에서 시각의 창조적 가능성을 확장시킨다. 작가는 모든 것이 데이터화되는 가상의 시공간에 '인간적인 경험, 감각을 부여하고자 한 것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추상으로 변모한 이미지는 우리의 지각을 자극하는 세속적이고 자연적인 물질, 물성과 결합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구겨진 은박지, 필름, 암석이나 지질의 단면, 물, 거울, 알루미늄, 유리와도 같이 무게나 질감, 특정한 물성이 드러나는 것들이다.
이는 디지털 공간이 제거한 것이 개체의 외형, 형상, 정체성이나 원본성 뿐만이 아님을 역설한다. 디지털 기술이 데이터 세상을 확장할수록 함몰되는 것은 감각의 상실에 있다. 자연의 세계가 감각의 공간이라면 디지털 환경은 그 어원(손가락을 뜻하는 '디지트(digit))에서 알 수 있듯이, "클릭과 타이핑에 한정된" 세계이다. 이미지 속에 등장하는 손의 형상은 물질과 감각이 만나는 바로 그 지점을 상기시킨다. 허구의 공간이 팽창할수록 제한되는 것은 우리의 신체 경험, 감각임을 드러낸다.
윤태준의 '디지트' 이미지는 현실과 가상, 자연과 디지털, 물질과 정신이라는 상반된 두 영역을 보다 이질적이고, 환상적으로 결합해, 축소되고 제한된 우리의 감각, 신체성을 회복, 복구 혹은 재발견하고 있다. 현실에 기반한 사진 이미지와 완전히 숫자화 된 디지털 이미지, 그 중간지점을 가리키는 〈미들턴〉은 빛의 여정, 〈반딧불이〉(2021) 작업으로 '턴' 했다. 사진의 객관적 재현성을 넘어 디지털 프로세스를 통한 다양한 시각을 모색해온 작가의 다음 작업이 어느 지점을 향해 나아갈지, 우리의 경험, 감각을 활짝 열고 따라가 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