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한 주목할 만한 것은, 설령 애도가 삶의 정상적인 태도에서 심각하게 벗어난다
하더라도 결코 우리는 그것을 어떤 병리적인 상황으로 여기지 않으며 의사의 치료에 맡기지도 않는다는 사실이다. 우리는
어느 정도의 시간이 경과되면 애도가 극복될 것이라 기대하며, 애도를 방해하는 일은 부질없거나 심지어
해로운 것으로 간주한다.”
— 지그문트 프로이트, 「애도와 우울증」, 1915.
1. 안녕하세요
김민애가 “안녕하세요”라고 인사를 건넨다. 인사만을 건넨다. 이 간결한 인사는 전시의 제목이기도 하다. 이 인사말을 제외한다면
전시공간에 작가가 남겨둔 메시지는 작품들의 캡션뿐이다. 캡션으로 열거된 개별 작품들은 심지어 제목도
없다. 일련번호로 지시되는 각각의 작품들에 대해서 캡션은 그 재료와 크기만을 건조하고 정확하게 전달한다. 이것은 일종의 동어반복에 해당한다. 표기된 물질과 사물은 작품에
쓰인 재료와 어김없이 일대일 대응하며, 작품의 높이, 너비, 깊이는 캡션에 기재된 숫자와 틀림없이 일치한다. 이는 작품의 물리적
속성을 단지 문자와 숫자로 번역한 것일 뿐이므로 우리에게 어떤 새로운 의미를 전하는 메시지로 여겨지지 않는다. 어쩌면 1-1부터 5-1까지 이어지는 작품들의 일련번호가 전시의 구성 원리를
파악할 수 있게 해줄 암호일는지도 모른다.하지만 그걸 해독할 만한 추가적인 단서는 없다.장과 절의 번호만 남은 논문의 목차를 눈앞에 둔 것과 같은 당혹감을 피할 수 없다. 전시를 차분히 읽기 전에 우리가 기댈 수 있는 작가의 메시지는 오로지 “안녕하세요”라는 전시의 제목뿐이다. 누군가에게 건네는 짧은 인사.
사실상 인사는 아무런 내용도 전하지 않는다. 인사는 어떤 관계의 시작을 알리는
신호일 뿐, 그 관계의 내용을 전혀 규정하지 않는다. “안녕하세요”로
시작된 관계가 호혜와 우정으로 지속될지 파국과 재난으로 치닫을지 아무도 예측할 수 없다. 여전히 인사가
어떤 메시지일 수 있다면, 그것은 역설적이게도 내용이 없는 메시지, 텅
빈 메시지, 말하자면 ‘메시지의 영도(零度)’일 것이다. 그것은 새로운 관계를 맺기 위한 형식적 구조를 (재)확인하는 제스처와 같은 것이다.
관계의 내용을 채우기에 앞서 관계의 형식을 작도하는 구조적 인식의 순간인 것이다. 그런데
김민애는 누구에게 인사를 건네는 것일까? 누구와 새로운 관계를 꾸미기로 마음먹은 것일까? 작가가 그간 보여준 작업들을 생각해보면 그가 인사를 건네는 대상은 무엇보다도 미술관의 전시공간 자체일 것이다. 그는 지난 10년 동안 전시공간의 건축적 구조에 재치 있게 반응하여
그것을 노출하고 변형하는 조각적 방법론을 선보여 왔다. 전시를 담아낼 건축적 공간과 인사를 나누며 작업의
구상을 시작하는 것이다. 그러나 작가의 인사는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그가 전시공간의 구조에 반응하여 이에 기생하는 조각적 장치를 설치하면 애초의 전시공간의 구조가 어떤 변화를 겪게 되고, 작가는 그 변화된 구조를 새로운 초깃값으로 삼아 다시 “안녕하세요”라고 의뭉스레 인사를 건네며 또 다른 조각적
개입을 도모한다. 그가 캡션의 일련번호로 제시한 이 전시의 ‘목차’는 이렇게 중첩된 여러 차례의 “안녕하세요”에
나름의 질서를 부여한 결과일 것이다. 그러므로 여전히 이 전시에서 우리가 기댈 수 있는 작가의 메시지는
“안녕하세요”뿐이지만, 이 유일한 인사말은 또한 반복되고 중첩된 다수의 “안녕하세요”이기도 한 것이다.
2. 원고지와
모눈종이
태초에 “안녕하세요”가 있었다. 적어도 김민애의 세계는 그렇다. 그 세계는 무로부터 비롯된 것이 아니라 어떤 공간적인 초깃값의 설정에서 시작된 것이다. 그곳의 모든 공간은 간격 없이 존재할 수 없다. 예컨대, 그곳은 백지가 아니라 원고지이다. 우리는 아무런 글씨도 적혀 있지
않은 원고지를 텅 빈 원고지라고 부르지만, 사실 그 평면은 이미 몇백 개의 정방형 단위로 구획된 공간인
것이다.또는 그곳은 백지가 아니라 모눈종이다. 텅 빈 모눈종이는
아무런 도면이나 그래프가 없더라도 이미 밀리미터 단위로 촘촘히 나눠진 공간인 것이다. 김민애는 그의
첫 번째 개인전 《익명풍경》 (2008)에서 원고지에 글자가 적힌 칸을 까맣게 칠하거나 하얗게 도려낸
‘원고지 드로잉’ 연작을 선보인 바 있다. 내용을 감추거나 걷어내어 글쓰기가 전제하는 공간적 구조를 새삼 환기시킨 것이다. 다른 한편, 김민애의 2010년
작품 〈난문제〉는 렌즈의 자리에 거울과 모눈종이를 부착한 커다란 망원경이다. 확대된 사물을 보고자 하는
관객의 기대는 모눈종이와 대면하면서 배반당한다. 작가가 보여주려는 것은 특정한 사물의 확대된 형상이
아니라 관객이 임의의 사물을 지각하기에 앞서 전제해야 하는 공간의 격자이기 때문이다.
김민애에게는 미술관이라는 건축적 공간도 원고지나 모눈종이와 같은 것이다. 그가
전시를 실현하기에 앞서 인사를 건네는 미술관의 전시공간은 작품이 부재한다는 점에서는 텅 빈 공간이지만, 이미
특정한 방식으로 구획되어 있다는 점에서는 다수의 눈금과 격자로 가득한 공간이기 때문이다. 그곳의 벽과
바닥과 천장, 창과 문, 계단과 조명이 이루는 건축적 구조는
김민애가 작업을 구상하기에 앞서 통성명해야 하는 삼차원적인 ‘모눈종이’인 것이다. 작가가 가장 주목하는
부분은 지극히 기능적인 목적으로 설계된 건축적 요소들이다. 즉, 통로와
계단처럼 머무르는 곳이 아니라 지나가는 곳이 김민애의 관심을 더 끄는데, 그곳들이 전시공간 내에서 가장
간과되기 쉬운 요소들인 까닭이다. 작가는 공간을 구획하는 엄연한 요소들이지만 쉽사리 무시되는 사각지대를
눈여겨보는 것이다. 그것들은 의식적인 차원에서 잘 포착되지 않는 건축적 구조라는 점에서 인간의 감각과
운동을 무의식적으로 제한하고 인도하는 틀이다. 김민애는 〈화이트큐브를 위한 구조물〉(2012)에서는 전시공간의 모서리에 일종의 ‘보철’을 덧대고, 〈지붕발끝〉
(2011)에서는 천장의 구조물에 이와 유사한 ‘목발’을 괴이고, 〈블랙박스
조각〉(2014)에서는 미술관의 에스컬레이터에 기이한 ‘분신’을 깔아둔다. 이런 식으로 그는 건축적 공간의 무의식적인 틀에 기생하여 그것을 이상한 방식으로 연장하고 복제하는 작업을 해온
것이다.
원고지라는 글쓰기의 틀, 모눈종이라는 수학적 형상의 틀, 건축이라는 일상생활의 틀. 이와 같이 김민애의 작업은 다양한 수준의
틀에 대한 인식에서 비롯된다. 그 틀은 개인의 차원에서는 한 자아의 사고와 행동을 무의식적으로 규정하는
습관의 형태로 드러나고, 사회의 차원에서는 집단적 습관으로서 관습과 문화의 모습을 띠며, 미술의 차원에서는 미술관을 위시한 온갖 미학적 가치평가의 제도로 작용한다. 이처럼
주어진 틀에 개입하는 김민애의 작업은 개인의 습관, 사회의 관습, 미술의
제도를 눈앞에 드러내며, 그 반듯한 격자의 틈을 살짝 비틀어 반발의 제스처를 취하면서도 동시에 그 틀에
기생하며 타협의 자세를 가다듬는 자아의 이중성, 사회의 변증법, 아방가르드의
운명을 공간적 은유의 방식으로 보여준다.
3. 거울의
이면으로
김민애의 전시에 할당된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 2전시실의 일부는 그에게 최적의
장소로 보인다. 여느 미술관의 화이트큐브보다 훨씬 더 복잡한 ‘칸’과 ‘모눈’으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이다. 전시공간 한가운데 놓인 중간 벽이 그곳을 두 부분으로 분할하고 있고, 층고가
다른 그 두 부분을 중간 벽에 뚫린 세 개의 큼지막한 통로가 연결하고 있다. 게다가 중간 벽 안에는
미술관 위층으로 이어지는 계단까지 보인다. 이번 전시에서도 김민애가 처음으로 인사를 건네는 공간의 대상은
통로와 계단이다. 우선 그는 각 통로를 꼭 맞게 채울 수 있는 세개의 육면체를 제작해 마치 젠가에서
블록을 빼낸 것처럼 전시공간에 놓아둔다. 우리가 미술관 공간의 초깃값으로 무의식중에 전제한 세 개의
통로가 사실은 중간 벽으로부터 세 개의 육면체를 분리해냄으로써 만들어진 인위적인 결과임을 상기시키는 것이다. 또한
작가는 그 중간 벽 속에 위치한 계단에 주목한다. 미술관
위층에서 열리는 전시와 김민애의 전시를 서로 분리시키기 위해 한시적으로 폐쇄한 계단에 김민애는 레드 카펫을 깔아 차단된 계단을 어떤 행사의 참석자가
입장하는 환대의 장소로 탈바꿈시키며, 이 희한한 상황을 북돋는 것처럼 빌리 조엘의 노래 「더 스트레인저」(1977)를 틀어 놓는다. 더불어 계단을 감싼 벽면에는 내부의 계단과
평행한 사선으로 길쭉한 창문처럼 보이는 라이트박스를 설치한다.
전시공간에 반응하는 김민애의 방법론은 그 공간의 구조를 다양한 방식으로 반영하여 어떤 ‘분신’을 구상하는 데서 시작한다. 일종의 거울 효과를 의도하는 것인데, 물론 그 거울이 공간의 구획된
형상을 있는 그대로만 반영하는 것은 아니다. 사실 거울은 김민애의 작업에서 드물지 않게 등장하는 소재이다. 첫 번째 개인전에서 선보인 〈지속된 반사〉 (2008)를 시작으로, 앞에서 살펴본 〈난문제〉에서도 망원경의 렌즈가 있어야 할 자리에 거울이 등장하고, 이번 전시공간의 통로를 반영한 육면체에도 거울이 붙어 있다. 거울은
그 자체로 공간을 확장하고, 자기반영성을 표현하고, 실재와
가상을 맞세우는 장치로도 요긴하지만, 김민애의 작업에서 구사되는 거울 효과는 더욱 폭넓은 관점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거울 효과가 반드시 실제 거울을 필요로 하진 않는다. 이를테면, 김민애는 어떤 대상을 그것의 이미지와 대면시키되 특수한 방식으로 바꾸거나 뒤집은 이미지를 내세워서 독특한 거울
효과를 불러일으킨다. 부정적 공간으로 인식되는 허공의 통로를 실증적 육면체로 반전시키거나 계단의 살을
발라내어 그 뼈대만을 마치 창문처럼 바꾸어 되비추는 거울 효과를 구사하는 것이다. 그의 비범한 ‘거울’은
거푸집이기도 하고, 엑스선이기도 하다.
김민애의 세 번째 개인전 《검은, 분홍 공》(2014)은
관객을 거울의 이면으로 초대하는 전시라고 할 수 있다. 작가는 갤러리 공간 안에 반투명한 천으로 또
다른 건축적 공간을 가설하여 그 안에 이제는 공간적 맥락을 상실한 그의 이전 작업들을 가져다 놓는다. 내부에서
분홍색 조명이 회전함에 따라 작업들의 그림자가 반투명한 천에 맺힌다. 특이한 것은 이 가건물의 반투명한
외벽에 쓰인 전시명, 작가명, 전시기간과 “들어가지 마시오”라는
경고문이 모두 좌우가 반전되어 있다는 점이다. 즉, 그 외벽은
사물의 좌우를 반전시키는 거울로 마감된 것처럼 설정된 것이다. 그렇다면 “들어가지 마시오”라는 주의에도
불구하고 그 건축 공간 안으로 발을 내디딘 관객은 거울의 이면으로 입장한 셈이 된다. 그곳은 공간적
맥락을 상실한 김민애의 ‘기생 조각’이 버젓이 자립적인 행세를 하는 이상한 나라이다. 이렇듯 입장이
가능한 김민애의 상상의 거울은 외부 사물의 이미지가 아니라 거울 이면의 그림자를 투영하는 기이한 거울이다.
이번 전시 〈1. 안녕하세요 2. Hello〉에서도
그와 유사한 거울 효과를 볼 수 있다. 먼저, 계단의 사선과
평행하게 설치된 ‘창문’보다 더 깊숙한 공간의 벽에는 계단의 사선과 교차하는, 정확히 말하자면 그 사선의
좌우가 반전된 또 하나의 길쭉한 ‘창문’이 설치되어 있다. 서로 뒤집힌 두 사선의 ‘창문’ 사이에 자리한
관객은 무엇이 거울의 표면이고 무엇이 거울의 이면인지 알 수가 없다. 또한, 계단에 깔린 레드 카펫과 비슷한 너비의 검은 시트지가 전시공간의 한쪽 바닥에 비스듬히 내뻗어 전시된 작업의
벽면까지 기어오른다. 마치 레드 카펫의 그림자가 정체 모를 거울에 반사되어 엉뚱한 자리에 비뚠 각도로
드리운 것과 같은 모습이다. 끝으로, 김민애가 전시공간의
통로에 대한 반응으로 제작한 육면체에 달린 손잡이도 언급할 수 있다.전시장 말단의 한쪽 구석을 보면
그 손잡이와 똑같은 또 하나의 손잡이가 맞은편 벽에 나란히 붙어 있어서 마치 거울로 서로를 비추는 것처럼 대칭을 이루고 있다. 육면체의 외벽에 붙어 있는 손잡이와 전시공간의 내벽에 붙어 있는 손잡이가 서로를 반영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거울 효과로 사물과 공간의 위계가 반전되고 관객의 지각에 전제된 좌표축이 교란된다.
건축의 차원에서 김민애가 보다 주목하는 요소가 통로와 계단이라면, 사물의 차원에서
그의 눈길이 더 각별히 가닿는 대상은 바퀴와 손잡이다.그것들은 모두 목적이 아니라 수단으로 존재하는
것들이다. 계단과 통로가 출발지도 목적지도 아니라 이동의 경로로만 소비되는 것과 마찬가지로, 바퀴와 손잡이는 그것들이 움직이게 만드는 또 다른 사물들을 위한 수단일 뿐 그 자체가 목적으로 인식되지 않는
것들이다. 역시 그것들도 원고지의 칸과 같은 것이고, 모눈종이의
눈금과 같은 것이다. 김민애는 이 사물들이 도구로 작동하지 않는 어긋난 환경을 상상함으로써 그것들을
비가시성의 영역에서 끄집어낸다. 쓸모없는 도구, 목적 없는
수단을 지각하게 만드는 것이다. 이번 전시에 선보인 세 개의 육면체에도 바퀴와 손잡이가 달려 있지만,굴릴 게 없는 바퀴와 옮길 게 없는 손잡이는 아무런 쓸모가 없다.전시장의
벽에 달린 손잡이는 말할 것도 없다. 그의 이런 방법론은 그 연원이 깊다.사물을 확대하지 않는 망원경,건물의 하중을 지탱하지 않는 기둥,허공에 떠 헛도는 바퀴,열리지 않는 창문과 드나들 수 없는 문,내려가지도 올라가지도 못하는 계단 등의 장치들이 김민애의 그간의 작업들에 즐비하다.
그중 많은 장치들이 이번 전시에도 어김없이 활용된다. 그의 쓸모없는 바퀴는 늘
그렇듯이 붉은색이고, 육면체에는 창문과 문의 실루엣만이 음각되어 있고,
잡아도 소용없는 손잡이가 군데군데 놓여 있으며, 레드 카펫과 그 그림자는 우리를 어디로도
인도하지 않는다. 그의 이런 자기 복제, 자기 회고는 그가
건네는 인사의 대상이 그가 마주한 전시공간일 뿐만 아니라 자기 자신이기도 하다는 것을 방증한다. 김민애는
주어진 공간에 반응하여 그 틀을 가시화하는 자기의 방법론을 노골적으로 반복하면서 자신의 정체성을 끊임없이 재고하고 또 확인한다. 자기 작업의 의도적인 유사성을 경유하여 자신의 이미지와 마주하고 인사하는 나르시시즘적인 거울 효과를 불러일으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나르시시즘적인 장치가 자폐적인 데까지 나아가지 않는 이유는 그가 거울을 통해 인사하려는 대상이 그의 고립된
심리적 자아가 아니라 작가라는 제도적 정체성이기 때문이다. 김민애는 ‘작가’와 ‘작품’의 가능조건을
성찰하는 것이다. 이번 전시에서 그 성찰의 일원으로 소환된 이는 아이 웨이웨이다. 김민애의 전시 〈1. 안녕하세요
2. Hello〉가 열리기 전에 이 전시공간은 《낯선 전쟁》이라는 기획전에 할애되어 있었다. 전쟁에
관한 그 전시에 참여한 아이 웨이웨이의 출품작 〈폭탄〉의 일부가 말끔히 철거되지 않고 김민애의 전시에 약간의 흔적을 남기고 있다.전시공간 맨 안쪽 벽의 좌측 상단에 폭탄의 이미지 일부가 찢긴 채로 남아 있는 것이다. 김민애는 전쟁이라는 전시 주제의 맥락에서 이탈된 그 이차원적 이미지를 삼차원의 조각으로 복구하여 전시공간 한가운데
배치한다. 그의 거울 놀이에 아이 웨이웨이를 동참시키는 것이다. 이와
같이 전쟁이라는 전시 주제의 맥락에서 분리된 중국 작가의 작업을 자신의 작업으로 전유하면서 김민애는 ‘기생 조각’이라는 자신의 방법론을 보편적인
관점에서 성찰한다. 제도적 틀에 의존하지 않는 작가의 독창성이란 가능한가? 작품이 공간적 맥락과 분리되어 자립할 수 있는가? 온전히 자율적인
작품이 존재할 수 있는가?
4. 애도의
인사
이 전시 〈1. 안녕하세요 2. Hello〉는
얼핏 김민애가 스스로 기획한 김민애의 회고전처럼 보인다. 주어진 전시공간에 반응하여 그곳에 기생하는
조각을 설치하는 그의 갖가지 방법론이 이번 전시에 직간접적으로 동원되었기 때문이다. 쓸모를 상실한 바퀴와
손잡이를 활용하는 것, 공간을 침범하고 교란하는 카펫과 거울을 배치하는 것, 동일한 전시공간에서 직전에 열린 전시의 흔적을 도입하는 것 등의 방법론은 작가가 이미 여러 다른 공간에서 선보인
바 있는 것들이다.이와 같은 자기 반복과 자기 회고는 그저 김민애의 나르시시즘을 드러내는 징후가 아니라
오히려 그것에서 벗어나려는 시도로 이해되어야 한다. 즉, 그가
지금까지 구축해온 방법론을 긍정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회의하기 위한 되새김질에 가까운 것이다. 재회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작별하기 위한 역설적인 ‘회고전’인 것이다.
“안녕하세요”는 분명히 만남의 인사지만 그 배후에는 작별이 전제되어 있다. 작별은
만남의 그림자와 같다. 누군가와 작별하지 않으면 다른 누군가와 만날 수 없다. 거울의 이편에서 만남의 인사가 이루어질 때 거울의 저편에서는 작별의 인사가 건네진다. 전시공간에 놓인 세 개의 육면체 중 하나는 다른 두 개의 육면체와는 조금 다른 모습을 띠고 있다. 육면체의 한쪽 면을 마치 어떤 제단의 정면처럼 조형한 것이다. 게다가
그 육면체 위에는 방수 커버를 뒤집어쓴 기러기 세 마리의 형상이 있다.제단이라는 모티프와 생명체를 천으로
덮는 행위는 모두 죽음을 함의한다.또한 이 육면체의 규모와 윤곽은 오귀스트 로댕의 〈지옥의 문〉(1880–1917)을 참조한 것처럼 보이기도 하며, 작가가 아이 웨이웨이의 시트지 이미지를 본떠 만든 폭탄의 수직적 형상들은 죽음의 기념비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리고 작가는 이번 전시가 올해의 작가상이라는 수상 제도의 일환이라는 것에 착안하여 아무것도 기념하지 않는
공허한 트로피를 크리스털로 제작해 수직의 좌대 위에 올려놓는다. 수상 제도의 텅 빈 틀을 형상화한 이
트로피도 역시 어떤 열정의 결말, 어떤 시기가 종료된 후 남겨진 마침표와 같은 것이다.
이런 죽음과 작별의 기원을 알기 위해서는 우리는 ‘장례식’의 한 장면으로 되돌아가야 한다.
그것은 앞에서도 언급했던 작가의 세 번째 개인전 《검은, 분홍 공》이다. 김민애는 2018년의 어떤 인터뷰에서 이 전시를 떠올리며 “그동안
했던 소위 ‘장소특정적’인 작품들에게 그들만의 공간을 주고 장례를 치러주자는” 생각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말한다.1 장소의
맥락에서 벗어나는 순간 그 의미를 잃게 되는 자기의 기생 조각들을 거울의 이면에 묻어준 것이다. 어째서
작가는 자신의 작업들과 작별하기로 한 것일까? 그건 아마도 장소특정적 조각이 지니는 불가피한 허무주의, 즉 장소의 맥락에서 벗어나 홀로 설 수 없는 의존성 때문일 것이다. 미술의
자율성이라는 모더니즘적 테제에 반대하는 포스트모더니즘의 반응적이고 부정적인 성격에 필연적으로 내재한 허무주의가 이 장례식에서 낭독된 조사(弔詞)일 것이다. 조각가의
근본적인 충동이 무언가를 일으켜 세우려는 것이라면, 김민애 역시 한 명의 조각가로서 단순히 모더니즘으로
회귀하지 않으면서도 어떤 자립적인 조각을 실현해 보려는 의지를 내세울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장례식은 작별의 끝이 아니라 작별의 시작이다. 또는 정신분석학적인 의미에서
애도 작업의 시작인 것이다. 상실된 애착의 대상으로부터 자아가 온전히 분리될 때까지 애도 작업은 끝나지
않는다. 작별과 작별할 때에야 비로소 작별은 끝나는 것이다. 그리하여
김민애의 긴 애도 작업이 시작되어 이번 전시까지 이어지는 것이다. 즉 김민애의 “안녕하세요”는 또한
애도의 인사이기도 한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이 전시는 전망하기 위해 회고하는 역설적인 ‘회고전’이며, 이곳의 수직적 오브제들은 잊기 위해 기념하는 모순적인 ‘기념비’이다.
5.공
회고와 전망, 망각과 기억을 오가는 김민애의 애도 작업은 전시공간에 반응하는
장소특정적 방법론을 반복하는 동시에 그 공간으로부터 자립적인 무언가를 세우려는 충동을 실험하는 이중적인 양상으로 진행된다. 이번 전시에 유독 여럿 보이는 수직적 오브제들은 아마도 후자의 조각적 충동이 반영된 결과일 것이다. 아이 웨이웨이의 작업에 대한 반응으로 만든 두 폭탄의 수직적 형상 옆에 김민애는 비슷한 크기의 펜의 형상을
세워 놓는다. 생뚱맞은 펜의 형상을 그것과 형태적으로 유사한 폭탄의 형상과 병치함으로써 장소의 맥락에
의존하는 작업과 그로부터 독립적인 작업 사이의 간극을 가늠해보는 것이다. 그 옆에는 삐죽삐죽한 모서리를
지닌 또 다른 오브제가 보인다. 그 안에 모래가 담겨 있어서 커다란 화분인가 싶기도 한데, 이 역시도 전시공간의 장소적 맥락과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는 것인지 알 수 없다. 과연 이것들이 이 전시공간을 벗어나서도 생명력을 유지할 수 있을지도 현재로서는 알 수 없다.
이 모든 애도의 시작은 검은, 분홍 공이다. 김민애가
치른 ‘장례식’의 제목이기도 한 검은, 분홍 공은 사실 그가 2013년
런던에서 연 개인전 때 즉흥적으로 전시공간에 가져다 놓은 풍선들이었다. 장소의 맥락에 온전히 부합하지
않는, 그렇다고 자립적이고 독창적인 오브제로 볼 수도 없는, 이
애매한 공들이 김민애의 애도 작업을 촉발시킨 것이다. 장소특정적 작업의 허무주의와 자율적인 작업의 이상주의
사이의 스펙트럼을 펼쳐낸 것이다. 이번 전시에서는 여러 의자들이 마치 검은 공처럼 보인다. 등받이도 팔걸이도 없이 공처럼 둥근 좌석만 있는 의자들이 전시장 이곳저곳에 펼쳐 있거나 접혀 있다.또는 이 검은 원들은 큼지막한 마침표로 보이기도 한다. 애도 작업이란
작별에 마침표를 찍는 과정이다. 김민애는 기생하는 조각과의 작별을 끝내기 위해 여러 차례 마침표를 찍는다. 그러다가 그 한 무리의 마침표는 일순간 말줄임표로 변하게 된다. 김민애는
이 유예의 말줄임표 속에서 당분간 애도를 끝내지 않을 것이다. 그곳에서 건축적 구조, 개인의 습관, 사회의 관습, 미술의
제도에 끊임없이 기생하면서, 동시에 무언가 자립적이고 독창적인 것을 세울 수 있는 가능성을 타진할 것이다. 그것은 모더니즘과 포스트모더니즘을 모두 경유한 작가와 작품의 가능조건을 끊임없이 되묻는 과정일 것이다.
1 『포인트
카운터 포인트』 전시도록 (서울:아트선재센터,2018),6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