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제목에 걸맞은 몇 안 되는 책 중 하나인 『한국현대조각사 연구』는 “조각이란
저 홀로 존재할 수 있는 하나의 사물이다”라는 라이너 마리아 릴케의 문장으로 시작한다.1 이 인용된 문장은 근대 조각의 전통과 20세기 한국의 역사적 조건
사이에서 태동할 수 있었을 어떤 특수하면서도 보편적인 조각에 대한 열망을 함축한다. 또한 그것은 한국
미술의 정체성에서 조각의 본질에 이르기까지 지난 세기에 열렬히 탐구되었던 주제들이 불현듯 그 인력을 상실한 듯한 새로운 세기 앞에서 스스로 조각의
견고한 현존에 상응하는 어떤 자명한 선언으로 성립하고자 한다. 하지만 이 선언은 ‘그림은 그림이다’와 같은 자기 동일성에 도달하지 못한다. 회화가 그것을 그리는 손과 보는 눈 사이를 매개한다는 엄밀한 의미에서 매체로 주어지는 데 반해, 조각은 “저 홀로 존재할 수 있는 하나의 사물”을 형성해야 한다는 수수께끼 같은 과제로 상정된다. 우리가 이 오래된
스핑크스의 질문에 답해야 할 이유가 있는가?2 이 질문은 다시 둘로 분기한다.이제와서 굳이 조각을 열망해야 하나? 또는, 어째서 조각에 대한 열망만으로는 부족한가? 첫 번째 질문의 주체는
스핑크스를 피해서 다른 길로 가고, 두 번째 질문의 주체는 스스로 스핑크스의 형상을 빚는다.
김민애는 둘 중 어느 쪽도 택하지 않았다. 그에게 조각은 존재하지 않기에 퇴치할
수도 없는 유령과 같다. 그것은 역설적으로 묶인 매듭이다. 다른
사물들과 마찬가지로 공간을 점유하지만 그와 확연히 구별되는 자족적이고 자립적인 사물이라는 조각의 조건을 충족하는 가장 손쉬운 방법은 아마도 인간의
몸을 가져다 놓는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우리와 같으면서도 달라야 한다. 여러 가지 의미로 우리의 것이 아닌, 우리의 바깥에 있는 몸을 발견하는
것은 조각의 반복되는 주제이다. 조각의 범주가 인간의 몸에 대한 우리 자신의 불안과 환상, 호기심, 욕망과 혐오를 객체화하는 계기를 제공한다는 점은 그것이
거듭해서 돌아오는 이유를 부분적으로 설명한다. 그러나 김민애를 움직이는 것은 인간과 사물 간의 진동보다는
그런 인간의 불안정성에 휘말려 자기 자신이 아니게 된 사물 자체의 불안정성이다. 조각의 이념은 보통의
사물들을 조각적 속성이 결핍된 것으로 재정의하고 스스로 조각이라고 주장하는 사물들을 초조한 심판의 시간에 들게 한다. 나는 무엇이 되어야 했는가? 나는 달리 무엇이 될 수 있었나? 김민애는 이 같은 사물들의 실존적 질문을 연극적으로 상연하면서 조각을 우화적 대상으로 변모시킨다.
‘…같지만 아닌’ 것들의 극장
우화는 문자 그대로의 내용과 다른 의미를 포함하는 텍스트이며 하나를 말하면서 다른 하나를 말하는 비약의 연쇄다. 조각이 우화적 대상이 된다는 것은 그것이 자기 처지를 이야기하는 것 같다고 해서 그대로 받아들일 필요는 없다는
뜻이다. 실제로 김민애의 작업은 대부분 이미 존재하는 것을 변조하거나 흉내 내서 이상하게 조립한 집합체로서
적극적으로 ‘나는 달리 무엇이 될 수 있었나’라는 질문에
응답한다. 그러나 이 사물들은 ‘나는 무엇이 되어야 했는가’라는 질문을 잊지 않고 그들 자신과 그들이 점유한 공간, 그리고 그곳에
들어온 사람들에게 되돌려주며, 그런 수수께끼 풀이의 반복 속에서 역설적으로 탈바꿈의 계기를 발견한다. 이렇게 확장되는 조각의 장은 어떤 합리적 체계나 필연적 진화로 귀결되기보다 일련의 사물들로 이루어진 하나의
유랑 극단처럼 나타난다. 이들은 인간 형태로 한정되지 않기에 상황에 따른 재조합이 용이하며 배우에서
무대 세트와 소품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역할을 소화할 수 있다. 그렇지만 이들의 극장은 어떤 식으로든
전시가 이뤄지는 장소 또는 미술이 요구되는 맥락에 반응하여 구축되기 때문에 장소를 옮길 때마다 부서지고 다시 지어지기를 반복하고, 그 과정에서 사물들은 사실상 일회용품처럼 소모된다.
김민애의 조각적 극장을 가동하는 것은 이런 사물들의 꿈과 정념이다. 《검은, 분홍 공》 (2014)에서 그가 이전의 전시에서 사용했거나 제작한
물건들은 흡사 코끼리 무덤처럼, 또는 그 무덤의 발굴 현장처럼 천막에 둘러싸여 있었다. 그 사이에서 빙글빙글 돌아가는 분홍색 조명은 무거운 몸체를 내려놓은 사물들의 혼백 같기도 했고 그들이 선을
넘지 않도록 감시하는 초소의 불빛 같기도 했다.사물들을 드러내 보이는 동시에 그것들의 흐릿한 환영을
불러일으키는 분홍의 도깨비불은 “들어가지 마시오”라고 적힌
천막의 안과 밖 사이에서 어디에 눈과 발을 둬야 할지 몰라 허둥대는 관객을 무심하게 비췄다.그러나 관객이
의미불명의 빛 앞에서 무엇이 이 전시를 보는 올바른 시점인지 망설일 때, 우리는 이미 전시장에서 취해야
할 올바른 자세를 고민하다가 탈진해 버린 사물들의 극장 안에 들어와 있었다. 천막과 조명은 전시 공간을
극장과 그 이면으로 분할하는 것이 아니라 전시장처럼 보이지만 그와 미묘하게 구별되는 어떤 거울 저편의 공간을 생성했다. 여기서 사물들은 각자에게 할당된 위치와 역할을 거부함으로써 전시를 유보했다.
아직 준비가 덜 된 것처럼 또는 너무 예전에 준비가 되었던 것처럼, 이들은 잘못된 시간에
찾아온 관객을 무관심하게 응대했다.
공간 안에 수동적으로 놓여서 다른 사물들과 비교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위치하는 공간을 선택적으로 개조하고, 그럼으로써 일반적인 사물의 질서와 공간의 질서 양쪽 모두에 거리를 두려는 것은 김민애의 사물들이 가진 공통의
지향이다. 이들은 사물과 공간의 틈새로 움직이는 준 건축적 퍼포머가 되어 조각의 퇴로 또는 의외의 공격로를
그려 보이려 한다.하지만 이 사물들이 물리적으로 움직이는 경우는 거의 없다. 김민애의 작업에서 키네틱 장치가 쓰이는 경우는 빛을 움직일 때가 유일한데, 그
비물질적 움직임은 사물들의 불활성을 강조하면서 무언의 압력을 가한다. 〈기러기〉(2018)에서 천장에 설치된 회전식 조명은 사물들이 사라지고 퍼덕이는 날갯짓 소리만 남은 전시장을 비추고 있었다. 행방불명된 사물들을 기리는 것처럼 전시장 벽면을 따라 돋을새김 된 뚱뚱한 새들의 이미지는 조금이라도 움직여야
할 것 같으면서도 그럴 리가 없었다. 이렇게 자기가 아닌 것, 자기보다
높은 것으로 이행하려는 거의 가망 없는 꿈은 김민애의 극장이 상연하는 주요 레퍼토리다. 그래서 이들의
정지된 액션은 진지한 표정의 슬랩스틱 코미디에 가까워진다. 열쇠 구멍을 찾지 못해서 여기저기 열쇠를
꽂아 보지만 사실은 손에 들고 있는 것이 열쇠도 아닌 희극 배우처럼, 사물들은 미술이 있어야 할 자리를
심각하게 검토하면서 계속 헛다리를 짚는다.
이 같은 사물들의 몸짓은 무대 뒤에서 이들을 부리는 미술가의 모습과 어쩔 수 없이 겹쳐 보인다. 그러나 이들은 의인화된 사물이 아니며, 굳이 말하자면 인간의 이념과
닮지 않음으로써 우리를 닮는다. 김민애의 공간에서 출몰하는 것은 자기를 표현하는 얼굴을 가진 몸체들이
아니라 주어진 공간 자체를 몸통으로 삼는 부분적인 대상들, 이를테면 목발 같은 것이다. 실제로 김민애는 세 개의 목발을 하나로 엮은 모양의 목재 구조물을 만들고 〈자립 조각〉 (2012)이라고 명명한 적이 있었다. 목발은 홀로 설 수 없는 가짜
다리다. 그것들은 서로를 떠받치며 자립적인 구조체가 되지만 그럼으로써 움직임을 보조하는 원래의 기능을
상실하고 자기를 기리는 앙상한 기념비가 되고 만다. 목발은 자립성 있는 건실한 사물이 되기 위해 테이블,기둥,좌대,심지어 대걸레로
모습을 바꿔 보지만 섣부른 갱생의 시도는 그 쓸모 없음을 더욱 강화할 뿐이다. 조각적으로 결함 있는
사물들은 올바른 상태로 이행하는 법을 연구하다가 종종 옴짝달싹 못 하게 된다. 목발은 발 대신 바퀴를
달고 멋지게 넘어져서 웃음을 유발하고, 다음 장면에서는 넘어지지 않게 또 다른 목발을 짚고 나타남으로써
심지어 웃기지도 않게 된다.
역사가 미래가 될 때
일상용품의 도덕과 조각의 규범, 교통 법규와 건축적 합리성 중에서 어느 하나도
제대로 준수하지 않는 사물들의 극장은 어디로 나아갈 수 있을까? 하나의 임박한 가능성은 역사가 되는
것이다. 그것은 지루할 만큼 자명하게 들리지만 의외로 잘 보이지 않는 미래이다. 기억의 총체로서 자기를 보존하여 도래할 시간으로 던져 넣으려면 어떤 교통 수단이 필요하며 그것은 우리를 어디로
인도하는가? 〈바퀴로 움직이는 조각〉(2018)은 그에 대한
하나의 답변이다. 조각의 이념을 중심으로 불규칙하게 공전해온 사물들의 궤도를 각인한 일종의 자기 기념비로서, 이 작업은 전시장의 네 모서리를 떠받치거나 그에 기대는 자세로만 설 수 있는 바퀴 달린 목발들을 〈화이트큐브를
위한 구조물〉(2012)로 제시했던 과거의 작업에서 파생되었다. 김민애는
이 불완전한 외다리들이 서로 기대어 자립할 수 있도록 열십자 모양의 보철물을 새로 제작하고 그것을 장착한 모습을 투명한 플라스틱으로 재구성했다. 원 구조물은 흐릿한 형상으로 남고 빨간색 바퀴만 제 기능을 보존하여,이제
그것은 어디에나 녹아들 수 있고 여차하면 도망갈 수 있는 은밀하고 기동성 있는 사물로 변형되었다.
그렇지만 이는 애초에 미술관 소장품을 원작자가 직접 재해석하여 새롭게 설치해 보는 전시 프로그램의 일환으로 제작된 것이었다.3 원 작업은 이미 정부 차원에서 관리되는 역사의 일부가 되어 수장고에 보관되어 있었다. 어떤 면에서 김민애는 잠시 돌려받은 그 물건을 플라스틱으로 본떠서 바깥으로 빼돌린 셈이었지만, 이 물질화된 잔상은 그 사이에 또 늘어난 기억을 문신처럼 새기고 지금 다시 미술관에 돌아와 있다. 김민애에게 주어진 올해의 작가상 전시 공간의 오른쪽 진입로를 살짝 가로막듯이 서 있는 이름 없는 사물이 그것이다. 전시를 이루는 사물들은 모두 각자의 이름을 지우고 하나의 집단 또는 극단으로서 “안녕하세요”라는 인사를 돌림노래처럼 반복한다. 이들은 주어진 공간을 반영하고 서로를 굴절시키면서 현재 전시의 장소이자 하나의 영묘로서 미술관이 가진 중력에
대항한다. 전시가 설치된 곳은 지상층과 지하층 간의 계단실을 둘러싼 공간으로, 공교롭게도 지금은 상층부에서 열리는 소장품 전시 때문에 통행이 제한되어 있다.
김민애는 이 막다른 골목을 중간에서 끊어진 레드카펫과 어딘가 음흉하게 들리는 옛날 노래로 장식했다.
이렇게 퇴로가 차단된 곳에서 사물들의 연극이 재개된다.
먼저 무용지물이 된 계단실에서 떨어져 나온 세 개의 직육면체가 있다. 이들은
계단실을 관통하는 세 개의 진입로를 그대로 본뜬 것으로,미술관을 이루는 건축적 공간의 실물 크기 표본이자
그 공간을 변경할 수 있는 추가적인 구성요소로 작용한다. 실제로 사용할 수 있을 것 같지 않은 손잡이와
바퀴를 달고 자신이 이동식 장치임을 주장하는 이 커다란 직육면체들은 거울 또는 백색의 표면으로 주변을 가리거나 반사하면서 관객을 혼란에 빠뜨린다. 하지만 그 방해 공작은 미술관이 자연스럽게 부과하는 시선과 동선의 통제를 교란함으로써 보여야 하는 것과 보일
필요가 없는 것을 구별하는 비가시적 경계를 일시적으로 무력화한다. 이렇게 개조된 공간에 또 다른 사물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들어온다. 전시물인지 아니면 전시를 보조하거나 방해하는 물건인지 종잡을 수 없는
것들,대체로 무언가 흉내 내는 것 같지만 그에 동일시하지 않는 광대 같은 것들이 무대 위에 선다.이들이 어떤 정해진 각본을 상연하는 것 같지는 않다. 그러나 세 개의
직육면체를 중심으로 느슨하게 묶이는 사물들의 집합을 각각 연극의 막처럼 분석하는 것은 가능해 보인다.
이를테면 한밤중에 스크루지의 침실에 나타나 그의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한 장면씩 보여주는 크리스마스의 세 유령들처럼, 전시장의 사물들은 제각기 그들에게 일어났거나 일어날 수 있었을 상황들을 연기하고 있다. 그것은 미술의 역사와는 조금 다른 의미에서 미술관을 목적지로 하는 사물들이 공유하는 집합적 기억의 단편들이다. 중요한 것은 어떤 사물에게 어떤 일이 일어났다는 사실보다도 그런 패턴이 반복된다는 것이다. 사물들은 이 같은 기억을 다시 한번 반복하면서 어떤 조건에서 반복이 유발되며 그 과정에서 반복되지 않는 무엇이
나타나고 또 사라지는지 살핀다. 나는 어떻게 만들어졌는가, 나는
무엇과 같고 또 다른가, 나는 무엇이 되어야 하는가, 사물들은
질문한다. 그리고 이런 질문들을 통해 사물들은 절박하게 자기를 과시하는 경쟁적 관계에서 공통의 운명을
탐색하는 협력적 관계로 이행한다. 그 끝에 조각이 있다면, 그것은
맹목적으로 추구되거나 폐기되어야 하는 이상이 아니라 예기치 못한 것들의 부활을 유도하는 하나의 촉매로서 유효하다.
지옥을 뒤집기
계단실로 이어지는 왼쪽 진입로로 들어가면 첫 번째 직육면체가 나타난다. 레드카펫을
흉내 낸 회색 시트지의 장식띠를 늘어뜨리고 유광 페인트로 그린 광채를 두른 이 높다란 상자는 브러시가 아직 그대로 꽂혀 있는 한 쌍의 페인트 통을
거느리고 있다.그것은 자신이 전시용 가벽이나 좌대와 같은 방식으로 제작된 합판 구조물임을 보여주면서
미술관 내에 존재하지만 전시물로 간주되지 않는 수많은 사물들을 상기시킨다. 하지만 그 자체는 좌대로
쓰이기엔 너무 높고 가벽으로 쓰이기엔 너무 두껍다. 자신의 실용성을 스스로 부정하는 이 비대한 덩치는
미술관의 크고 높은 공간에 맞추어 자신을 키운 결과이다. 그것은 이 전시실 내에서 제작되었을 것이고
전시가 끝나면 아마도 같은 자리에서 해체되어 나갈 것이다. 재제작이 용이한 자기 자신의 기념비로서 그것은
자신을 가시화하는 데 성공하지만 자신을 구제하지는 못하며, 그럼으로써 부서지기 위해 만들어지는 전시용
사물들의 무상한 위령비가 된다.
계단실 아래로 지나가는 중앙 진입로 근처에는 두 번째 직육면체와 그 파생물들이 흩어져 있다. 거의 입방체에 가까운 이 구조물은 자신이 조그만 원룸 주택과 거의 같은 크기임을 알리기 위해 문과 창문의 윤곽을
얕게 새기고 있다. 그것은 사람의 몸에 비교하면 상당히 크지만 미술관 전시실의 높은 천장 아래에서는
그렇게 커 보이지 않는다. 미술관의 규모가 일반적인 거주 공간과 차이가 있음을 보여주는 즉각적인 척도로서
이 주택 모양의 화이트큐브는 이곳의 사물들이 눈에 보이는 것보다 크다는 사실을 주지시킨다. 그것은 좌석이
있는 낮은 연단과 인조 잔디밭으로 모습을 바꾸면서 만약 자신이 점유한 공간이 좀 더 현실적으로 활용된다면 무엇이 될 수 있을지 상상한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 공간은 실제로 여러 사람이 함께 이야기를 나누거나 스포츠를 즐기는 공공 공간이 되기에는
조금 좁아 보인다. 미술과 현실 사이에서 상대적인 크기의 감각은 계속 뒤바뀐다. 미술가의 선량한 사물들은 집에 들어가기에는 너무 크고 세상을 바꾸기에는 너무 작다. 결국 이들은 자기가 아닌 무엇인가를 가리키는 물질화된 기호로 남는다.
마지막으로 오른쪽 진입로의 연장선에서 가장 크고 위압적으로 보이는 세 번째 직육면체가 있다. 잿빛 천으로 감싼 형체들을 짊어지고 장식용 몰딩을 두른 그 모습은 제막식을 앞둔 조각상의 좌대처럼 보인다. 천 아래 숨겨진 것 또는 느슨하게 걸쳐진 천을 통해 나타나는 것은 세 마리 새의 형상이다. 각기 다른 방향으로 날아오를 듯한 자세를 취하고 있지만 설령 천이 벗겨지는 순간이 온다고 해도 이들이 정말로
날아갈 일은 없다.그것은 날 수 없는 기러기를 위한 제단으로서 전시장 맞은편에 놓인 투명한 독수리 트로피와
호응하여 무제한으로 복제되는 예술과 권력의 상징들, 이를테면 마르셀 브로타에스의 〈현대미술관, 독수리분과〉(1968–1972)를 성립시켰던 미술의 자기 재현을
반복한다. 그러나 상징 이전에 하나의 이미지로 접근하면 높은 단 위에서 주위를 둘러보는 세 마리의 날
수 없는 새들은 오귀스트 로댕의 〈지옥의 문〉(1880–1917)에서 고개를 떨어뜨린 세 망령들의 또
다른 버전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들은 다른 세계로의 입구 위에서 춤추지만 그 입구는 열리지도 닫히지도
않는 것,애초에 문이 아닌 한 덩어리의 사물로서 존재한다.
알렌카 주판치치는 무한함에 다다를 수 없지만 자신의 유한함에 만족하지도 못하는 인간의 조건에 대항하는 두 가지 상반된 전략으로
비극과 희극을 설명한 적이 있다. 그에 따르면 비극은 해소될 수 없는 불만족한 간격을 고통스러운 자기
파괴로 내재화하는 반면, 희극은 파괴 불가능한 인간의 허영심을 외재화함으로써 삶을 지속한다.4 자신이 마땅히 되어야 하는 것이 되지 못한 자들은 지옥에 간다. 이곳은
지옥인가? 기러기는 묻는다. 기러기는 자신의 이상을 추구하다가
불가피하게 실패하는 비극적 주체로서 불멸하는가 아니면 불가능한 차원 이동을 마치 달성한 것처럼 으스대는 희극적 대상으로서 박멸되지 않는가? 관객은 묻는다. 기러기에게 바쳐진 제단은 열리지 않는 문 대신에
커다란 거울을 달고 전시장을 비춘다. 거울 너머의 공간에는 이곳의 지난 전시와 작가의 지난 작업들에서
파생된 비논리적인 이미지들의 연쇄가 비쳐 보인다. 운 좋게 날씨가 맑고 전염병이 잠잠한 날이라면 그
사이로 지나다니는 사람들이나 천창 너머 푸른 하늘의 빛깔을 볼 수도 있을 것이다. 우리는 끝내 이 자리에
있다.
1 최태만, 『한국현대조각사 연구』 (서울: 아트북스, 2007), 15. Maria Rilke, Auguste Rodin, trans. Jessie Lemont and
Hans Trausil (New York: Sunwise Turn Inc., 1919)에서 재인용.
2 어쩌면
이 질문은 의외로 오래된 것이 아닐지도 모른다. 나는 조각이 미술관에 소장되면서, 특히 앙드레 말로가 ‘상상의 미술관’의 핵심 기술로 지목했던 사진에 의해 원래 그것이 속한 특별한 장소에서 분리되어 파편화, 유형화되면서 하나의 단독적 대상이자 그리움의 대상으로 다시 태어난 것이 아닌가 의심한다. 실제로 릴케가 조 각가의 전범으로 숭배했던 오귀스트 로댕은 사진과 거의 같은 순간에
태어났고 스스로 적극적이고 비판적인 사진의 사용자이기도 했다. 사진과 조각의 관계에 관해서는, 앙드레 말로, 『상상의 박물관』 (서울: 동문선, 1996), 김웅권 옮김, 112–141쪽을 참조하라. 로댕과 사진의 관계에 관해서는, 로댕 미술관 웹사이트의 ‘로댕과 사진’ 항목에 기존 연구가 잘 정리되어 있다.
http://www.musee-rodin.fr/en/resources/educational-files/rodin-and-photography.
3 «확장된
매뉴얼»(서울시립 남서울미술관, 2018–2019).
4 Alenka Zupančič,
The Odd One In: On Comedy (Cambridge, London: MIT Press, 2008), 53–5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