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atural Gene》 전시 전경(취미가, 2020) © 안초롱

서로 같은 공간의 상이한 시차에서 말을 걸 수 있다면 그건 언어의 발화가 아닌 이미지의 기록으로 가능할 것이다. 바르트가 기술한 바와 같이 한 장의 인화지는 추억을 담은 서신이 되어 내내 사라지지 않기 때문이다. 물론 남겨진 사진의 이미지란 단단하게 고정됨에도 그곳에 행랑자로서 존재한 이의 발걸음을 확인할 방도는 없다.

이러한 무의식의 구조에서 사진은 교묘하게 기억의 언술과 시차를 뒤집기도 한다. 가령 1분 이내의 간격으로 연달아 찍힌 스냅사진이 이전과는 다른 기억의 간섭을 초래한다면 선형적으로 보증될 수 없는 배열로서 기록되는 것일 테다. 

그리스 로마 신화를 다룬 에디스 해밀턴의 『Mythology』 제2부 사랑과 모험 이야기(Stories of Love and Adventure)에서 프쉬케와 큐피트가 등장하는 5장의 첫 페이지를 급히 스캔한듯 어긋난 좌우대칭으로 포문을 여는 『Natural Gene』 도서는 두 장의 불가역적 이미지가 한 짝의 우편으로서 왕래되는 모순을 쫓는듯 편집되어 있다. 동일한듯 보이는 두 장의 서술체계에서 초점과 구도가 살짝 틀어진 컷들은 미적 효력을 상실한 일상의 단편이 인위적인 지표로서 연출됨을 다분히 지시한다.

앞서 각인된 한 장의 이미지는 그것이 곧 현실이자 보증된 기억임을 증언한다는 점에서, 연달아 찍힌 또 한 장의 사진은 먼저 마주한 현실 이 곧 현실일 수 없음을 역설적으로 반문하는 불협화음으로 유예된다는 점에서 그렇다. 즉 정지된 이미지를 통해서 시간의 변화를 드러내려고 할 때 오히려 사실주의적인 지시대상은 호접지몽(胡蝶之夢)의 허무한 관념으로 소외되는 것이다.

이와 같이 이미지의 현전이 몽환적으로 뒤섞이는 시공의 연접에서 관객은 곧장 림보(Limbo)1로 추락한다. “지각의 차원에서는 허위이지만, 시간의 차원에서는 진실한 환각 형태”2로서 덧대고 문질러지는 두 장의 이미지가 양면의 거울처럼 서로를 끊임없이 반사하기 때문이다. 그 결과 사진에 배인 차가운 공기와 주변의 왁자지껄한 소음, 혹은 표지판에 가려진 햇빛과 눅눅한 습기가 정제된 자리에서는 진부한 클리셰만이 인식된다.

이와 같이 물성을 지닌 책으로 이미지를 출간하는 행위는 인덱스를 분류하고 대형 복합기로 출력하던 압축과 팽창(CO/EX) 그룹의 활동에서 드러나듯 언제나 시간의 노에마와 연계됨을 볼 수 있다. 안초롱의 사진에 내재하는 것은 권위, 기억, 보존 등의 요소들이 아닌 시간의 플레이팅(Plating)에 대한 전유로서의 양식으로 해석되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시간의 건축(architect)에서 순수한 “현실의 수취”3 가 아닌 그 현실이 일종의 자재로서 감광되는 풍경으로부터 두 장의 유사한 사진을 배치하며 뒤섞는 식이다.4

흥미로운 대목은 이와 같이 두 번씩 연달아 피사체를 담은 사진이 시간에 대한 강박으로 독해된다는 점이다.5 이를테면 사건으로서 기록되는 시차의 미묘한 경위를 확보하는 자국으로 얼룩짐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변별적인 지점에서 추론되는 사항은 일종의 플리커(Flickr)와 같은 아카이브로 이관하기 위해서 현실을 촬영하는 매개 행위가 아니라는 것과 미세한 간극의 두 가지 사본으로 나뉘어서 오리지널의 장면을 유추할 수 없다는 전례에서 기술적인 복제(reproduction)의 층위와도 구분된다는 점이다.

즉 감광하는 두 개의 이미지를 실제의 인화지에 기록하려는 강박적 행위로부터 삶의 풍경과 기록이 서로 어떻게 병치될 수 있는가에 대한 가늠의 유무로서 사진의 속성이 논의되기 때문이다.

이처럼 실제의 가변적 시간이 꿈과 현실을 넘나들며 보는 이의 인식체계를 교란하는 방식은 안초롱이 조소를 전공한 뒤 사진 매체로 이동한 점을 환기케 한다. 피사체를 연이어 촬영하는 강박적 행위로부터 복제와는 상이하게 구현되는 양식이 단일한 시간을 세공하는 조각의 사유로서도 불가분적이기 때문이다. 가령 Koh Tao Thailand 엽서에서 가로로 오려내 붙인 광활한 해변가는 애초에 이곳이 건축가의 설계모형처럼 가공으로 건설된 시간의 축임을 드러낸다.

또한 벽면 전체를 바탕으로 삼아 파노라마처럼 설계된 〈before Sunset from Dew 2011(Ultra Wide Screen Ver.)〉의 해변 앞에 놓인 제각각의 액자 프레임은 허공에 떠도는 무의식에 물적 부피를 부여하는 지지체로 성립한다. 말하자면 연달아 찍힌 두 장의 장면은 온전한 내용을 담은 편지로서 소구되지 못할뿐더러 다종의 시차를 양산하며 기억을 교란하는 시도로서 지탱되는 것이다.

뚜껑이 달린 목걸이형의 원형 펜던트에 봉인된 히말라야 산맥의 엽서부터 마치 쇠창살로 보이는 코인로커의 머리를 맞댄 얼룩말까지 저마다의 액자에 담긴 이미지는 이처럼 기억의 비선형적인 병렬로부터 축출되어 있다.6

이러한 착시에 의해서 서서히 질식당하는 기억의 행방은 우리가 미로에 빠져있다는 점을 다시 한번 상기케 한다. 그럼에도 미로란 결국 어딘가에 그 출입구를 숨겨두는 법이다. 주지하다시피 시간의 경과에서 동결된 림보로부터 탈출해야만 하는 당위를 지속적으로 부여하는 원동력으로서 이미지의 지형이 구획되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Natural Gene』의 마지막 페이지에 실린 샤데이(SADE)의 〈Maureen〉 가사집에 함축된 이면의 기능이란 결국 샹송가수 에디트 피아프의 〈Non, Je Ne Regrette Rien〉과 같이 꿈에서 깨어나기 위한 일종의 킥(Kick)으로서 실린 또 하나의 단서로 유추된다.

즉 프쉬케와 큐피트라는 두 개의 알리바이를 통해서 현실을 일종의 자각몽으로 설계한 안초롱이 부유하는 미로로부터 다시 빠져나오도록 돕기 위한 감미로운 노랫말로서 적절한 순간에 신경기관을 자극해야만 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가정이 성립할 경우 출간된 도서 또한 작가의 향방을 짚는 토템으로 작용한다고 할 수 있다. 또는 동일한 꿈에 접속하도록 고안된 조각으로서의 동화적 가판대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이 미로의 가설은 다양한 우편엽서와 사진첩의 즐거운 여행 형식으로 추적되는 만큼 두 갈래의 교차로에서 내내 관객의 발목을 붙잡는다. 그러한 기준에서 책의 기능을 단지 데이터를 인화하는 여러 지지체 중의 하나로 해석하는 비평은 다소 협소한 논점으로 귀결된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안초롱의 작업에서 복제기술의 담론과 대비되는 또 하나의 지점은 그 각각의 사진이 모두 원본의 성격을 지닐 수도 있는 동시에 배격되며 전개된다는 점이기 때문이다.

사진의 피사체 혹은 사진 매체에 대한 담론보다도 표면의 의미가 부재한 시공이 주요한 단서로서 주어지는 이유이기도 하다. 혹은 시간과 공간을 잃은 각 장면을 임시로 정박시키기 위한 장치일지도 모른다. 〈Maureen〉의 노랫말 또한 더 이상 이승에서 볼 수 없는 죽은 벗을 그리워하는 점을 상기할 경우 사진의 기능과 역할은 시간도, 공간도, 대상도, 피사체도, 주인공도, 그 무엇도 부재한 텅 빈 여백의 인화지에서 현실을 전이하는 지위에 부합한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부재하는 부피의 질식감으로부터 당사자의 기억이 소거된 건조한 사진은 비로소 합리적인 알리바이로서 추론될 수 있기 때문이다.

사진 필름을 온전하게 대체한 디지털카메라의 시대에서 35mm의 아날로그 소형 카메라를 어깨에 맨 채 굳이 인화하는 수고를 마다하지 않는 안초롱의 행위는 이처럼 시간을 물리적 매체로 옮기기 위한 하나의 복선에 지나지 않는다. 시 간을 보존한다는 차원을 넘어서 그 시간의 현상에 대한 고민을 일시적으로 담기 위한 지지체는 각 꿈의 층위로서 구비될 뿐이다.

림보에 빠진 이들이 경각해야만 하는 규칙은 공간의 질감을 깎고 덧대고 교접하는 인과에서 발생하는 찰나의 기억을 주형(鑄型)적 증거로서 어떻게 상징화할 수 있는지에 대한 인식의 선행이기 때문이다. 조각을 전공한 작가의 이력에서도 어렴풋이 드러나듯 심술 궂은 이중의 설계자는 역사의 굴레에서 시간이 어떠한 방식으로 주조되고 기억을 포장하는지, 의미 없는 무장소를 걷고, 연관 없는 대상을 응시하며, 카메라의 축을 계속 가늠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이와 같이 두 장의 어긋난 사진으로부터 갈피를 잃은 채 빙글빙글 도는 진공의 팽이는 위태로이 보이더라도 그 회전을 결코 멈추지 않을 것이다. 순간을 박제하는 사진은 언젠가 빛이 바래지며 또 다른 주인을 찾아나설테니 말이다.


1 단테의 신곡에서 세례를 받지 못한 의로운 이들과 영아의 영혼이 머무는 공간을 뜻하는 림보는 천국과 지옥 사이에 있는 중간 내세(來世)로 묘사된다. 크리스토퍼 놀란의 〈Inception〉에서는 꿈에서 죽음을 맞이하여 현실로 돌아오지 못하는 환각 상태를 뜻한다. 림보의 어원은 경계선 혹은 가장자리를 뜻하는 라틴어 림부스(Limbus)로부터 유래한다. 
2 롤랑 바르트, 김웅권 옮김, 『밝은 방』, 동문선, 2006, 141쪽. 
3 로잘린드 크라우스, 최봉림 옮김, 『사진, 인덱스, 현대미술』, 궁리, 2003, 243쪽. 
4 가령 일종의 인테리어 자재로서 시공된 《허니앤팁》의 공간에서 굳이 빠져나갈 필요가 없었다면 《Natural Gene》의 사진에 맺힌 강박적인 시선처리로부터 이내 림보에 빠지는 관객은 적극적으로 탈출구를 향해야만 하는 당위가 부여된다. 전자의 전시에 관련된 논의는 다음의 글을 참조할 수 있다. 권시우, 「공간 인터페이스, ‘압축과 팽창’과 김동희의 사례」, 계간 시청각, 겨울호, 2017, 75-78쪽. 
5 〈Treelined Landscape〉와 같이 세 번의 시도로 구성된 실례도 있으나 《Natural Gene》 전시에 걸린 다수는 두 번 촬영되어 있다. 물론 중간에 두 개의 가벽이 세워진 취미가의 변별적인 공간 특성이 아니라면 해당 작품 또한 전시되지 않았을 것임을 자연스레 유추할 수 있다. 
6 〈The Lake of Milk from Dew 2011〉(Frame Ver.)에서 동그랗게 도려낸 이미지는 펜던트뿐만 아니라 875 × 500cm의 대형 시트지로 제작되어 아트선재센터의 《밤이 낮으로 변할 때》 전시장의 바닥에 부착된 바 있다. 이때부터 작가는 관객을 광학적 무의식에 떨어뜨릴 방안의 림보를 궁리하던 것인지도 모른다. 발을 딛고 서있는 우편엽서 위에서 어떻게 인식을 교란하며 그 이미지 너머의 구덩이로 미끄러뜨릴 수 있는지에 관한 미학적 실천으로서 말이다.

Reference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