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EE : 대학교 3학년 때 그림을 독학으로, 본격적으로 그리기 시작했다고 했는데 그 계기가 무엇이었는지, 당시에 무엇을 그렸고 어떤 화풍이었는지 궁금하다.

Ahn : 내가 한국예술종합학교에 다니던 시절에는 설치미술이나 개념미술이 주류로 여겨졌고 나 역시 그와 같은 작업을 했다. 그러다 대학교 3학년 때 갑자기 그림을 그리고 싶어 혼자 그리기 시작했다.

잘 그린다고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에 몰래 그리다가 어느 정도 작품이 쌓인 뒤 친구들과 선배들에게 의견을 구했는데 설치보다 회화가 더 가능성이 있어 보인다고 말해주었다. 미술을 하며 살고 싶은데 조금 더 가능성이 있는 분야에 집중해야겠다는 생각에 3학년 여름방학 때부터 회화 작업을 본격적으로 시작했고, 지금에 이르렀다.

LEE : 당시 본인의 취향에 맞는 화풍이나 작가가 있었는가?

Ahn : 내가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을 때 YBAs(young British artists), 사치(Charles Saatchi) 컬렉션, 전시 《센세이션 Sensation》(1997)이나 《회화의 영광 The Triumph of Painting》(2005) 등이 이슈였다. 내 또래의 많은 작가가 심취해 있었다. 천안 아라리오갤러리에서는 《콜드 허트-아티스트 프롬 라이프치히 Cold Hearts-Artists from Leipzig》(2005)전이 열리기도 했다. 그런 전시들을 찾아보며 유럽의 신표현주의 회화에 매료되었던 것 같다.


안지산, 〈Punishment〉, 2010, 캔버스에 유채, 50 x 60 cm © 안지산

LEE : 작업 초반 신문, 잡지, 영화와 드라마 등 매스미디어에 나온 이미지를 재구성해 외부로부터의 폭력과 억압 등을 이야기했다. 그러다 2014년 경을 기점으로 외부의 시스템과 권력 구조 및 폭력 등에 대한 이슈를 벗어나 회화의 근원적인 문제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이후 안지산의 작업을 설명할 때 ‘회화의 본질과 한계를 실험한다, 물질성을 드러낸다’는 내용이 빠지지 않는다.

내러티브를 풍부하게 담아내는 동시에 회화의 강한 표현성과 물질성을 보여주기 때문에 그 자체로 회화의 역사를 아우르며 나아가 회화와 미술(예술) 자체를 고민하게 만든다. 오래전부터 회화의 한계와 위기가 이야기되고 있으나 여전히 회화는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작가 역시 작업을 하면서 (스스로에 대한)한계를 느낀다고 말했다. 그 한계가 무엇인지 조금 더 구체적으로 설명을 듣고 싶다. 회화에 어떤 질문을 던지며 작업하는지도 궁금하다.

Ahn : 한국에서 회화의 재료와 친해지는 시간을 가졌다면 네덜란드 유학 시절에는 회화의 역사나 작가를 공부했다. 유학 기간에 했던 첫 작업이 〈Punishment〉(2009~2012)인데, 그 내용은 한국에서 성장한 나의 트라우마와 관련된 것이었다. 중고등학교 때 경험한 물리적인 폭력과 군대 문화, 그리고 사회적인 문제들을 작업에 담고 싶었다. 그런데 네덜란드의 사람들이 공감을 잘 하지 못하면서 왜 지금 여기에서 이러한 주제를 다루는지 질문을 하기 시작했다.

당시의 나는 작업에 저항정신과 사회비판이 들어가야 한다고 생각했다. 작가로서 사회에 목소리를 내는 게 중요한 문제이고 작가의 임무라고 교육받았던 것 같다. 그런데 네덜란드는 그러한 부분에서 조금 더 자유로웠다. 그래서 회화 공부를 다시 시작하자는 생각을 하게 되었고, 회화의 근본적인 문제인 ‘회화란 무엇인가’에 접근하게 되었다. 실제로 나는 회화(의 본질)를 이해하고 싶었다. 이후 네덜란드에 머물던 후반기까지도 이 주제에 관한 탐구를 지속했고 그것을 이미지로 치환했다.


안지산, 〈토끼사냥〉, 2014, 캔버스에 유채, 50 x 60 cm © 안지산

물론 이런 질문들은 쉽지 않았고, 미술이론서와 철학서들을 읽을수록 그림이 심각해지고 어두워졌다. 길을 헤매는 것 같은 나의 감정들이 그림에 등장한 암실이나 작업실 같은 폐쇄적인 공간에 고스란히 담겼던 것 같다. 그래서 뭔가를 알고 있을 것 같은 토끼를 등장시켜 의미를 부여하게 되었다. 토끼는 최근작까지 계속 등장하는데 잡고 싶은 욕망의 대상을 상징한다.

‘Hunt’(2014) 시리즈를 보면 토끼를 잡고 싶어 하는 욕망이 담겨 있다. 내가 좋아했던 요셉 보이스(Joseph Beuys)의 작업에도 토끼가 등장했고. 지금 보니 새로운 것을 만들어냄에 한계를 느끼지 않았나 싶다. 그림을 그린다는 것은 창작 활동인데 질문만 하니 새로움이 없었다. 그러다 스스로 지쳐 한국에 돌아오게 되었다.

한국에 돌아오기로 마음먹었을 즈음 세월호 사건이 있었고 말레이시아 항공이 격추되었다. 나에게 직접적인 사건은 아니었지만 슬픔이란 감정에 깊이 동화되었고 ‘슬픔이란 것을 회화로 어떻게 표현해야 하는가’로 시선이 옮겨가게 되었다. 죽음을 신파적으로 혹은 공허하게 생각하는 게 아니라 회화에 대한 근원적인 이야기와 함께 진중하게 접근하고 싶었다.

화가가 작품을 대하는 태도가 묻어나면서도 감정이 담기는 그런 작품을 생각했다. 바스 얀 아델(Bas Jan Ader)의 이야기도 참조했다. 이런 것들이 동시다발적으로 진행되었다. 한국에서 작업을 시작하며 가장 중요했던 키워드가 ‘떨어져 사라지다’였는데 여기에서 내가 상상할 수 있는 이미지들이 만들어졌고 ‘잘라내다’까지 파생되었다.


안지산, 〈43초 90〉, 2015, 캔버스에 유채, 53 x 45.5 cm © 안지산

LEE : 회화 자체에 대한 질문이나 고민을 회화로 보여주다 보면 모호하고 피상적으로 느껴질 수 있는데 안지산의 작업은 그렇지 않았다. 아마도 작가가 말하는 정서적인 부분들이 잘 어우러져 있어서인 것 같다.

Ahn : 작가도 인간이다. 새로운 것, 창의적인 것을 바라보고 갈망하며 살지만 작가도 똑같이 숨 쉬고, 보고, 느끼는 평범한 사람이다. 다만 내가 이상적으로 생각했던 그림은 보편적 가치가 충분히 담겨 공감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다 보니 작품의 구성도 우연에 기댄 표현들보다는 보편성을 가지고 견고하게 축적된 것들을 추구했다. 관련해 한국의 오래된 영화나 광고들을 즐겨 봤다. 당시의 영화들은 안정된 구도로 움직이고 클로즈업이 빈번하다.

느리지만 천천히 다가가는 그런 상황들이 현란한 카메라 워크보다 조금 더 흡입력 있게 느껴졌다. 그 영향으로 자연스럽게 무대 세트 같은 것들을 제작하기도 했다. 큰 작업을 할 때는 아이디어 드로잉에 색을 칠하기도 하고 사진 콜라주도 한다. 마지막에는 미니어처 세트를 만들기도 하고. 이런 과정들을 꽤 많이 거쳤다. 또 내가 직접 퍼포먼스한 것을 기록한 뒤 그리다 보니 드라마틱한 효과가 나는 것 같다.

테오도르 제리코(Théodore Géricault)는 〈메두사 호의 뗏목 The Raft of Medusa〉(1819)을 위해 시체들을 관찰하고 그렸다. 무언가를 그리고자 하는 욕망이 공포를 이긴 것이다. 나는 그런 욕망에 끌렸고 심취했다. 그래서 나온 것들이 나의 손과 발을 그린 회화이다. 화폭에 타인의 손발이 아닌 화가의 손발을 마치 신체가 절단된 것처럼 놓기도 하고 안정적인 구도로 놓기도 했다. 얼마 전까지 화가의 욕망을 슬픔과 연결하는 작업을 지속했다. 최근에는 조금 다른 접근을 시도했는데 ‘폭풍이 온다 Storm is coming’(2021~2022) 시리즈에서 그 변화를 볼 수 있다.

LEE : 일반화하기 어려울 수 있으나 개인적으로 회화는 특히 직접적이고 즉각적인 표현이 가능한 장르라 생각한다. 육체성과 물질성뿐 아니라 작가의 심리도 강하게 드러날 수 있다. 그런데 안지산은 이런 것들을 표현하기 위해 매우 계획적인 과정을 거친다.

Ahn : ‘무엇을 그릴까’를 결정할 때 우연성이 작용할 수 있다. 그러나 구상 단계에서는 생각과 이미지 메이킹을 굉장히 많이 하고, 메모도 하고, 자료도 찾아보며 다각도로 접근하려 한다. 세부적인 예를 들면 화폭 속 이미지의 크기, 잘리는 위치 등에 대해 구체적으로 계획을 짜는 편이다. 아이디어 스케치나 미니어처가 있다고 해도 머릿속의 구성을 실제로 옮기면 괴리감이 크다.

캔버스 앞에 서면 오직 그 안에서 해결해야 하기 때문에 붓을 드는 순간부터 또 다른 과정이 되어 버린다. 그래서 캔버스에 그리는 과정 중에도 어떤 것이 가장 효과적일지를 고민하며 조율해나간다. 사실 내 작업에서 즉흥적인 부분은 거의 없다고 해도 무방하다.


안지산, 〈Everyday; After Storm, Never-ending Story〉, 2020, 캔버스에 유채, 91 x 72.7 cm © 안지산

LEE : 작품마다 다르겠으나 사전 준비 기간은 어느 정도인가? 일정 수준 이상의 물리적 시간이 필수적일 것 같다.

Ahn : 생각하는 것에서부터 시작하는데 작품이 완성되기까지 꽤 오래 걸린다. ‘폭풍이 온다’ 시리즈의 경우 머릿속에서 구상하다 확신을 갖고 그것을 구현하기까지 한 2~3년 정도 걸렸다. 물리적인 작업 시간은 의외로 짧았는데, 2020년 네덜란드에서 열렸던 개인전에서 발표했던 ‘폭풍 후에 Everday; After Storm’(2020) 시리즈가 꽤 도움이 되었다. 작은 작품들이었는데 ‘폭풍 후에’가 더 힘들었다.

‘폭풍 후에’를 처음 구상할 때는 세상의 현 상황들을 표현해보고 싶었고 처절하지만 아름답게 그리고 싶었다. 폭풍이 모든 것을 할퀴고 지나가도 그 모든 것이 아름답게 느껴졌으면 좋겠다는 바람이 있었다. 작가도 인간이니 본능적으로 익숙하고 편한 쪽으로 움직이게 된다. 조금의 변화도 힘들다. 큰 용기가 필요하다. 물론 좋은 평가를 받는 작가들은 계속 변화한다.

LEE : ‘폭풍이 온다’(2021)에 관한 작가 노트에서 “재현을 위한 사실적 묘사(돌산)와 대상의 직관적 표현(비구름)의 두 가지 방식이 부딪히지 않고 긴장을 유지하도록 부단히 신경 썼다.”라는 부분이 인상적이었다. 단단한 물질적 형상을 가진 대상을 재현, 비정형적인 형상이고 물리적으로나 거리상으로 붙잡을 수 없는 구름을 표현과 연결해 회화의 시작에서부터 지속된 재현과 표현의 관계를 치밀하게 구성하고 있기 때문이다.

사진 콜라주 드로잉이나 물리적인 재현(미니어처, 세트, 육체적 실행) 후 작업하는 것 역시 물질과 이미지, 실재와 미메시스에 대한 탐구를 위한 것으로 보인다. 〈Cutout〉(2019~2020)도 그렇고, 〈Imitation〉(2015)에서도 그 의도가 강하게 드러난다. 관련해 작가의 설명을 듣고 싶다.


왼쪽: 안지산, 〈Imitation〉, 2015, 캔버스에 유채, 53 x 65.1 cm © 안지산 / 오른쪽: 안지산, 〈Washing Hands〉, 2015, 캔버스에 유채, 45.5 x 53 cm © 안지산

Ahn : 처음부터 의도했다. 화가, 회화의 본질적인 부분이 궁금했다. 나는 회화를 공부한다고 생각하며 작업한다. 내가 모르는 부분을 알아가는 과정에서 오는 상상력들이 있다. 회화의 담론들, 이론가들의 글이 상상력을 자극한다. 작가나 주변인들과의 대화에서 영감을 받기도 한다. 네덜란드의 황금기에 유독 풍경화가 유행했다. 그곳의 작가는 네덜란드의 하늘이 유독 낮아서라고 말했다. 실제로 내가 봐도 하늘이 낮아 구름이 가까이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러다 보니 풍경이 드라마틱하게 보였다. 왜 작가들이 먼 곳까지 가서 그림을 그렸는지에 대한 명확한 답을 찾을 수는 없지만, 그와 같은 화가의 욕망이 나에게는 상상의 원천이 된다. 나는 풍경의 많은 요소 중에 특히 유동적인 구름에 시선이 갔다. 다른 것들은 변화가 없다. 그런데 구름은 없다가도 생기고 다시 사라지기도 한다. 모양이나 종류도 다양하다. 화가(인간)의 욕망도 그렇다. 욕망이 들끓다가 한순간 사라질 수 있다. 나는 특히 폭풍 안에서 나뒹구는 구름, 요동치는 구름을 묘사해보고 싶었다.

LEE : 스스로를 담기보다 회화와 회화가 담을 수 있는 것들은 탐구해나가는 작업이라는 의미인가?

Ahn : 나의 관심과 통찰 때문에 탐구해나가는 것이다. 내가 선택하는 작업의 대상 중에 나의 삶과 무관한 것은 없으며 생산되는 모든 것은 나로부터 출발한다. 나 자신이 없으면 탐구는 성립하지 않는다.

LEE : 물감이 몸에 닿는 촉감을 느끼고 그렸는데, 물감을 씻어내는 과정까지 포함시켰다. 〈Washing Hands〉(2015), 〈Washing Feets〉(2015) 등에서 닦아내는 순간을 포착한 이유는 무엇인가?

Ahn : 전체적인 퍼포먼스, 행위의 과정이 중요했다. 물감을 묻히는 행위는 그 자체로 나의 정체성을 어느 정도 보여준다. 작가니까 물감을 그렇게 정성 들여 묻히는 거다. 사실 처음에는 바르는 것만 생각했었다. 그런데 물감이 마르니 닦아낼 때 아프기도 하고 고통스러웠다. 바를 때와 씻어낼 때의 느낌도 너무 달랐다. 참회하는 느낌도 들고 과정을 되돌린다는 느낌도 들어서 의식을 행하는 것 같았다. 직접 행위를 하고 안 하는가에 따라 분명 차이가 있다. 이런 과정이 있어서 조금 더 실감 나게 드러나지 않았나 싶다.

또 회화를 공부하면서 멀리 있는 대상을 그리는 게 아니라 내 눈앞에서, 내 몸에서 벌어지는 일을 기록하고 그려보는 것이 필요했다. 이것이 어떤 의미일까를 생각하기 전에 행위를 통해 느껴봐야겠다는 마음이 강했다. 캔버스에 바르는 게 아니라 내 몸에 바른다는 원초적인 경험이 있어야 회화에 더 다가가고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어떤 이론가는 알타미라 동굴 벽화(Altamira cave)를 인류 최초의 갤러리라고 해석한다.

그런데 동굴벽화를 자세히 보면 마치 자기가 그렸다고 사인하듯 안료를 손에 찍어 손자국을 남긴 부분이 있다. 보여주겠다는 목적성이 있고 선사시대 사람들의 정체성도 들어가 있는 것이다. 나는 이 손자국을 남긴 사람이 작가라 생각한다. 이런 생각들이 ‘White Night-Black Variation’ 시리즈 중 〈Hands of Painters〉(2015)에 담겼다.

작업실 한쪽에 알타미라 동굴벽화 사진을 붙이고 그 위에 내 손을 찍은 뒤 그걸 그렸다. 내 몸에 물감을 바르게 된 태도도 바로 여기에서 시작했다. 이런 행위가 더 발전해 ‘Pause & Gesture’ 시리즈로 확장되었다. 작가의 몸이 직접적인 대상으로 화폭에 존재한 것은 이 작품이 거의 마지막이다. 인상이 강렬해서인지 사람들이 이 시리즈를 꽤 오래 지속했다고 생각하지만 1~2년 정도 했다.


안지산, 〈Hands of Painters〉, 2015, 캔버스에 유채, 89.4 x 145.5 cm © 안지산

LEE : 대부분의 회화 작품은 벽에 걸린 채 전시되기 때문에 전시장의 중앙 공간이 비어있는 경우가 많다. 비어있어서 허전하다는 의미는 아니다. 단지 작품을 설치할 때 이 중앙 공간에 대해 어느 정도 생각하는지, 어떤 영향을 받는지 궁금하다.

Ahn : 작업의 종류에 따라 중앙 공간의 의미가 다를 것이다. 그림만 걸려있는 공간이라면 중앙은 관객을 위해 남겨 두어도 괜찮다고 생각한다.

LEE : 회화 외의 장르를 선보일 계획은 없는가?

Ahn : 감상자의 입장에서 영상 전시를 좋아한다. 회화는 그 과정을 잘 알다 보니 심각해지고 즐길 수가 없다. 가끔 상상을 초월하는 그림을 보면 흥분되기는 하지만 그 자체를 편하게 즐기기는 어렵다. 작은 조각을 만들어보고 싶은 마음은 있다. 가까운 시일 내는 아니겠지만 구상하고 있는 것들이 있다.


《폭풍이 온다》 전시전경 © 아라리오갤러리

LEE : ‘폭풍이 온다’는 압도감이 조금 남달랐다. 나의 경우 영국과 독일 낭만주의를 생각했고, 말 그대로『폭풍의 언덕 Wuthering Heights』(1847)이 떠오르기도 했다. 제목이나 소재 때문만은 아니었다. 작품 안에 소설과 같은 분위기의 문학적인 서사가 담긴 것처럼 연상되는 무언가가 있었다. 매우 치밀하게 계획적으로 소재를 선택하고 작업을 진행했음에도 불구하고 이번에도 응축된 감정이 전달되었다.

Ahn : 불안은 오랫동안 내 작업의 주요 요소 중 하나였다. 불안 아래에는 슬픔과 우울도 있을 것이다. 모두 한 덩어리이다. 사람들이 가장 공감하는 감정이 슬픔이라고 한다. 밝음보다 어둠 쪽에 더 공감한다는 것이다. 여하튼 그런 정서들이 내게 있는 것 같고 내가 그걸 좀 즐긴 것 같기도 하다. 버리려고 해도 그와 같은 주제들이 나를 따라오는 것 같다. 그리고 이런 정서가 ‘폭풍이 온다’에는 조금 더 잘 표현되었다.

전시 《폭풍이 온다》를 준비하며 3부작을 생각했다. 결론인 ‘폭풍 후에’를 먼저 그렸고, ‘폭풍이 온다’에서는 몰아치진 않지만 살랑살랑 바람이 불면서 조금씩 불안해지고 긴장이 고조되는 느낌을 표현하려 했다. 코헨(Coen) 형제의 영화 〈시리어스 맨 A Serious Man〉(2009)을 보면 주인공이 온갖 스트레스를 받다가 화가 극단으로 치닫는 마지막 장면에서 태풍이 몰려온다.

답답하지만 불안한 상황, 그런 느낌들을 떠올렸다. 팬데믹의 상황 속에서 사람들이 한계에 도달했다고 생각했다. 언제 실행될지는 모르겠으나 폭풍이 최고조에 달했을 때 폭풍 속에 있는 처절한 아름다움을 그리고 싶은 마음이 있다.

LEE : ‘폭풍이 온다’의 마리(Mary)는 이미지만으로도 한눈에 성모마리아임을 알 수 있다. 마리가 종교적인 의미로 읽히지는 않지만, 성모마리아는 신과 인간 사이의 중재자이다. 안지산의 작업에서는 어떤 의미인가? 무엇을 중재하는가? 그 표정과 얼굴 형상이 매우 익숙해 성모마리아가 등장하는 회화들을 찾아보았다. 참고한 특정한 도상이나 작품이 있는가?

Ahn : 종교에 관심 없는 사람은 성모마리아인 것을 모른다. 반대로 기독교 신자들은 왜 그렸는지를 물어본다. 전시를 본 관객 중 일부가 각자 자신이 아는 성모마리아 그림을 언급했는데 내가 참고했던 그림을 말한 사람은 없었다. 2년 전에 우연히 본 작품인데 한스 홀바인(Hans Holbein)의 〈Mary as the Mother of Sorrows〉(1495)이다. 제일 먼저 그렸던 〈Mary & White Bird〉(2021)가 홀바인의 작품에 가장 가깝고, 이후의 작품들에서는 점점 알아보기 어려워진다.

내가 특히 신경 쓴 것은 성모마리아의 눈빛이다. 어머니로서의 슬픔을 가진 마리아라는 존재가 마음에 위안을 줬다. 인간에게 위안을 주는 존재조차도 슬픈 상황이 인상적이었다. 그래서 성스러운 느낌보다는 슬픔이 전달되도록 의도했다. 인물을 전면에 등장시킨 것은 거의 처음인데 만약 《폭풍이 온다》에 풍경만 있었다면 회화적인 재미만 있었을 것이다. 인물이 있고 없고가 굉장히 다르다. 인물이 더해져 내가 의도했던 감정들이 증폭되어 전달되었을 것이다.


왼쪽: 안지산, 〈Mary & White Bird〉, 2021, 캔버스에 유채, 45.5 x 60 cm © 안지산 / 오른쪽: 안지산, 〈Mary in The Forest〉, 2021, 캔버스에 유채, 50 x 60 cm © 안지산

LEE : 슬퍼 보이는 마리의 모습을 보다 〈눈물 흘리는 성모 Stabat Mater〉가 생각났고, 비발디(Antonio Vivaldi)의 곡을 찾아서 들었다. 지극히 개인적이고 주관적인 느낌이지만, 안지산의 작품과 음악이 너무 잘 어울렸다. 음악을 듣다가 안지산의 회화는 시각적인 결과물임에도 음악이 전하는 것과 유사한 분위기를 전한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앞선 질문에서 언급했듯 감정적이고 심리적인 무언가가 강하게 분출되어서인 것 같기도 하다.

Ahn : 사실 나는 눈물이라기보다 빗방울이 튀었다고 생각하며 그렸는데 빗물이 흩날리니 리듬감이 생겼다. 화면의 리듬감을 찾으면서 작업했다. 인물의 사실성과 물감의 자유로운 붓질이 서로 어울리길 바랐다. 아마 인물만 그렸다면 경직되어 보였을 것이다. 빗방울을 그릴 때 나의 이전 작업과 비교해 조금은 즉흥적인 행위들이 전달되었던 것 같다. 어떻게 보면 이전에는 실수를 용납하지 않았다.

계획한 대로 답을 정해놓고 작업했다. 사유하는 과정이 너무 중요했기 때문에 경직되었을 수도 있다. 작업의 변화를 콜라주 드로잉에서 볼 수 있는데 〈Storm 1~6〉까지는 철저히 계산된 행위로 그리고 콜라주했다면 〈Storm 7~23〉까지는 즐기기 시작했다. 죽음이나 소멸 같은 주제를 다 잊었다. 그저 그리는 행위가 즐거웠다. 더 자유롭고 직관적인 표현들이었다.


왼쪽: 안지산, 〈storm 02〉, 2021, 종이에 콜라주, 오일 파스텔, 40 x 30 cm © 안지산 / 오른쪽: 안지산, 〈storm 21〉, 2021, 종이에 콜라주, 오일 파스텔, 40 x 30 cm © 안지산

LEE : 죽음과 소멸은 전체적인 정서, 소재, 주제 모두에서 안지산의 작업을 관통하고 있다. 〈Legs〉(2014), 〈Folding Your Hands〉(2014), 〈Standing on Tiptoe〉(2016) 등에서는 끝없이 존재에 대해 질문하지만 응답하지 않는 세상을 마주한 인간의 고독과 슬픔, 불안이 느껴진다. 또 안지산의 회화는 인물이든 정물이든 그 표현이나 색채 등에서 생동감이 지워진 화석 같기도 하다. 분명 행위와 감정이 전달되는데 그려진 대상은 정지 상태로 보인다.

이것을 실재와 이미지의 관계가 아닌 삶과 죽음의 문제로 연결할 수도 있을 것이다. 죽은 존재는 정지하고 사라지지만 존재가 남긴 기록과 타인의 기억 등을 통해 영원성을 획득한다. 화폭에 그려진 이미지 역시 실제 대상과는 달리 실존하지 않는다. 그러나 영원성을 획득한다. 결과적으로 안지산의 회화는 주제적인 면에서도 물질적이고 육체적인 영역과 비물질적인 영역, 가시적인 세계와 비가시적인 세계를 다루는 것 같다.

Ahn : 죽음뿐 아니라 회화에 관한 미술사적인 담론들이 의식하든 의식하지 않든 복합적으로 발현되는 것 같다. 앞서 말했듯이 이전에는 질문의 형식이었다면 이제는 그것을 작품 안으로 적절하게 끌어들이고 있다. 그동안 축적된 시간이 준 선물일 수도 있다.

LEE : 조금 다른 결의 질문이다. ‘Unfinished Stories’(2013) 시리즈에서 〈The End〉(2013)와 두 점의 〈Untitled〉(2013)는 무엇을 그린 것인가?

Ahn : 〈Untitled〉라는 제목의 작품들이 있는 시리즈가 두 개인데 거의 같은 맥락이다. 살면서 혹은 작품을 구상하면서 단편적으로 떠오른 생각들을 그렸다. 말 그대로 큰 흐름이나 의미가 아닌 짧은 생각이나 이야기들이다. 처음에는 날짜를 제목으로 했었는데 지금은 무제로 통일했다. 〈Unfinished Stories〉는 전쟁이나 폭발, 그와 관련된 실험실의 모습이다. ‘Untitled-Abandoned ideas’ 시리즈는 옛날 영화나 광고, 포르노그래피적인 이미지를 담은 작품들이다.

1970년대 광고를 보면 가족과 효(孝)가 강조된다. 자신의 볼을 꼬집는 남성을 그린 2017년도의 작품은 영화 〈살인마〉(1965)의 한 장면을 변형한 것이다. 이 영화의 초반에 화가, 그림의 대상, 컬렉터가 나오는데 상황이 흥미롭다. 김홍도의 춘화가 담긴 〈운우도첩(雲雨圖帖)〉 속 인물들의 얼굴을 클로즈업해서 그린 작품도 있다. 격정적인 순간인데 사람들의 표정이 다 슬퍼서 관심을 갖게 되었다.

LEE : 〈27 sec. 67〉(2015)처럼 다른 이의 창작물을 통해 무언가를 느끼고 그것을 작품에 옮기는 작업은 이미지 중심의 시대, 실재하는 세상이 아닌 누군가에 의해 만들어진 것들로 둘러싸인 세상을 생각하게도 한다. 화가로서 실재가 아닌 이미지가 지배하는 세계에 관해 남다른 생각을 할 것 같다.

Ahn : 나는 수없이 쏟아지는 이미지들 속에서 흐름을 찾는 것 같다. 자신만의 개성과 성격대로 이미지들을 받아들이고, 재정비하고, 재단하는 것이 현대 화가로서의 태도가 아닐까? 모든 작가(사람)는 쏟아지는 이미지를 막거나 그것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다. 이미지를 습득하는 일도 쉬워졌다. 작가가 아닌 사람들을 보면 이미지를 추억과 기억으로 생각하는 것 같다. 나는 조금 더 냉소적, 비판적으로 받아들이고 내 마음대로 재단한다.

이미지가 어떻게 읽히는가가 중요하기 때문에 추억은 생각하지 않고 내 방식대로 해석해 그것을 대중에게 전달한다. 요즘은 이미지를 더 거칠게 다소 폭력적으로 다루는 것 같다. '폭풍이 온다'의 돌산도 내가 직접 산에 가서 기록한 것들을 재조합한 것이다. 북한산 자락인데 돌산 사이사이에 나무가 많았다.

그런데 내가 다 지워버렸다. 내가 표현하려는 원초적인 구름의 느낌이 돌산과 부딪히면서 조화롭길 바랐기 때문에 불필요한 요소들을 삭제했다. 선택과 집중을 했다. 아마 산에 대한 애착이 있었다면 그렇게 못 했을 것이다. 그런 냉소적 태도가 내가 이미지를 대하는 태도가 아닐까 싶다.

Reference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