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가영(b. 1989)은 현실과 이상의 관계에 대한 물음을 바탕으로, 경험해 본 적 없는 것에 대한 낭만과 연출된 환상을 회화라는 매체로 표현한다. 그의 작업은 회화적 설치와 연출을 통해 가상의 현장감을 유도하는데, 이는 인식과 경험의 범주, 그리고 회화의 의미에 관한 근본적인 질문으로 이어진다.


최가영, 〈Curtain Call〉, 2022, 캔버스에 아크릴, 100x80.3cm © 최가영

최가영의 작업은 현실을 벗어나 이상세계에 근접하고자 하는 인간의 욕망과 이러한 심리를 바탕으로 일상에서 가공-소비되는 비일상성을 관찰하는 일에서 출발한다.
 
이러한 관심은 반복되는 일상에서 벗어나 내가 알지 못하는 곳으로 떠나는 여행을 계기로 시작되었다. 대다수의 사람들은 권태롭고 피로한 현실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안식처를 기대하며 여행을 떠난다. 하지만 현실이 있기에 이상향도 존재할 수 있듯이, 여행 또한 삶과 밀접하게 닿아 있다.
 
최가영은 아직 닿지 않았고 알지 못하는 곳을 향한다는 점, 주어진 시간 내에 언젠가는 끝난다는 점에서 여행과 삶이 닮아 있다고 보았다. 우리는 아직 경험하지 못한 나의 여행과 내일의 삶이 나의 반복되는 일상과 오늘에 비해 낫기를 희망하며 그곳으로 향한다.


최가영, 〈달과 폭포〉, 2017, 한지에 수묵채색, 135x70cm © 최가영

2017년 갤러리도스에서 열린 개인전 《FOUND_쉽게 찾은 풍경》에서 작가는 아이슬란드에서의 여행을 통해 경험한 감정과 함께 내면의 이상세계를 회화 작업으로 표현한다. 전시작들은 작가에게 특히 인상깊게 다가왔던 아이슬란드의 이국적인 풍경을 배경으로 한다.
 
그러나 여기서 자연 풍경은 그저 보이는 그대로 재현하여 그려지는 것이 아니라 작가의 상상과 환상이 어우러진 채 재구성되어 화면 안에 펼쳐진다. 즉, 이는 실제 여행의 객관적이고 구체적인 장소가 내면화의 작용을 거쳐 작가만의 상상의 공간으로 번역된 세상인 것이다.


최가영, 〈we welcome you〉, 2017, 한지에 수묵채색, 190x390cm © 최가영

그리고 최가영은 마음 속 이상향을 자연풍경으로 담는 동양의 산수화의 요소들을 가져와 이국적인 자연 속에서 펼쳐진 자신의 내면 풍경을 표현하였다.
 
예컨대 작가는 전통적인 동양화의 소재로 자주 등장하는 소나무와 매화, 그리고 산수의 형상을 가져오면서도 밤하늘의 불꽃이나 무지개, 달과 같은 개인적으로 상징성을 부여한 몽환적인 소재를 함께 재구성한다.


최가영, 〈밤바다-섬〉, 2017, 한지에 수묵채색, 130x380cm © 최가영

산수와 어우러지는 밤이 주는 풍경은 조용하고 평온하며 꿈을 꾸듯 신비로운 느낌을 자아낸다. 밤하늘의 네온사인처럼 환하게 빛나는 형체들은 활기찬 축제의 분위기를 환기시키는 듯 하다. 불꽃놀이를 하는 밤하늘에서도 무지개를 볼 수 있는 그의 풍경 속 자연은 너무나도 이상(理想)적이어서 이상(異常)하게 다가온다.
 
여기에 사용된 한지 위로 물감을 번지고 스미게 하는 동양화의 채색방식은 비현실성과 낭만에 대한 심상을 더욱 극대화하는 효과를 가져온다. 최가영은 이러한 가상의 풍경을 통해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지만 그래도 찾아가고 싶은 완벽한 행복을 표현하고자 했다고 말한다.


최가영, 〈Венчац의 하얀 대리석-Vukasin Stancevic로부터〉, 2020, 캔버스에 아크릴, 150x130cm © 최가영

이처럼 최가영은 비현실적인 희망이 오늘의 현실을 살게 하는 힘이 된다고 믿으며, 일상 속에서 발견된 형상들과 환기시킨 기억으로부터 나온 파편들을 화면 안에 직조해 새로운 이야기를 만들어 낸다. 그의 화면 안에 만들어진 세계는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지만 감각적으로 만들어 낼 수 있는 새로운 현실성을 직면하게 한다.


《세르비아의 산, 채석장, Венчац》 전시 전경(공간 형, 2020) © 최가영

그리고 2020년 공간 형에서 열린 개인전 《세르비아의 산, 채석장, Венчац》은 가상/간접 경험이 실제 및 현실과 맺는 관계에 대한 사유를 반영한 작업들로 이루어져 있었다.
 
2019년 최가영은 중국의 레지던시에 입주하여 작업하면서 만난 세르비아 출신의 ‘M’을 통해 한 번도 가보지 않은 세르비아라는 나라에 대해 접하게 되었다. 경험해 보지 않은 곳에 대한 이야기와 사진들을 듣고 보며 작가는 자신에게 ‘어떤 세르비아’가 생겨났다고 말한다.
 
최가영은 자신 안에 생겨난 ‘어떤 세르비아’, 즉 직접 본 적 없는 곳을 그린 다음 언젠가 그곳에 가보기로 했다. 이에 그는 M에게 ‘세르비아의 멋진 자연 풍경을 찍은 사진’을 요청하였고, 그렇게 한국으로 날아온 jpg파일들 중에서 어느 산 사진을 보았다.


최가영, 〈산, 채석장 - Marija Curk로부터〉, 2020, 캔버스에 아크릴, 95x72cm, 50x50cm © 최가영

작가는 사진 속 산을 거닐고 있다고 스스로에게 최면을 걸듯 상상하며, 그 산을 실제로 경험한 M과의 대화를 바탕으로 작업을 이어갔다. 그러던 중 사진 속 풍경이 채석장이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이에 작가는 자신이 상상해 온 산수화 같은 풍경이 아니라, 지금 이 순간에도 바위가 깎이고 잘려 나가며 사진 속 모습과는 다른 풍경으로 변해가고 있을 그곳의 현재에 호기심을 갖기 시작했다.


최가영, 〈세르비아의 산 - Marija Curk로부터〉, 2020, 캔버스에 아크릴, 262x262cm © 최가영

이후 작가는 그곳의 지명인 ‘Венчац’를 검색하여 비교적 최근의 사진들과 관련 정보들을 수집하고 이를 참고해 작업을 이어갔다. 그러나 그림을 그려 나갈수록 그림은 실제와 점점 더 멀어져 갔다. 결국 그의 그림은 어디에도 없는 곳에 대한 사생(寫生)이 되었다.
 
실재하는 장소의 사진을 보고 어디에도 없는 곳을 그리고, 또 어디에도 없는 곳을 상상하며 언젠가 경험해보기를 꿈꾸는 과정을 거치며 최가영은 경험, 인식, 이상 그리고 평면과 회화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을 갖기 시작했다.


최가영, 〈아흔 아홉 조각의 부곡하와이-1984년 J로부터〉, 2022, 캔버스에 아크릴, 10x15cm(99개) © 최가영

한편 2022년 금호미술관에서 열린 개인전 《Survival in Fantasy》는 중고물품을 사고파는 해외 웹사이트를 구경하다 우연히 수집한 엽서 한 장으로부터 시작되었다. 그 엽서는 현재는 폐업한 부곡하와이라는 한국의 테마파트에서 일했던 외국인 댄서 ‘J’가 1984년에 영국으로 발송한 것이었다.
 
엽서의 발신자인 J가 묘사한 1984년도의 부곡하와이라는 테마파크는 만나본 적 없는 인물이 전해주는, 작가가 태어나기 이전의 시간이자 가본 적 없는 장소였다. 이를 계기로 작가는 여러 가지 기록물과 인터뷰, 답사를 바탕으로 이제는 물리적으로 경험할 수 없는 장소에 대한 인상을 회화로 표현해 나갔다.


《Survival in Fantasy》 전시 전경(금호미술관, 2022) © 금호미술관

작가는 80년대의 부곡하와이를 경험했고 기억하는 인물들과의 인터뷰와 부곡에서의 답사 과정을 거치면서 이국적이고 환상적인 이미지를 만들어내기 위해 노동하고 생존했던 이들에 대해 주목했다.
 
전시 제목인 ‘Survival in Fantasy’는 부곡이라는 한국의 한 마을에 ‘하와이’를 만들기 위해 바다 건너 온 외국인 댄서들과 열대 식물들의 생존기를 뜻한다. 그리고 전시를 통해 작가는 각자의 삶 속에서 자신의 이상을 위해 일상을 살아가는 우리들의 이야기를 반추해볼 수 있기를 기대했다.  


《Survival in Fantasy》 전시 전경(금호미술관, 2022) © 금호미술관

최가영은 J가 보낸 엽서의 앞면의 사진 이미지와 ‘한국의 하와이’라는 판타지를 구현하기 위해 먼 타지에서 온 열대 식물들의 모습을 화면에 담았다. 화면 위를 스친 붓 자국은 부곡하와이의 실체를 넘어 시공간에 대한 잔상과 그리움을 나타낸다.
 
또한 실제 무대 위에 설치된 회화 작업은 관객이 그 사이를 거닐 수 있도록 구성하여 이상적 이미지가 만들어지는 무대 뒤편의 이야기를 함께 공유할 수 있도록 유도했다.


《후르츠 Furutsu》 전시 전경(갤러리조선, 2023) © 최가영

이국적인 환상에 대한 관심의 연장선에서 열린 개인전 《후르츠 Furutsu》(갤러리조선, 2023)는 ‘연출된 환상’을 위한 장식으로서 혹은 그 주변부에 위치해 온 열대 과일의 초상을 담았다.
 
제목 ‘후르츠’는 과일을 뜻하는 Fruits의 일본식 발음 フルーツ을 옮긴 것으로 과일 통조림 ‘후르츠 칵테일’, 종합 과일 젤리 ‘후르츠 믹스’ 처럼 후르츠가 과일 풍미를 흉내 낸 가공품의 이름으로 불리는 데서 착안했다.
 
전시에서는 과일 맛의 무언가를 가리키기보다 현실이 갈망하는 특정 시공간이나 대상에 대한 환상을 흉내 내며 살아가는 존재들, 그리고 그들의 생존법을 아우르는 표현으로 쓰인다.


최가영, 〈Selenicereus Costaricensis〉, 2023, 캔버스에 아크릴, 38x38cm © 최가영

최가영의 그림에서 열대 식물은 몽환적인 ‘트로피컬’과 달콤한 풍미가 도드라져 보이지만, 통조림 체리를 닮은 그림 속 열매는 신선한 달콤함보다 합성착향료의 공허한 향을 상상하게 한다.
 
작가는 생존을 위해 달콤하고 화려하게 진화한 열대 식물의 모습이 현실에서의 삶의 모습과 닮아 있다고 말한다. 즉 그의 열대 식물 초상에는 ‘후르츠’로서 살아가는 현실의 모습이 함께 투영된다.


《후르츠 푸딩 Furutsu Jelly》 전시 전경(오시선, 2023) © 오시선

이와 연계하여 열린 개인전 《후르츠 푸딩 Furutsu Jelly》(오시선, 2023)에서는 《후르츠 Furutsu》의 그림 속을 비집고 들어 가보는 경험을 전달하는 설치 작업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통조림 시럽에 흠뻑 절여진 과일 조각들은 거대한 입체 형태로 확대되었고, 관객은 그 사이를 거닐며 마치 달콤한 시럽 속을 함께 헤엄치는 또 하나의 ‘후르츠’된 듯한 경험을 하게 됐다.


최가영, 〈A Hawaiian Summer Dream 5〉, 2023, 캔버스에 아크릴, 34.8x24cm © 최가영

이렇듯 최가영의 작업은 먼 곳의 대상에 관해 리서치한 것을 바탕으로 현실과 개인, 사회를 비유하고 상상해서 만든 서사를 회화와 입체로써 전달한다. 비일상성과 이상향에 대한 현실적 욕망을 표현하는 그의 회화는, 현실과 이상의 관계에 대해 고민하게 하는 동시에 그 사이에서 고군분투하는 지금 우리의 모습을 비추어 보게 한다.

"평면 속 세상이 불러일으키는 오해와 착각에 속기도 하고, 때로는 속아주는 척하기도 하면서 가상/간접 경험이 실제 및 현실과 맺는 관계에 대해 생각한다. 액정에 맺힌 이미지가 실제와 점점 더 흡사해지는 세상을 ‘직접 본 적 없는 것을 그려내는 작업’을 통해 바라본다." (최가영, 작가 노트)


최가영 작가 © Piet-2 Art Center

최가영은 서울대학교에서 동양화를 전공하고 동대학원에서 석사 학위를 취득했다. 개인전으로는 《후르츠 푸딩 Furutsu Jelly》(오시선, 서울, 2023), 《후르츠 Furutsu》(갤러리조선, 서울, 2023), 《Survival in Fantasy》(금호미술관, 서울, 2022), 《세르비아의 산, 채석장, Венчац》(공간 형, 서울, 2020) 등이 있다.
 
또한 작가는 《방금 전의 소문과 오래된 증거로부터》(챔버, 서울, 2025), 《기다림이 끝나는 날에도》(경기도미술관, 안산, 2025), 《드로잉그로잉》(아트스페이스 보안, 서울, 2025), 《Transurfing》(노블레스 컬렉션, 서울, 2025), 《쇼케이스: 정원술》(인천아트플랫폼, 인천, 2023), 《지워진 기억조차 리듬을 남긴다》(우석갤러리, 서울, 2023) 등 다수의 단체전에 참여했다.
 
최가영은 인천아트플랫폼(2023), 후지요시다 도-소 아티스트 레지던시(2019), 타오후아탄 제5회 국제 예술가 레지던시(2019) 등 다수의 레지던시 프로그램에 참여하였고, 2021년도 금호영아티스트에 선정된 바 있다.

Reference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