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물》 전시 전경(온수공간, 2020) © 임재형

뱉어내는 순간 더 이상 지킬 수 없게 되는 것이 있다. 뱉어진 언어들 사이에서 정처 없이 배회하는 것을 더는 감싸 안을 수 없게 되는 경우다. 옅고, 고요하고, 그래서 느리게 보이는 임재형의 그림을 찬찬히 들여다보면, 그가 뱉지 않고 머금은 언어를 보호해보려는 사람이라는 것을 짐작하게 된다. 임재형은 함부로 뱉고 싶지 않기에, 여러 방식으로 숨긴다. 단박에 언어화하는 것이 힘에 부쳐 사유의 방식을 여러 겹 쌓아 숨기는 편이 오히려 수월한 것인지, 작가는 그림을 ‘보는 것’에 대한 은근한 단서를 즐겨 남기곤 한다.


자취:추적 

그의 작업에서는 대체로 보이는 것 너머 미세하게 가려진 것들의 겹을 발견할 수 있다. 〈평형〉을 마주할 때면 어슷하게 재단된 윤곽이 눈을 사로잡는데, 그것에 담긴 바다는 정형화되지 않은 윤곽을 어느 순간 잊게 할 만큼이나 고요하고 가지런하다. 바다의 수평선을 잊을 정도로 가까이에서 보면 무수히 난 조각칼 자국이 마치 바다에 낸 상처처럼 보인다.

이 작업과 마주하고 걸린 〈흉터〉는 상처를 한 번 더 상기한다. 〈평형〉에 새긴 틈에 잉크가 개입하여 상처가 드러났다면, 동일한 판에 칠 대신 압력을 가해 그 상처의 자국이 부조처럼 두드러지게 작업한 것이 〈흉터〉다. 한 공간에 전시된 〈어떤 시계〉 역시 얼핏 봤을 때 불안정하다. 판자국(plate−mark)만 기울었을 뿐, 액자는 바로 잡혔고 기울여 그린 시계는 다시 제 방향을 찾았다. 옆으로 흐른 물감 자국은 애초에 이를 기울여 그렸다는 것을 짐작하도록 돕는다.

나는 포개진 흔적들을 하나씩 걷어가며, 칼을 쥐고 판목을 대했을 임재형의 시간을 떠올려본다. 수많은 상처 위에 검은 잉크를 바르는 시간, 같은 판을 다시금 마주하고 강한 압력으로 찍어내며 또다시 바다 앞에서 소비했을 시간을. 그리고 기울인 시계 그림 밖으로 흐르는 물감을 온전히 지켜봤을 시간을 짚어본다. ‘배’가 기울어진 ‘108.1도’에 맞춰 되돌려낸 것을 바라보고 이를 깊이와 자국으로 남기는, 침묵의 시간들. 나는 회전축으로부터 멀어졌다가 돌아온 만큼의 자취를 남긴 그림에 가까이 다가가 눈으로 그것을 만져본다.


소멸:생성

언급한 작업들이 판화의 작동 기제를 고려한 것이라면, 〈시든 붓질〉과 〈대설〉은 한번 그린 작업을 “다시 그리는” 방식을 취했다. 유동적인 재료로 빠르게 그린 적 있는 작업의 일부를 확대하여 종이에 다시, 연필로, 구태여, 건조하고 느리게, 이전 재료의 물성과 질감을 성실히 살려 그렸다.

각 작업의 소재인 시든 식물과 눈송이는 이미 어느 시간을 보내고 사라지거나 이내 사라질 대상이다. 이번에는 마른 잎을 수성재료로 그려 흐르는 자국으로 남기는 것, 내리는 눈이 조만간 녹아 없어지기 전에 물감의 꾸덕한 질감에 무게를 싣는 것, 그리고 이것을 기록한 그림들의 물성을 훗날 연필로 고스란히 재현하는 임재형의 시간을 상상해봤다. 끈질길 정도로 축적된 시간들.

최근 그에게 주어진 낯선 시간을 언급해본다. 사람이 있어야 마땅한 집이 비었던 적이 있었다. 거처를 막 옮겨나간 대상이 빈집에 남긴 흔적은 그날의 작가에게 피사체로 남았다. 그날 채집한 사진을 꺼내 그리는 것은 작가가 〈마지막 집〉에서 마주한 소멸 중인 에너지와 그 사이를 비집었던 생경한 감각을 고스란히 길어 형상으로 곱씹어보려는 행위다. 대상은 사라졌지만, 작가가 떠낸 그림은 남았다. 나는 작가로부터 이런 이야기를 들어 두었다가 글로 남기는 지금에 와서야 그의 앞에 놓여있던 그때의 시간을 한 꺼풀씩 되짚고 조심스레 들춰내 본다.

그리고 그가 그림으로 남긴 집의 허물을 보며 누구의 것도 아닌 것으로 남은 공간의 허무함을 먼저 떠올리고, 이내 그릴 때 작가가 투영했던 감각과 이를 통해 소진되는 에너지를 짐작한다. 다음으로는 이와 같은 과정 중에 새롭게 탈각되는 또 다른 허물들 – 겨우 낱말로 읊조려볼 수 있게 되거나 잡음으로 남은 언어, 그리고 그림 – 을 바라본다. 그 집에 잔재하던 ‘없음’은 지금에 와서 온전한 ‘없음’이 아닌 것이 되었다.

이번에는 다시 어두운 바다로 돌아온다. 앞서 언급한 “평형”한 바다는 상처(음각)를 품었고, 그 상처에 대한 반응으로 “흉터(양각)”가 발생했다(작가는 이러한 흉터의 양각을 두고 “수많은 상처의 음화(negative)”라고 표현했다1 ). 한편, 〈먼 곳의 빛〉에 담긴 것은 바다에 서린, 곧 사라져 없어질 어떤 빛이다. 수면 위의 빛을 한 줄기씩 헤아려 그리니 역설적으로 또 다른 실루엣이 드러났다.

소실되는 빛과 이에 대응(negative)하여 떠오르는 어둠은 사실은 무한히 반복하는 것인데, 임재형은 이 견고한 질서의 틈에 개입하는 방식으로 머물던 시간을 잠시 붙잡아본다. 캔버스에 생성된 빛은 이제 어엿이 존재한다.


깨우지 않는 시간

그가 더듬어 그리는 시간이 두터운 층위로 구조화 될수록, 감상자는 작가에게 곁을 준 것들을 더 느리게 더듬게 된다. 임재형이 남긴 일련의 허물들은 지나는 것을 허투루 재단하거나 일말의 언어로 소모하지 않으려는 듯 차분히 쌓여 있다.

우리는 그가 떠낸 잡음이나 겨우 읊조릴 수 있게 된 낱말, 그리고 눈앞에 남은 그림을 통해 지나는 것의 찰나를 걷어내 본다. 갖가지 허물은 이렇게 마주했던 시간을 온전히 붙잡아 두려는 작가의 고민을 가시화한다. 그는 그리기를 통해 ‘없음’을 둘러싼 주변부의 것들을 놓지 않으려 애쓰는 자신의 태도를 “복기(작가노트)”해보려 한다. 부재라는 토포스를 마땅히 재현하는 것의 의미를 밀도 있게 들여다보기 위해서도 그리기의 당위성을 끈질기게 추적하는 것이다.

지금 당장은 명확히 할 수 없더라도, 지나 없어진 것의 자취를 좇아 그에 알맞은 감각과 표현 방법을 주물해보기 위해, 그린다. 그의 여름 전시 《행방》이 사라지는 것이 이르는 곳 또는 감춘 종적을 더듬어보려는 태도를 보였다면, 겨울의 《허물》은 그렇게 짚은 지점에 얽힌 각 순간을 초월하여 영겁을 떠내려는 간절함 일지도 모른다.

그는 없어졌음에도 찾는다. 혹은 없기 때문에 그린다는 표현이 더 적절하겠다. 상실이 달가울 수는 없지만, 스쳐 보내고 마는 태도와는 더욱 거리가 멀기에 바스러지고 멀어지는 대상들에 자꾸만 개입하고 만다. 동시에 그는 금세 그로부터 멀어지려는 자세를 취하기도 한다. 그리는 것의 대상을 은폐하면서도 영영 놓기는 싫은 그런 미지근한 온도로 사라지는 것의 주위를 끌어안는 애착을 보이는 것이다.

따라서 그는 최대한 얇게 칠해 유화인 것을 잊게 하기,(다시)기울여그리기, 사실적인 연필 드로잉으로 수성재료 흉내 내기 등의 위장술을 취하지만, 그럴수록 나는 더 두꺼운 렌즈를 겹겹이 쌓아 (뒤로 물러난 것처럼 보이는) 작가의 감각을 밀착해서 헤아려보고 싶다. 그가 남긴 표면에는 내러티브 대신 철저하게 중화된 감각이 유난히 먼저 눈에 밟혀 마음을 쓰게 만드는 것이다.

그래서 임재형의 작업을 처음 만났을 땐 ‘놓아주지 못하는’ 그의 태도를 어떻게 해석하면 좋을지 보다는 그러한 태도를 어떻게 보호할 수 있을지를 고민했다. 전시를 내린 이후에 돌이켜보니, 그의 그림이 전시장에 머물던 사람들을 끊임없이 의심하게 하며 그들의 시간을 오랫동안 붙들어 놓았던 장면들이 떠오른다. 전시에서 유독 그림과 감상자의 거리가 좁아졌다가 풀어지기를 반복하는 모습이 자주 포착되었다는 말로 고민에 대한 답을 대신해보기로 했다.


임재형,「되돌리려는 의지와 그것의 불가능성」,『월간미술』,(2021년 1월), p.84.

Reference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