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재형(b. 1988)은 상실을 둘러싼 감정의 양상과 이에 대한 태도를 회화의 관점에서 풀어내는 작업을 해왔다. 그는 ‘부재(Absence)’라는 개념을 회화적으로 접근하여, 손에 잡히지 않는 감정과 불분명한 기억이 회화라는 매체를 통해 어떻게 시각적, 공간적으로 나타날 수 있는지를 탐구한다.


 임재형, 〈Eternity and a Day〉, 2024, 캔버스에 아크릴, 유채, 182x182cm © 파이프갤러리

임재형의 작업은 정의하거나 유형화할 수 없는 대상을 기록할 수 있는지에 대한 단순하지만 근본적인 질문에서 출발한다. 그러한 대상 중에서도 작가는 ‘존재했던 것'과 '사라진 것'의 감각을 추적해 나가며 그 흔적과 여운을 화면에 포착한다.
 
작가는 물가, 안개, 그늘과 같은 경계적 풍경을 반복적으로 다루며, 형태가 고정되지 않은 유동적 윤곽을 통해 상실과 기억의 감각을 환기한다. 그는 명확한 서사나 직접적인 대상을 묘사하는 대신, 침묵과 여백, 미묘한 감정의 잔재를 통해 자신만의 섬세한 시각언어를 구축해 왔다.


임재형, 〈빈자리〉, 2014, 종이에 연필, 98x65.6cm (4점 중 1점) © 임재형

예를 들어, 그의 초기 작업인 ‘빈자리’(2014)와 ‘졸업’(2014) 연작은 돌아올 수 없는 특정 인물 혹은 시간에 대한 시선을 빈 공간을 통해 드러낸다. 드로잉의 대상이 된 이미지는 특정 인물을 찍은 스냅사진이다. 작가는 사진의 비율과 촬영된 장면의 구성을 화면에 그대로 가져오되 인물을 제외한 공간만을 남겨 그렸다.
 
임재형은 지나간 과거의 순간을 붙잡는 사진이라는 매체를 경유해 지금은 그곳에 없는 이들에 대한 작가의 감정과 감각을 되짚어가며 종이 위에 새겼다.


임재형, 〈실종〉, 2014, 캔버스에 흑연, 127.2x81.8cm © 임재형

한편, ‘실종’(2014)’ 연작에서는 실종이라는 아직 확증되지 않은 부재의 감정과 감각을 그리기의 행위로써 기록한다. ‘사라짐’이 확실하지 않다는 데에서 오는 희망과 절망, 기대와 체념, 믿음과 불신 사이를 오가는 감정을 다루기 위해 작가는 먹지를 대고 그 위에, 혹은 종이의 뒷면에 얇은 선들을 하나하나 새겨 넣었다.
 
이러한 작업의 방식은 무엇이 어떻게 그려지고 있는지 확실히 알지 못한 채 끊임없이 무엇인가를 더듬어 나가게 만든다. 이와 같은 그리기의 조건 속에서 작가는 답답해하고, 불안해하고, 초조해하고, 기대하는 등 여러 심리적 상태들 사이를 끊임없이 오간다.
 
결과적으로 완벽하게 통제되지 못한 수많은 선들이 모여 꽉 차 있으면서도 텅 빈, 혹은 멀어지면서도 멀어지지 않는 공간을 구성한다.


《허물》 전시 전경(온수공간, 2020) © 임재형

이처럼 임재형은 지나 없어진 것의 자취를 더듬어 그에 알맞는 감각과 표현 방법을 탐구해 왔다. 이는 ‘부재’를 재현하는 것의 의미를 밀도 있게 들여다보기 위해 그리기의 당위성을 끈질기게 추적하는 작가의 오랜 고민에서 비롯된다.
 
2020년 온수공간에서 열린 개인전 《허물》에서 작가는 지나간 과거의 존재를 그림이라는 또 다른 실체로 남기는 작업을 ‘허물’이라는 단어에 빗대어 표현했다.
 
허물은 특정 생물의 변태를 위해 탈락된 몸의 표면 조직을 일컫는다. 이 죽은 조직은 더 이상 몸의 일부로서 기능하지 않지만, 한때 피부로서 자리했던 과거의 시간과 존재를 증명한다.


임재형, 〈평형〉, 2020, 종이에 목판화, 100x430cm © 임재형

임재형은 얇고 느리게 쌓아 올린 화면을 통해 지나간 존재의 허물을 남겨 놓았다. 그의 작업에서는 대체로 보이는 것 너머 미세하게 가려진 것들의 겹을 발견할 수 있다. 예컨대, 세월호 참사에 대한 무력감과 분노를 반영한 목판화 작업 〈평형〉(2020)은 어슷하게 재단된 프레임 안에 바다의 수평선을 담고 있다.
 
그림 속 바다의 수평선은 정형화되지 않은 배경을 어느 순간 잊게 할 만큼 고요하고 가지런하다. 그러나 이 수평선을 가까이서 보면 무수히 난 조각 칼의 자국이 마치 바다에 난 상처처럼 드러난다.


《허물》 전시 전경(온수공간, 2020) © 임재형

또 다른 전시작인 ‘시든 붓질’(2020)과 ‘대설’(2019) 연작은 한번 그린 작업을 다시 그리는 방식으로 사라졌거나 곧 사라질 존재의 시간을 가시화한다. 작가는 유동적인 재료로 빠르게 그린 적 있는 작업의 일부를 확대하여 종이에 다시 연필로 건조하게, 그리고 느리게 이전 재료의 물성과 질감을 성실히 살려 그렸다.


임재형, 〈시든 붓질〉, 2020, 종이에 연필, 98x70cm (4점 중 1점) © 임재형

각 작업의 소재인 시든 식물과 눈송이는 이미 어느 시간을 보내고 사라지거나 이내 사라질 대상이다. 임재형은 마른 것을 수성재료로 그려 흐르는 자국으로 남기고, 내리는 눈이 조만간 녹아 없어지기 전에 꾸덕한 물감으로 남겼다. 그리고 이것을 기록한 그림의 물성을 훗날 다시 연필로 재현하였다.
 
그가 더듬어 그리는 시간이 여러 겹의 층위로 구조화될 수록, 관객은 작가에게 곁을 준 것들을 더 느리게 더듬게 된다.


임재형, 〈세대〉, 2022, 종이에 연필, 72x91cm (9점 중 1점) © 임재형

이렇듯 임재형은 상실에 대한 태도를 형식화하며 그리기의 의미를 숙고하고, ‘어떻게 그릴까’의 문제를 고민하며 부재한 것의 의미를 구체화하는 일에 천착해 왔다.
 
그리고 2022년 인천아트플랫폼 입주 기간 동안 작가는 ‘세대’라는 새로운 화두를 품고 작업을 전개해 나갔다. ‘세대(世代)’의 사전적 정의는 ‘같은 시대를 살아가는 공통의 의식을 가지는 비슷한 연령층의 사람’으로, 작가는 개인에서부터 그가 속한 가족, 나아가 문화권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규모의 집단을 경험과 시간에 따라 규정하고 나누는 단위로서의 ‘세대’에 주목한다.
 
그리고 세대를 맴돌고 있는 여러 감정과 시선—동일한 경험에서 형성된 특정 관점의 공유 또는 단절, 이를 토대로 이루어지는 포용과 배제, 그리고 이 현상을 바라보는 주체의 심리적 반응—에 초점을 맞춰 다층적인 시간성을 살핀다. 이는 곧 세계를 향한 관점의 반복적인 탄생과 소멸을 조망하는 일이기도 하다.


《바다, 연기, 그늘》 전시 전경(인천아트플랫폼, 2022) © 임재형

예를 들어, 개인전 《바다, 연기, 그늘》(인천아트플랫폼, 2022)에서 임재형은 세월호 사건과 그 이후의 일상, 노트르담 대성당 화재 그리고 가족의 죽음 등 사회적/개인적 상실의 경험을 아우르는 작업을 공유했다.
 
여기서 발견하는 이미지는 '같은 세대에게 일어난 사건', '다음 세대에는 이미지로만 전해질 이야기', '하나둘 떠나가는 이전 세대의 사람들'에 관한 이야기로 볼 수 있을 것이다.
 
작가는 가깝거나 먼 대상을 다룰 때 적절한 윤리적 거리를 가늠하고, 그 거리를 유지하며 그리려고 노력한다. 그래서 어떤 그림은 너무 에둘러 그린 나머지 무엇에 관한 것인지 모호하게 보이기도 한다. 임재형은 이러한 그리기의 쓸모와 의미를 고민하는 일 또한 작업의 중요한 부분으로 여긴다.


《바다, 연기, 그늘》 전시 전경(인천아트플랫폼, 2022) © 임재형

전시의 제목을 이루는 세 단어 ‘바다, 연기, 그늘’은 작업 전면에 등장하거나 때로는 암시적으로 등장하는 비정형적인 존재로, 끝없이 변화하거나 이내 사라지기도 한다. 그 비정형성은 각각 밀물과 썰물과 같이 해수면의 높이차를 일으키는 달의 힘이나 연소하는 어떤 것 그리고 광원과 같이 다른 속성을 가진 것과 관계를 맺으므로 구현된다.
 
작가가 포착한 변화 또는 사라짐의 한순간을 붙잡아 세워 그린 그림은 오히려 고정된 형상이 없는 무상(無相)의 속성을 상기시킨다. 그러므로 바다, 연기, 그늘은 무상(無常)함에 대한 메타포일 수 있다.


임재형, 〈세대〉, 2022, 종이에 연필, 216x285cm (총 9점, 각 72x91cm) © 임재형

‘바다, 연기, 그늘’은 우리 주변에 흔히 발견할 수 있다는 속성으로 인해 서로 다른 장소와 사람을 떠올리게 하고, 사건을 연관 짓게 하는 매개체가 되기도 한다.
 
작가는 물놀이하는 어린아이와 작가 자신에게 서로 다른 바다의 의미를 짐작해보거나 5년의 시차를 두고 같은 날 벌어진 두 사건을 통해 ‘수많은 죽음’과 ‘누구도 죽지 않음’의 차이를 절실히 느껴보는가 하면, 세계적인 종교의 상징물이 소실된 사건과 알려지지 않은 한 종교인의 죽음을 견주어 봄을 통해 이를 통감한다.
 
이때 작가에게 그리기의 시간은 직관적으로 선택한 소재 간의 관계와 의미를 거듭 묻고 곱씹어보는 느린 시간이 된다.


《가장 먼 곳》 전시 전경(상업화랑, 2024) © 임재형

그리고 2024년 상업화랑에서 열린 개인전 《가장 먼 곳》의 작업들은 잘린 가지들이 목을 내민 채 멈춰 있는 겨울 연못에서 앞선 세대의 흔적과 다음 세대의 기약이 공존하는 풍경을 목도한 경험을 바탕으로 전개되었다.
 
떠나간 것과 아직 오지 않은 것, 지나가고 있는 것으로 가득한 풍경 속에서 작가는 읽을 수 없는 글을 필사하듯이 가지의 모양을 옮겼다. 그리고 자간과 행간을 헤아리듯이, 쉼없이 흘러가는 하늘을 비추는 수면의 색을 채워 나갔다.


임재형, 〈나날〉, 2024, 종이에 목판화, 100x560cm © 임재형

그 중 〈나날〉(2024)은 총 8장의 그림으로 구성된 작업으로, 첫 장과 마지막 장 사이에 세 장의 그림이 반복되는 구조를 지닌다. 이는 한 번 뿐인 삶의 시작과 끝 사이에서 끊임없이 반복되는 낮과 밤, 계절, 그리고 일상의 시간을 은유한다. 제목인 ‘나날’ 역시 반복되는 모든 날을 의미하면서도, 각각의 날이 서로 다른 고유한 시간임을 드러낸다.
 
그림 속 흑과 백, 있는 것과 없는 것, 가지와 가지 아닌 것, 물과 물 아닌 것은 같은 테두리를 공유하며 맞닿은 채 서로의 모양을 규정한다.


임재형, 〈몽타주〉, 2023, 캔버스에 아크릴, 각 194x259cm (총 3점) © 임재형

한편, ‘몽타주’(2023) 연작은 무관한 경험을 연관 지으며 의미의 체계를 만들어가는 개인의 관점에 관한 그림이다. 삼각형 구조 위에 배치된 그림들은 정해진 순서 없이 제시되며, 관객은 한 번에 하나의 장면만 볼 수 있다. 따라서 각각의 이미지가 하나의 서사를 이루는 것이 아니라, 관객이 작품들을 오가며 스스로 관계를 맺고 의미를 만들어내게 된다.
 
전시를 이루는 여러 갈래의 작품들은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며 해석된다. 어떤 이미지를 중심에 두느냐에 따라 연못 풍경은 죽음의 은유가 되고, 창과 문은 상실 이후의 일상을 상기시키는 장면이 될 수 있다. 이처럼 작품의 의미는 고정되어 있지 않으며, 관객의 경험과 시선에 따라 서로 다른 맥락 속에서 새롭게 구성된다.


임재형, 〈연못〉, 2023, 캔버스에 아크릴, 유채, 194x259cm © 임재형

이처럼 임재형은 개인적/사회적 상실의 이미지를 수집하고, 이를 다양한 방식으로 그리며 ‘사라짐’과 ‘그리기’의 문제를 연관 지어 탐구해 왔다. 그의 회화는 명확한 재현보다 희미한 실루엣과 여백을 강조하며, 관객으로 하여금 부재의 감각과 마주하도록 이끈다.
 
이러한 그의 화면은 풍경을 묘사하는 데 머무르지 않고, 시간이 남긴 흔적과 그 안에 스며든 정서를 시각화하는 장소로 작동한다. 결과적으로 임재형의 회화는 재현을 넘어 존재와 부재 사이의 관계를 성찰하게 하는 사유의 공간을 만들어낸다.

"무심하거나 담담한 인상의 그림들은 자신의 의미를 주장하거나 무언가를 전달하려 하기보다 그저 거기에 있는 것처럼 보인다. 때문에 그림들은 끝내 온전히 파악할 수 없는 수수께끼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이는 보는 이에 따라 해소되지 않는 찜찜함, 혹은 거듭 들여다보고 싶은 호기심을 불러일으킬 수 있을 것이다." (임재형, 작가 노트)


임재형 작가 © Artue

임재형은 서울대학교에서 서양화과를 졸업하고, 동대학원 서양화과 판화 전공으로 석사 학위를 취득했다. 개인전으로는 《두 번째 삶》(PS CENTER, 서울, 2024), 《가장 먼 곳》(상업화랑, 서울, 2024), 《바다, 연기, 그늘》(인천아트플랫폼, 인천, 2022), 《허물》(온수공간, 서울, 2020), 《행방》(쇼앤텔, 서울, 2020) 등이 있다.
 
또한 그는 《무형의 경계》(파이프갤러리, 서울, 2025), 《Paint it Black》(아마도예술공간, 서울, 2024), 《Paranormal Opera》(대안공간 루프, 서울, 2022), 《노보시비르스크 국제현대판화트리엔날레》(노보시비르스크 주립미술관, 노보시비르스크, 러시아, 2021), 《당신의 K에 대하여》(SeMA 창고, 서울, 2020) 등 다수의 단체전에 참여했다.
 
임재형은 청주미술창작스튜디오(2024), 푸른지대창작샘터(2023), 인천아트플랫폼(2022) 등의 레지던시 프로그램에 입주 작가로 선정된 바 있다.

Reference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