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검은 사각형은 무엇인가를 투명하게 비추는 창이 아니라, 그 자체를 지시한다는 점에서 말레비치의 검은 사각형과도 비교될 수 있다. 말레비치의 〈검은 사각형〉은 서양미술사에서 서구미학의 오랜 전통인 재현의 역사에 종지부를 찍은 작품으로 평가된다. 그의 〈검은 사각형〉은 1913년 미래주의 오페라 〈태양에 대한 승리〉 무대의 가림 막으로부터 영감 받은 것이다.
관중석이 텅 빈 무인의 소우주인 극장에 그림을 설치한 바 있는 최수정의 《확산희곡》전(2013)처럼, 세상은 축약된 무대이며, 이 무대에서 볼 것이라고는 여러 겹 드리워진 막들일 뿐이다. 왜냐하면 이 무대에서는 배우도, 기승전결을 가지는 이야기의 구성도, 심지어는 그 모든 것을 관장하는 전지전능한 연출자도 부재하는 이상한 무대였기 때문이다. 그것이 만약 무대라면, 재현이 아니라 생성과 사건의 무대일 것이다. 원근법의 역사가 보여주듯이 재현은 원근법적 무대를 전제한다.
무대 뒤에 전지전능한 존재를 전제하는 무대는 형이상학과 밀접하다. 거기에는 무한소실점이라는 신성한 위치가 있다. 여러 매체, 여러 작품을 통해 간격 그 자체를 문제 삼는 최수정에게 그러한 무대는 파괴되기 위해서만 건설된다. 역설은 그녀의 모든 작품에 끈질기게 따라붙는다. 그림은 물론, 소리, 빛 등이 총동원된 그 전시, 또는 무대는 세상을 더 실감나게 재현하기 위한 장치가 아니라, 무대 속의 무대, 틀 속의 틀, 그림 속의 그림을 위한 비유의 장이다.
꼬리를 무는 메아리에서 메시지는 불확실해지고, 구조적 장치만 모습을 드러낸다. 장치들 안팎에 산포되어 있는 작은 도상들은 자기의 명확한 자리를 갖고 있지 않다. 묵시록적으로 쇄도하는 도상들은 그들이 서로 자리를 바꾼다한 들 크게 달라 보이지 않는다. 한번 털면 후두둑 떨어질 것 같은 깊이 없는 그림들이다. 메타픽션의 특징을 가지는 최수정의 작품에서 환영은 사라지고 표면만 남지만, 그것은 깊은 표면이며, 모든 것이 혼융되는 어떤 판을 비유한다.
작품 〈묵시〉는 인간의 희망을 표현하는 문구들--‘땅에서 금을 캘 것’, ‘좋은 징조’, ‘반가운 손님 올 것’, ’고목에 꽃피는 형국’, ‘절호의 찬스’ 등--과 재난의 이미지들, 그리고 부서진 조각상들의 이미지를 바느질로 합친 것이다. 바느질한 실이 드러나 있는 이 작품은 희망과 현실, 그리고 허구 간의 간극이 있다. 현실은 변증법적인 종합이나 화해가 아니라, 이질적인 것들의 봉합이다. 니이체가 객관성과 권력에의 의지를 대조시켰듯이, 봉합하는 것도 힘이고 봉합을 터트리는 것도 힘이다.
역사에는 좋은 의도에서 시작되었지만 나쁜 결과를 맺은 역설적 사건들이 넘쳐난다. 암흑을 걷어낸 계몽의 시대가 열린지도 꽤 오래되었지만, 계몽자체가 신화가 되었고, 특히 재난의 신화가 되었음이 포스트모던 사회에서 분명해지고 있다. 포스트모더니즘은 작품 속 낡은 조각상처럼, 전대미문의 새로움이라는 외양을 취하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