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날과 같이 인위적이고 인공적인 것들로 가득한 시대에서 자연스러운 것을 추구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것처럼 보인다. 텔레비전에서 흔하게 볼 수 있는 요리 관련 프로그램에서도 요리사들은 좋은 재료를 구해 재료 본연의 맛을 찾는 데 열광한다. 숙련된 손길로 좋은 재료를 다듬어서 균형 잡힌 맛을 만들어내고 사람들은 깊이가 느껴지는 맛에 건강해지는 기운을 받는다.
무언가를 만들어내는 사람이라는 점에서 공통점이 있는 화가 역시 그림을 그리기 위해 좋은 천, 나무, 못, 프라이밍 재료, 물감 등 최고의 재료를 찾기 위해 고군분투 한다. 자연과 가까운 재료를 찾아 힘을 빼고 자연스럽게 붓과 물감, 천, 그리고 작가의 몸이 하나가 되는 과정을 통해 한 점의 그림이 완성된다. 무더운 여름날 작업실에서 만난 박경률을 떠올리며, 그가 강조해서 말했던 ‘자연스러움’의 의미에 대해 생각해보게 되었다.
그림 안에서 : 새로운 시간성의 창안
박경률의 작품을 연도순으로 살펴보다보면 화면 구성방식, 채색 기법, 색 등 거의 모든 측면에서 지속적으로 변화를 거듭해 온 것을 알 수 있다. 자신만의 시그니처 스타일을 만들어 반복하지 않는 대신, 그는 자신을 둘러싼 환경, 사람, 장소에 자신을 내맡겨 흐르는 물처럼 유동하기를 선택했다. 초기 작업이 비교적 배경과 대상의 구분이 분명하고, 꼼꼼한 스케치와 채색의 과정을 통해 하나의 완결된 닫힌 구조로 만들어졌다면, 현재의 작업은 정 반대에 가깝다.
그 예로 〈For You Who Do Not Listen to Me〉(2017)를 살펴보면, 배경과 대상을 구분하기 어렵도록 다양한 층위의 레이어가 얼기설기 뒤얽혀 있다. 실질적으로 이 그림을 ‘읽는’ 하나의 방법을 찾기란 불가능한 일처럼 보인다. 왜냐하면 애초에 기승전결을 가진 완결된 이야기가 작품 안에 존재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이 작품에는 하나의 긴 이야기보다는 단편적인 장면들이 옴니버스식으로 이어져나간다.
옴니버스식의 구성이라고 느끼는 이유는 그가 그리는 대상의 종류나 표현 기법 역시 하나로 통일되지 않고 제각각이라는 데에서 기인한다. 화면 안에는 절단된 신체와 키보드 자판의 따옴표 표식과 같이 전혀 다른 카테고리로 분류되는 이미지들이 공존한다. 그가 그리는 대상뿐만 아니라 그것을 표현하는 방식에서도 다양한 시대의 기법이 혼종적으로 나타난다. 어떤 부분은 사실주의적으로 자세하게 묘사하고, 또 어떤 부분은 그래픽 디자인과 같이 선으로만 처리하기도 한다.
위 작품에서 드러나는 시간의 개념은 우리가 인터넷을 통해 경험하는 시간과 닮아 있다. 모니터 위로 접하는 세상은 과거와 현재, 미래를 손쉽게 넘나들며 순차적인 시간의 개념을 뛰어 넘도록 한다. 유튜브에서 요한 슈트라우스 2세의 봄의 왈츠를 듣고자 검색하면, 호치민 심포니 오케스트라, 이루마, 아마추어 연주자의 커버 연주까지 모두 한 화면에 펼쳐진다. 개인의 의식의 흐름에 따라 시간과 공간을 뛰어넘는 여행이 가능해진 것이다.
이제는 하나의 권위 있는 목소리가 존재하지 않는 대신, 수백 수천가지의 다른 의견들이 공존하고 온라인 네트워크를 통해 연결된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박경률 역시 미술의 역사 속에서 존재해 온 여러 자산에 자유롭게 접근하고 사용하며, 작금의 상황에 부합하는 새로운 시간성을 작품 속에서 펼쳐 보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