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stallation view of Jiyoung Yoon, Korea Artist Prize 2024 ©MMCA

취약하다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누군가의 신체적·정서적 약함과 위태로움이며, 그 신체가 사회적 생존이라는 경합의 장에서 얻는 감각이자 현실을 의미한다. 누군가의 취약함에 대해, 혹은 취약한 이들에 대해 이야기할 때, 우리는 곧장 치료, 또는 보호라는 해결책을 떠올리곤 한다. 건강하고 자립적인 한 개인으로서의 역할을(대개는 노동을) 너끈히 해낼 수 있도록 재활과 정상성을 위한 의학적, 경제적 대책을 강구한다. 그러나 동시대 철학자들이 입을 모아 이야기하듯, 이 취약함은 이미 계급화, 젠더화, 인종화되어 있다. 취약한 몸은 생물학적인 동시에 사회적·정치적이며 어떤 삶의 조건이 불평등하다는 표지가 된다. 주디스 버틀러(Judith Butler)는 “삶을 다양하게 지속시키는 조건들 없이 삶은 있을 수 없으며, 그러한 조건들은 전적으로 사회적”2이라고 했다. 그러나 여기서 취약함, 위태로움은 삶이 지닌 공동체적 본성을 일깨우는 근간이기도 하다. 취약함 그 자체가 바로 우리 삶의 본질이며, 그래서 우리는 결국 누군가에 의존해 살 수밖에 없는 존재라는 것을 떠올리게 하기 때문이다. 그러한 신체적 상호 의존성과 연관성이야말로 우리가 정치를 사유하는 근간이 되어야 한다.

하지만 감상을 좀 덜어 내 보자. ‘정치’라는 말은 어떤 세대에게 여전히 숭고한 말이겠지만, 어떤 세대에게는 이제 누더기가 되어서 쓰레기통에 내던져도 될 만한 말이 되었다. 공동체라는 말도, 연대라는 말도 석화되어 부서져 내린 지 한참이다. 이런 시대에 삶의 연결성, 공동체적 본성을 미술이 이야기할 수 있을까. 이 냉소와 비관의 시대, 각자도생의 시대에 “우리는 연결되어 있다”고 말하려는 예술가라면, 그/그녀는 누구보다 강인한 신념을(혹은 낙관을?) 지니고, 다수에게(또 소수자들에게) 메시지를 전달할 수 있는 소통 가능성(더 포괄적으로 말하자면 사회성)을 갖춰야 하지 않을까?

윤지영은, 내가 아는 한, 그런 사람이 못 된다. 그러한 강인함, 외향성, 낙관과는 아주 거리가 먼 사람이다. 어린 시절 심한 피부 질환에 시달렸던 사람, 여전히 장염을 비롯해 여러 면역 질환에 시달리는 사람, 자신의 신체적 취약함과 경계를 항상 의식하는 사람, 자의식을 호방하게 확장하기보다 외부 환경에 자극받고 자주 고통받는 사람. 그런데 윤지영은 작업에 대해 말할 때 꼭 이런 말을 덧붙이곤 한다. “사회의 한 구성원으로서, 그리고 한 여성으로서…” (내 기억에, 그녀에게서 “한 작가로서”와 같은 말을 들은 적은 없는 것 같다.) 몇 해 전 그녀를 처음 만나 이 말을 들었을 때 꽤 생경한 느낌이 들었다. 그 평범한 말이 매우 단호하게 들렸는데, 그 단호함은 당당한 권리의 선언이 아니라 어떤 다짐에 가까웠기 때문이다. (우리는 세월호나 재난이라는 말을 굳이 입 밖으로 내지 않았다.) 누군가의 고통과 죽음을 초래하는 구조를 부릅뜬 눈으로 지켜보고 이에 연루되어 있는 나 자신을 기어이 의식하겠다는 말이었기 때문이다. 조각의 형식으로 펼쳐 놓는 그녀의 작업들에서 ‘사회’, ‘관계’라는 주제 의식은 이러한 취약함과 다짐에서 출발한다. 공적 자아라든가 신념의 연대가 아니라, 그렇게 취약하고 결핍되어 있고 상실로 아픈 존재들이 서로를 녹이고 때우고 불어넣는, 그러한 관계의 존재론에서 출발한다.


나는 나/너의 껍질을 부수고 착지한다

윤지영이 석사 시절 만든 작업 가운데 상체에 걸치는 노란 폼 상자가 있다. 기록된 사진에서 작가는 이 ‘상자 조끼’를 다른 이의 도움을 받아 간신히 착용하고 문 뒤 벽장처럼 보이는 가설물 안으로 들어간다. 그리고 노란 셀로판지 칸막이 뒤에 서서 사람들과 대화한다. 그 광경을 본 나는 ‘저것은 일종의 스퀴즈 머신(squeeze machine)이 아닌가?’라는 생각이 퍼뜩 들었다. 동물학자이자 신경 다양성 및 자폐 권리 운동가인 템플 그랜딘(Temple Grandin)의 이야기를 다룬 영화 〈템플 그랜딘〉에서 그랜딘은 이모의 텍사스 농장에서 예방 주사를 놓기 위해 소를 안정시키는 기계 장치를 발견하고, 이와 비슷하게 자신을 옥죄어 주는 장치, 스퀴즈 머신을 개발한다. 대학이라는 새로운 공간에서 자신에게 불안과 과호흡이 찾아올 때 그녀는 그 안으로 들어가 스스로를 추스르는 법을 익힌다. 사람과의 접촉을 싫어하는 그랜딘에게 기계의 압박은 편안함과 심리적 안정감을 준다. 영화 속 대사를 빌자면, “사람이 안아 주는 것은 싫지만 기계가 안아 주는 것은 좋다”는 것이다.

〈복어마냥〉(2013)은 윤지영이 위스콘신주의 한 레지던시에서 거주할 때 제작했던 퍼포먼스 영상 작업이다. 영상 속에서 그녀는 양봉가처럼 방제복과 망사 마스크로 온몸을 감싸고 항공기 구명 조끼처럼 생긴 망토(그녀는 이것을 직접 만들었다)를 걸친 채 들판과 숲을 탐사한다. 마치 어떤 바이러스가 있을지 모를 행성에 착륙한 우주인처럼 그녀는 평온한 들판과 초목 사이를 거닌다. 도깨비풀 같은 식물을 만났는지 그녀는 달라붙는 것들에 손사래를 치다가 망토에 달린 튜브를 훅 불어 복어처럼 조끼를 부풀린다. 이 영상에서 작가가 입었던 방제복과 망토, 노란 상자 조끼 등은 〈침투장비모둠〉(2013–2014)이라는 작업으로 실험실 캐비닛의 진열품처럼 전시된다. 그런데 사실 저 물건들은 침투 장비라기보다 방호 장비이지 않은가. 왜소하고 허약한 아시안 유색 인종 여성으로서 그녀의 일상은 신체적·심리적 방어전의 나날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다른 세계에 ‘침투’한 이방인이면서, 경험해 보지 못한 새로운 환경에 노출된 허약한 신체. 흔히 자폐 스펙트럼 장애인이 겪는 주요한 문제들로, 감각 처리, 언어의 지체와 장애, 사회적 교류 능력의 결핍, 자존심 문제 등이 열거된다. 등가화시킬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이러한 문제는 비장애인이라 할지라도 아시안 유색인이 영어권에 갔을 때 겪게 되는 일련의 증상들과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이처럼 그녀의 작업들은 자신의 취약한 피부(자아)와 맞닿는 경계들에 완충 지대를 만드는 방식으로 시작되었다.

〈달을보듯이보기〉(2013–2014)는 윤지영이 작업의 테마를 이러한 자신의 완충 지대로부터, 타인들과의 신뢰, 윤리적 책무의 수행, 희생과 헌신으로 돌리는 전환점으로 보인다. 작가는 타인에게 맡겨진 동시에 누군가의 희생을 바탕으로 한 개인의 안위라는 신뢰와 보상의 구조를 하나의 상황으로 연출하고 수행한다. 그녀는 높은 층고의 천장에 머리카락이 묶인 채 철봉에 매달려 있고 양쪽에서 사다리를 타고 올라간 동료들이 가위로 머리카락을 자른다. 그녀의 팔 힘이 다 빠지기 전에 때맞춰 머리카락을 잘라야 하고, 떨어질 때 그녀는 빈 거북이 등딱지 위에 정확히 착지해야 다치지 않는다. 그녀의 착지처럼, 우리는 누군가의 딱딱해진 피부(거북이 등딱지는 뼈가 아니라, 손톱과 같은 단백질 각질층이다)를 부수고 아슬아슬하게 삶에 착륙한다. 이 작업은 한편으로는 신뢰의 구조를, 한편으로는 희생의 구조를 보여 준다. 잘린 머리카락은 희생에 대한 감사와 헌신의 봉헌으로 바쳐진다.

특히 이러한 희생의 구조는 〈적당한선에서〉(2015)와 〈모난절충〉(2016)에서 매번 다른 방식으로 재상연된다. 〈적당한선에서〉에서는 한쪽 모서리로 서기 위해서 싸개가 주욱 잡아당겨지는 사각 평판 조각, 다른 것들을 일으키기 위해 자기 몸을 누여 버티는 조각이 등장한다. 한편에는 언제든 다른 모든 조각들을 위태롭게 만들 수 있는 기계 체조 링 한 쌍이 균형감을 뽐내며 매달려 있다. 모든 조각들이 줄로 연결되어 팽팽한 긴장감 속에서 서로를 버틴다. 작가는 이것이 마치 주어진 삶에 적응하기 위한 개인들의 타협과 같다고 말한다.3 이 작업과 같은 맥락에 있는 작업 〈모난절충〉에서 작가는 지름이 50cm인 공 하나와 지름 25cm의 공 8개를 연결해 설치했는데, 큰 공의 부피는 나머지 공 8개의 부피를 합한 것과 같다. 여기서는 나머지 8개를 눌러 큰 공 하나에만 바람을 넣거나, 큰 공 하나를 희생시켜 8개의 구에 바람을 넣은 상태가 전시된다. 또 반으로 갈라졌지만 간신히 맞붙은 반구들에 여러 개의 줄이 관통한다. 이 또한 구(球)라는 형태를 유지하기 위해서 어떤 다른 존재들의 노력이 필요한지를 보여 준다(우리는 대개 원이나 구에 완전체의 의미를 부여한다). 하나의 무대를 이루는 이러한 조각들의 상연은 얼핏 보면 그 전모를 알 수 없는 수수께끼 우화 같지만, 어떤 서사가 숨어 있는 게 아니라 철저히 조각들의 물성과 역학에 대한 이야기일 뿐이다. 그러나 이 수학적이고 철저히 물리적인 상황 안에, 특히 이 거미줄 같은 연결망 속에 버티기와 희생 같은 관계의 가능성뿐 아니라 어떤 목표나 위장으로 인한 불안, 갈등, 위험까지 우리가 매일 겪는 신체적이면서도 지극히 사회적인 정동이 가득 차 있다.

(Left) Jiyoung Yoon, Yellow Blues_…, 2021, Beeswax, stainless steel, Dimensions variable. Courtesy of the artist. ⓒ Jiyoung Yoon. (Right) Jiyoung Yoon, Ex-voto, 2024, Tin, 18×25×0.5 cm (1), 11×12×1.2 cm (4). ⓒ Jiyoung Yoon.

배치로서의 신체, 기능으로서의 신체

윤지영은 이처럼 조각을 일종의 신체로 구현한다. 하지만 몸의 형태를 모방하는 것이 아니라 대개 유기체처럼 기능하는 오브제를 만든다. 구이든, 입방체이든, 깔때기이든 아니면 길고 부드럽거나 뾰족한 가시가 달린 것이든, 그것은 몸에서 출발한 것이면서도 인간 신체의 ‘모양’과는 별 상관이 없다. 오히려 재료의 물성이 신체적 의미를 발생시킬 때가 많은데, 캐스팅이나 몰딩의 조형 과정에서 일시적으로 존재해야 하는 뼈와 싸개의 역할(겉틀/속틀과 같은)이나, 온도, 습도, 장력 등과 같은 외부의 힘에 반응하고 변형되는 안과 밖의 상태가 그러한 것이다. 때로 그녀의 조각은 피부와 같은 싸개, 근육이나 뼈와 같이 지지체로서 힘을 발휘하거나 유기체의 소화 작용처럼 속에 삼키거나 밀어 넣은 것들을 쏟아 내기도 한다. 이러한 조각의 신체성은 흔히 인간의 신체를 떠올리게 하지만, 엄밀히 보자면 조각에 ‘인간 동형론적(anthromorphic)’인 의식을 부여하는 일과는 좀 다르다. 오히려 이 조각들의 신체성은 제스처, 정지 상태, 접촉, 움직임으로 이뤄진 형태론적 순간을 출현시키기 때문이다. 그것도 서로의 관계 안에서.

정녕 신체란 무엇인가. 버틀러는 개인적이고 생물학적이라고 여기는 신체의 출현 그 자체가 공적이고 정치적인 협상의 순간이라고 이야기한다. “브뤼노 라투르와 이자벨 스탕제의 논의를 빌려, 출현의 공간을 협상하는 것이 사실은 일종의 생물학적 행위라고, 곧 유기체가 가진 어떤 탐구 능력들 중 하나라고 주장할 수 없을까? 결국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계에서 신체를 갖추고 출현하지 않은 채로 주위 환경을 돌아다니거나 식량을 구할 수는 없는 일이며, 이 세계에 출현한다는 것이 함의하는 취약성과 이동성으로부터 탈출할 수도 없는 법이다. (…) 말하자면, 출현이란 신체가 말하고 행동하기 위해서만이 아니라 고통받고 움직이기 위해, 다른 신체들과 관계를 맺고 자신이 의존하고 있는 환경을 극복하기 위해, 필요를 충족하기 위한 어떤 사회 조직을 확립하기 위해 그 위험을 감내해야 하는 어떤 형태론적 순간일 수밖에 없는 건 아닐까?”4

코로나 팬데믹은 우리에게 신체적 접촉과 연결이 어떤 의미인지, 어떤 순간인지를 다시 상기시켜 주었다. 이는 윤지영이 희생의 구조나 상호 의존 관계가 먼저 가시화되는 조각 설치의 양식으로부터 신체의 경계와 그 취약함을 재탐색하는 계기 또한 되었다. 물론 신체의 체적과 피부는 작가가 〈저_기 저_위_에_선〉(2016), 〈구의 전개도는 없다_맷으로 추정되는〉(2018), 〈레다와 백조〉(2019)와 같은 작업에서부터 천착한 요소이지만, 실리콘 재료를 주로 사용하는 《옐로 블루스_》(2021) 연작에서부터는 본격적인 주제가 된다. 사람의 피부를 쉽게 연상시키고 심지어 성형의 주재료로 쓰이는 실리콘은 온도에 민감하게 반응하며, 굳어지면 힘껏 잡아당길 수 있는 신축성과 탄력을 지녔다. 2021년 국립현대미술관(과천)에서 열린 전시 《젊은 모색》을 통해 선보인 《옐로 블루스_》 연작에서 작가는 여러 가지 형태로 변환될 수 있는 실리콘의 가소성(plasticity)을 이용해 다양한 신체 조각들을 선보였다. 각기 경도가 다른 세 개의 덩어리들이 서로 끌어안고 있는 노란 조각, 서로를 올라타 피라미드를 만든 탁구공 같은 노란 미니 조각들, 노란 줄의 결박에 표면이 파이고 깨져 가는 슬픈 구 조각 등이 등장했다. 이들은 이제 줄로 연결됨 없이 섬처럼 서로 저만치 떨어져 한 편의 옴니버스와 같은 광경을 연출한다. 가장자리에는 팔꿈치 아래부터 손을 캐스팅한 석고 조각이 놓여 있는데, 마치 떨어져 내리는 눈이나 낙엽을 받으려는 듯한 손의 형상을 띠고 있다. 고요하게 매달려 이들을 비추는 둥근 흑경까지 이 모두가 서정적인 모습을 자아낸다. 이 조각들에는 모두 “옐로 블루스_”라는 작품명이 붙어 있다. 애거서 크리스티(Agatha Christie)의 소설 『봄에 나는 없었다』에서처럼, 작가는 팬데믹 기간 동안 고립 속에서 자신의 행동이나 태도를 곱씹어 보게 되는 자의식의 상태를 표현하고 싶었다고 한다.

윤지영은 올해 원앤제이 갤러리에서 열린 개인전에서 이러한 자의식과 느슨한 고립은 좀 더 드라마틱한 구조로 변주된다. 풍선처럼 덩그러니 바닥에 놓인 얼굴 조각 〈–없는 몸〉(2021)은 “틀 없는 몰드 그리고 하나-여러-얼굴”이라는 부제를 달고 있다. 아시아 여성 머리의 평균적 부피를 지닌 그 얼굴 조각에서 유일하게 개인(윤지영)의 윤곽을 드러내는 것은 살짝 독특한 한쪽 귀의 모양뿐이다. 무엇보다 《옐로 블루스_》 연작에서는 인체의 크기가 의식적으로 사용된다. 채도가 낮은 살굿빛 커튼 뒤로 등장하는 검은 조각 여섯 개의 각 부피는 약 65,416cm³으로 동일한 반면, 구, 입방체, 삼각뿔, 기다란 별기둥, 하트기둥 등의 다면체들로 만들어졌다. 철로 된 조각들의 표면은 99.4% 빛을 흡수하는 아크릴 안료로 칠해져 있어서 입체감보다는 오히려 블랙홀과 같은 심연을 만들어 놓는다. 이들 몸의 입체성을 실감하게 만드는 것은 바로 이들이 걸치고 있는 싸개인데, 각자의 몸으로부터 떠 낸 실리콘 싸개는 서로 바뀌어 있다. 하트기둥은 별기둥의 싸개를 망토처럼 뒤집어썼고, 삼각뿔은 하트기둥의 싸개를 입다 못해 구멍을 뚫어 버렸으며, 삼각뿔의 싸개 속에 포옥 들어간 구는 고양이처럼 귀여운 귀를 얻었다. 그런데 이 싸개들이 자신들의 것이 아니라고 말할 수 있을까? 이 맞지 않는 싸개들은 ‘온전한’ 상태의 자기라는 소망을 달성하기 위한 일련의 과정일 수도 있을까?

이처럼 윤지영의 조각에서 실리콘의 예민함과 가소성은 피부라는 우리의 신체의 경계와 취약함을 드러내기도 하지만, 얼마든지 변형될 수 있다는 희망, 상처, 절망 또한 드러낸다. 차이, 차별, 감염, 혐오의 접면이자 자의식과 쾌락이 발생하는 아주 민감한 지대로서 피부는 자신과 세상의 ‘경계’일 뿐 아니라, 다양한 감각들로 자아를 형성하는 심리적 싸개이기 때문이다. 정신 분석학자 디디에 앙지외(Didier Anzieu)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피부는 피상적이면서도 심층적이다. 피부는 진실하면서도 기만한다. 피부는 지속적으로 고갈되면서도 재생된다. 피부는 신축성이 있지만 전체에서 떨어져 나간 한 조각의 피부는 놀라울 만큼 작게 수축된다. 피부는 자기애적이면서도 성적인 리비도의 투여를 불러일으킨다. 피부는 행복의 장소이면서 유혹의 장소이기도 하다. 피부는 우리에게 즐거움만큼이나 고통도 제공한다.”5


너의 안녕을 빌어

인체와 유사한 체적을 다양한 기하학적 입방체로 변주시키는 《옐로 블루스_》 연작처럼 윤지영의 조각이 지닌 신체성은 형태적, 기능적 유사성을 넘어간다. 그녀는 “입체만으로 신체성을 표현하고 싶다”6고 말하며, 조각의 신체성을 부피, 내지 볼륨(volume)이라는 기하학적 차원으로 추상화시킨다. 볼륨은 어떤 물체가 차지하는 부분, 공간을 추상(抽象)한 기하학적 대상이다. 볼륨은 그 자체로는 형태적으로 비어 있기에, 특정한 개별성도 동일성도 지니고 있지 않다. 인간 크기의 입방체나 다면체를 주로 조각 그 자체로 제시한 이들은 미국의 미니멀리즘 조각가들이었다. 조르주 디디-위베르만(Georges Didi-Huberman)은 토니 스미스(Tony Smith)의 〈Die〉(1962)를 비롯해 미니멀리즘 조각의 입방체들이 지녔던 이 ‘인간 형태론’을 우리에게 인간학적 본성의 심연을 환기시켜 주는 행위적 순간으로 재해석한다.7 그에 따르면, 인간의 신장과 유사한 크기나 볼륨의 단순한 사물들은 고대의 거석이나 관을 떠올리게 만드는데, 이는 말하자면, 인간 형태론적이라기보다 오히려 ‘형태’ 없는 기하학적 유사성으로, 텅 빔의 불안을 일으키면서 우리에게 자신과의 닮음과 부재를 대면케 하는 ‘말 없는 심연’이자 “봉헌하는 유사 초상(quasi-portrait)”이다.8

윤지영의 조각들이 보여 주는 “유사 초상” 또한 그러한 닮음과 부재를 내포하지만, 1960년대 미니멀리즘 조각에서 발견되는 삶과 죽음의 변증법보다 익명적이면서도 서로 결코 무관하지 않은 존재들의 연쇄적인 출현을 가시화한다. 이번 전시에서 선보이는 〈간신히 얼굴 하나〉(2024)는 영어, 포르투갈어, 스페인어, 그리스어를 사용하는 윤지영의 친구들이 서로의 안녕을 바라며 쓴 편지가 하나의 봉헌물로 변형된 조각이다. 작가는 포노그래프의 원시적인 방식을 차용해 친구들의 음성을 밀랍 실린더에 기록한 뒤 이 밀랍 실린더를 녹여 다시 자신의 얼굴로 주조해 냈다. 각기 다른 언어로 말해진 소망들을 물질로 형태화시키고, 이를 다시 신체화시킨 것이다. 실린더에 기록되었던 이들의 소망은 디지털로 재녹음되어 흑경이 가라앉은 우물과 같은 제단에서 메아리처럼 흘러나온다.

사실 이처럼 신체를 본뜬 봉헌물은 미술사 바깥에 깊고 폭넓은 유래를 지니고 있다. 디디-위베르만은 미술사에서 지워진 조악하고 세속적인 중세 봉헌물(ex-voto)의 대부분이 아픈 신체나 그와 연결된 도구들을 밀랍으로 떠 낸 오브제였다고 말한다. 이러한 봉헌물들은 병을 낫게 해 달라는 기원, 혹은 치료의 기적에 대한 감사를 담은 것이지만, 한편으로는 후유증의 유물, 시련의 유물이기도 하다. 디디-위베르만에 따르면, 이 유물들은 종교적 치유에 깃든 접촉의 마법(“그의 옷에 손을 대기만 해도 내가 나으리라”9)을, 유사성의 이미지를 구축하는 다른 마법으로 이행시킨다. 이러한 이행 속에서 밀랍은 “소망의 시간을 확장”시키며, 심지어 변덕스러운 소망을 따라 스스로를 끊임없이 변형시키기도 한다. 밀랍은 여러 기능을 가지며, 그 가소성은 (실리콘보다 훨씬 더!) 유동적이고 반복적이다. 그리고 언제나 새로운 유기체에 들러붙는 형태로 다시 나타난다. 말하자면 밀랍은 그 스스로 재현해야 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쫓아내야 할 ‘증상’과 똑같은 양상을 지닌다는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무엇보다 이 항구적인 변형 속에서 밀랍 그 자체는 모방을 통해(또 감염을 통해) 끊임없이 대체되고 재생되는 우리의 ‘살(flesh)’과 다름없다.

밀랍은 윤지영이 실리콘과 더불어 가장 주요하게 사용해 온 조각적 재료다. 《옐로 블루스_》에서 천정에 철사망으로 매단 노란 구는 바닥의 흑경 위에 놓인 사각 초와 한 쌍을 이룬다. 밀랍으로 만들어진 그 구의 밑면은 불에 타 구멍이 뚫려 있고 여기에서 녹아내린 왁스가 그 아래 작은 사각 틴 케이스에 모여 또 하나의 초가 된 것이다. 이 또한 희생과 재생의 우화를 작동시키지만, 한편으로 밀랍이 지닌 유동적이고 유기적(밀랍은 벌의 신체에서 나온 것이다)인 힘, 살의 작동을 보여 준다. 그것은 우리 신체의 유한함 속에 간직된 소망의 미약한 공간적/시간적 확장 가능성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는 영원성, 초월성과는 거리가 멀다. 타오른 밀랍 초의 질량은 줄기 마련이고, 밀랍으로 만든 봉헌물로서 얼굴 조각의 노란 색은 갈수록 옅어질 것이기 때문이다.

이처럼 변화무쌍하지만 결국에는 유한한 유기체로서 우리 신체와 사물들의 누추한 운명은 오늘날 디지털 미디어의 찬란한 항구적 인벤토리(inventory)와 무척 대비된다. 윤지영의 조각들은 그저 이러한 살의 취약함, 삶의 유한성을 조각의 행위와 기법, 역학으로 제시한다. 무엇보다도 이를 통해 서로의 안녕을 비는 기도의 신체화를 보여 주면서 우리 삶의 고통과 상처가 각인된 공적 신체성을 가시화한다. 동양의 표현에서 오장육부는 신체의 한 기관이지만, 이러한 삶의 고통과 상처가 각인되는 상징적이면서도 지표적인 장소다. 깜짝 놀랄 만한 어떤 타격이 아니라 미처 알아차리지 못하는 사이 몸에 누적되고 각인되는 고통과 부침의 흔적들로서 내장은 그럼에도 끊임없이 우리를 다시 살게 만든다. 〈어떻게 살아야 할 지 몰라 내장을 꺼내 그물을 짓던 때가 있었다.〉(2024)은 작가가 이번 전시를 위해 오랜 시간 손수 바느질하고 엮어 내고 바르고 말린 기원의 그물, 봉헌의 그물이다. 그것은 시련의 유물이면서 서로를 의존하는 힘으로 단단히 얽힌 거대한 기도문의 초상으로 우리 앞에 펼쳐져 있다



1. ‘귀 하나의 자리’는 윤지영의 2018년작, 〈한 모서리의 길이가 약 15cm인 나무 입방체는 어떤 것들의 음각을 숨긴 석고가 되었다〉의 작품 설명에서 가져온 구절이다.
2. Judith Butler, Frames of War: When Is Life Grievable? (London, New York: Verso, 2009), p. 19.
3. 윤지영의 작가 노트.
4. 주디스 버틀러, 『연대하는 신체들과 거리의 정치』, 김응산, 양효실 옮김, 창비, 2020, p. 128.
5. 디디에 앙지외, 『피부 자아』, 권정아, 안석 옮김, 인간희극, 2008, p. 46.
6. 2024년 9월 필자가 나눈 작가와의 대화에서.
7. 이 내용은 김민애의 조각을 다룬 이나라의 다음 글에서 자세히 소개된 바 있다. 이나라, 「이미지 인류학과 동시대 미술: 이미지와 죽음 ⓶ – 죽음의 오브제, 죽음의 장소: 르네상스, 미니멀리즘, 김민애」, 『미술세계』, 2018년 12월호, pp. 144–149.
8. 디디-위베르만은 (마이클 프리드(Michael Fried)에 의해) 인간 형태론이라고 불린 인간 신장 크기의 입방체들이 소위 “선조-유사성”이라 부를 만한 것으로, 형태 없는 형상적 가상성으로 충만한 이미지라고 말한다. 그에 따르면 비유사성에 바쳐진 이러한 유사성은 우리 앞에서 생의 이미지와 죽음의 이미지를 리듬으로 머금고 뱉어 낸다. 조르주 디디-위베르만, 『우리가 보는 것, 우리를 응시하는 것(Ce que nous voyons, ce qui nous regarde)』(이나라 옮김, 미출간)의 「6장 인간형태론과 비유사성(Anthropomorphisme et dissemblance)」 참조. 필자가 미출간 번역본을 살펴볼 수 있게 해 준 이나라에게 감사한다.
9. 마가복음 5장 28절.

Reference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