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iyoung Yoon, χοροπηδάω [choropēdáō], 2024, Single-channel video, color, sound, 20 min. 32 sec. ©Jiyoung Yoon

‘오직 염원하는 수밖에 없을까.’ 지척에서 끊이지 않는 위기와 좌절과 고통에 대하여, 그것을 보고, 듣고, 가까이에서 또는 스스로 겪고 있는 이들이 달리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윤지영이 지금 붙들고 있는 질문과 작업은 비는 마음에 관한 것이다. 완성된 작품을 보지 못하고 그것의 전말을 이해해야 하는 어려움을 달래기 위하여, 작가가 근작에서 주요하게 참조했다는 ‘봉헌물(ex-voto)’ 전통에 관한 논문을 몇 편 읽다가 떠올린 질문은 엉뚱한 것이었다. ‘어떻게 절망하지 않을 수 있을까.’ 이 모든 고통을 겪으면서 어떻게 다시 염원할 수 있는 것일까. 어떻게 끝이 아니라고 할 수 있을까. 인간의 의식에는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달래고자 하는 보편적인 습성이 있다. 죽음 너머, 죽음을 초월한 존재에 대한 희구, 날마다 조금씩 죽어 가는 신체에 대한 의식을 유예하도록 하는 살아 있음에 대한 정신적 관념. 이에 관한 종교와 제의는 인간종의 유구한 문화를 형성하고 있다. 그러나 다시, 어떻게 고통 너머를 바라보고 세계의 잔존을 말할 수 있단 말인가.

가령 위장이 수축하며 심각한 통증을 유발하는 신체적 증상은 흔하게 알려졌지만, 직접 겪어 봐야 비로소 알 수 있는 것이 있다. 알고 있지만 겪어 보면, 겪을 때마다 당혹스럽고 고통스럽다(그럴 것이다). 현기증을 일으키며 숨이 멎을 듯한 강력한 통증에 의식은 하얗게 흐려진다. “육체적 고통은 무언가에 대한 것이거나 무언가를 향한 것이 아니다.” 고통은 그 자신을 제외한 모든 것을 삭제하고 모든 것을 압도한다. 고통 너머에 아무것도 없다는 선언은 고통이 초래한 것이다. 길잡이가 되는 사고는 이러하다. “대상화를 향한 길 위에 고통 자체를 올려놓음으로써 고통의 탈대상화 작용을 뒤집고자 하는 인간의 노력은 실질적이고 윤리적인 중요성으로 가득 찬 기획이다.”1 고통, 그리고 대상. 고통이란 무엇이며 어떻게 인식할 수 있는가. 아니, 그것보다 더욱 직접적이고 실제적인 과제로서, 고통은 어떻게 대상을 만들어 내는가. 고통의 자기 침묵하도록 하는 성질을 지극히 의식하면서 바라본 곳을 바라본다.

‘구멍은 두려움, 고통, 죽음이다.’ 윤지영은 하얀 조개껍질을 바라본다. 조개껍질에 뚫린 구멍 사이로 실을 꿰어 목걸이를 만들던 손이 멈춘다. ‘구멍은 왜 어떻게 생겼을까? 정교한 구멍은 분명 밖에서 뚫린 모양새이다.’ 포식자의 공예적 침략에 희생되어 구멍 뚫린 껍질만 남기고 속이 사라진 연체동물의 운명은 조각의 ‘겉과 속, 감춰진 구조, 각각의 역할’2에 대한 조각가의 사고를 촉구한다. 이때 과거와 미래에서 온 사고의 파편이 구멍에, 두려움과 고통과 죽음의 초점인 깊이에 엮인다. 우리가 고통으로 인해서, 그것의 손아귀에서 벗어나기 위하여 무언가를 의지하고 염원하게 되었다면, 그것은 고통을 대상화하는 것으로써 믿음을 만들어 낸 것이다. 그러므로 작가 윤지영이 ‘표현’이 아니라 ‘염원’을 말할 때, 믿음의 설파가 아니라, 믿음을 만드는 의지(意志)와 의존(依存)의 구조를 드러내려는 그의 시각적 방법에 우선 주목하게 된다.


역량과 취약성의 변증법

균형은 이미 무너졌다. 도저히 어찌할 수 없이 한편이 기울어지는 것을 의식하는 순간에, 역설적으로 자기 언어의 전개에 대한 선명한 예감이 싹텄다. 윤지영의 작업 초기에 관한 이야기이다. 그의 초기 대표작 중 하나로, 단편에 그치지 않고 연작으로 이어진 ‘Dear Peer Artists(동료 예술가들에게)’(2014)는 위기에 관해 논한다. 위기는 작가 자신의 것이자, 특히 예술가로서 작업하며 살아가는 삶의 위태로움에 관한 것으로, 비슷한 처지에서 창작하는 삶을 살아 보려고 마음먹은 많은 예술가가 공유한 문제이기도 하다. 예술가는 어떻게 사는가? 오래된 심리학 이론에 따르면, 인간의 욕구는 단계적 성질을 지니기 때문에 하위 단계의 욕구가 충족되어야 그다음 단계의 욕구가 비로소 발생할 수 있다. 예술 창작에 관한 욕구는 생리적 욕구나 안전의 욕구와는 달리, 애정 및 소속의 욕구, 존중의 욕구, 자아실현의 욕구와 같은 상위 단계의 욕구와 관련될 것이다. 따라서 누군가 창작의 욕구를 지녔다면 그보다 하위의 욕구가 이미 충족되었다고 전제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누구나 알 수 있듯이, 현실은 그렇지 못하다.

〈마슬로우의 오류(Dear Peer Artists 1)〉(2014)는 2차원의 도표 형상을 참조하여 3차원의 조각으로 형상화했다. 심리학자 에이브러햄 매슬로우(Abraham H. Maslow)가 세운 5단계 욕구 단계설의 고전적인 피라미드형 구조를 비판적으로 독해하며, 방사 주기형 다이어그램의 수평적인 구조를 도입한 것이다. 에어 펌프로 부풀린 다섯 개의 구가 서로를 압박하다가 어느 순간 가장 약한 개체가 터지도록 고안됐다. 욕구 단계설의 오류에 대한 지적은 타당하지만, 창작 욕구를 지닌 예술가의 삶이 그대로 ‘괜찮다’고 말할 수는 없다. 윤지영이 자신의 직관에 따라 세운 이론에 따르면, 서로 다른 욕구는 수평적이지만 불가피하게 서로를 억압하는 관계에 놓이고, 결국 균형이 깨져 어딘가 한쪽이 터지게 된다. 각각의 욕구는 가능한 만큼 팽창할 뿐이지만, 부분이 서로 경계하기에 홀로 무한히 커지거나 모든 것이 최대한으로 가득 찰 수 없다. 도표적 형상의 참조에 그치지 않고 인접한 조각의 팽창과 상호 압력의 속성을 개념화한 이 작업은 조각의 논리적 구조를 통해 심리적인 내용을 효과적으로 전달한다.

이어지는 질문. 한쪽 구석이 부서지고 깨진 개체는 어떻게 연명할 수 있을까? 중심 구조가 한번 깨지고 나면 외부에서 주어진 새로운 구조에 의지해 형태를 유지할 수밖에 없다. 〈마슬로우의 오류(Dear Peer Artists 1)〉(2014)는 2차원의 도표 형상을 중심에 둔다. 몸통에 난 구멍 사이를 관통하고 조각의 바깥을 칭칭 감싼 줄은 텅 빈 내부에서 복잡하게 얽혀 있을 것이다. 크기와 질감이 다른 나무창은 구멍과 줄 사이를 관통하며 휘거나 부러져 있다. 여기에 바닥을 바라보고 살짝 고개를 든 타원형 구조가 연결되어 원형 구조를 고정하면서 동시에 움직임을 암시한다. 작가는 사회적 욕구를 만족하거나 해소하는 것과는 별개의 미지의 동력으로 살아가는 예술가들이 사회적 파열에 매개자 역할을 한다는 생각을 바탕으로, 외부의 입력이 외유내강한 매개체(아쿠아 레진)를 통과해 출력되는 구조물을 설계했다.
이처럼 조각 매체의 물리적 개념에 대한 탐구를 사회 심리학적 통찰로 능숙하게 매개하는 윤지영의 시각 언어는 작업 초기부터 눈에 띄었다. 특히, 그의 시각적 방법론 중 ‘매달기’는 다양하게 변주되며 중요한 ‘시각-언어’로 자리 잡는다. 가령, 앞서 언급한 작품의 제목을 포함하여 여러 작품에서 문자 언어를 다루는 방식을 보라. 〈둥근다리의순간〉, 〈적당한선에서〉(2015)와 같이 띄어쓰기를 무시하거나, 〈저_기 저_위_에_선〉(2016)과 같이 마찬가지로 정해진 분리의 원칙을 무시하고 밑줄로 음운을 연결하여 문자 언어를 낯설게 한다. 이렇게 제목에 쓰인 모든 음운이 연결되거나 새로운 관계 속에 배치되는 것과 같이, 작품의 물리적 형상 또한 매달기의 방법을 통해 부분과 전체를 특수한 연결 관계 속에서 드러나게 한다.

전통적으로 조각은 바닥에 놓인다. 바닥과의 관계야말로 조각의 근본적인 매체적 조건 중 하나를 형성한다(했다)고 할 수 있으리라. 근세 이후 미술의 역사를 돌이켜 보면, 건축을 장식하는 부속품에서 독립한 조각은 물리적 독립의 표식으로서 좌대를 가지게 되었다. 서구 주도의 모더니즘 미술에서 조각의 좌대는 조각의 부속품이 아니라 조각의 일부로서 재고된 바 있다. 그러므로 조각은 조각의 몸통과 구성적으로 어우러지는 이런저런 조형적 받침과 함께 제시되기도 할뿐더러, 좌대에서 내려올 수도 있게 된다. 조각 작품이 분리된 영역을 표시하는 관습에서 벗어나면, 조각은 다시 건축과 풍경 속으로 녹아들 수도 있다. 이런 식으로 현대 미술의 확장된 표현 형식의 역사를 돌아보면 조각의 내적 속성에 관한 관심은 이미 오래전에 지나간 페이지에나 적혀 있을 것 같다.

윤지영의 시각적 실천에 주목해야 하는 한 가지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는 물질적 재료를 꾸준히 모색하고 시험하며 고전적인 조각가의 미덕을 유지하는 동시에, 조각 작품의 관습적 제작에서 벗어나 제작의 관습에 관한 독창적인 개념적 탐구를 지속적으로 보여 준다. 작가는 조각이라는 고전적인 매체가 품고 있는 시각 언어의 가능성에서 미술의 동시대적 실천의 근거를 찾는다. 그의 작업에서 확장되는 것의 요체는 조각이 물리적으로 점유하는 공간이나 설치의 맥락이 아니다. 조각의 구조에 대한 사고이자, 구조적 사고의 감각적 확장의 가능성이다. 여기서 ‘매달기’에 관한 이야기로 돌아가 보자. 조각을 공중에 매달 때는 세부 요소 간의 관계와 균형이 더욱 중요해진다. 윤지영의 작업에서 때로 바닥에 떨어진 것은 깨지거나 속이 터져 있다. 추상화된 개체의 연쇄 작용은 작가가 오랫동안 천착했던 ‘희생이나 믿음의 구조’라는 주제를 드러낸다.

〈달을보듯이보기〉(2013–2014)에서 작가는 아찔한 순간을 연출한다. 천고가 높은 공간의 천장에 자신의 긴 머리카락을 묶고 그 바로 아래 세워 놓은 철봉에 매달려 버티면서 머릿가죽이 벗겨질 수도 있는 위험한 상황에 스스로를 노출한다. 양쪽 사다리에 올라선 두 명의 조력자가 천장에 고정된 머리카락의 매듭을 사무용 가위로 잘라 내어 몸이 자유로워지고 나면, 작가는 양손을 풀고 떨어진다. 마지막으로 낙하지점의 바닥에 놓인 빈 거북이 등딱지를 밟아 깨트리며 긴장감 속에 착지한다. 위험을 무릅쓴 행위는 거북이 등딱지를 부수고 나서야 안전한 상태에 도달한다. 이렇게 ‘선행된 희생이 이어지는 희생을 정당화할 수 있나’라는 작가의 질문이 특유의 시각적 논리 구조 안에 펼쳐졌다. 물질적 조각이 아니라 퍼포먼스 형식의 작업에서도, 조각에 관한 개념적 탐구를 통해 찾은 창작의 방법이 흥미롭게 도입된다. 한편, 작업 과정에서 작가는 스스로 필사적으로 매달려 버티는 힘과 함께, 타인을 전적으로 신뢰하고 상대는 중대한 책임을 다해야 하는 상호 의존의 구조를 만들었다. 위험을 대상화할 수 있는 창작의 힘에 대한 믿음을 보여 줬다고 생각한다.

Jiyoung Yoon, Me, No, 2021, Heart-shaped prism in star-shaped prism wrapping, star-shaped prism in sphere wrapping, sphere in triangular pyramid wrapping, cylinder in cuboid wrapping, cuboid in cylinder wrapping, triangular pyramid in heartshaped prism wrapping, steel, acrylic paint absorbs up to 99.4% light, platinum cure silicone rubber, silicone tint, transparent nylon thread, The volume of each of the six bodies is 65,416 cm³ give or take a few. ⓒ Jiyoung Yoon

안과 밖

윤지영의 작업에는 두 가지 차원의 지평이 공평한 무게감을 가지고 교차한다. 한 가지는 작가의 개인적인 체험이나 자각으로부터 시작해서 사회적인 인식으로 이어지는 주제적 문제의식이다. 다른 하나는 조각의 시각성에 대한 이해와 해석으로부터 떠오르는 물질에 대한 개념적 아이디어이다. 결과적으로 나타난 작업에는 사회적이고 정치적인 사건의 기표가 직접적으로 등장하지 않는다. 가장 단순하게는 감각적으로 디자인된 사물로, 좀 더 복잡하게는 조각 매체에 관한 메타 담론을 펼치는 것처럼 보인다. 감상의 해석은 종종 여기서 멈춘다. 그도 그럴 것이, 근대 미술의 역사에서 매체 담론은 자율적인 것으로 논의되었다. 동시대 미술에서는 사회적 실천으로서의 미술이 따로 부상하여 직접 개입을 불사하기도 한다. 그 사이 또는 바깥에 있는 어떤 것들은 개인적이거나 추상적인 것으로 간주하기 쉽다. 여기서 윤지영의 작업에 다시 주목하게 된다. 그의 작업은 미술의 사회성에 관한 이분법에서 벗어나도록 한다. 개인적인 것이 사적인 것에 한정되지 않고 사회적인 것으로 제시되며, 자율적으로 보이는 것에서 의존적인 구조가 드러난다.

그는 사건의 비가시적 구조, 내부와 외부의 관계를 사고하는 과정에서 조각의 ‘몰드 메이킹’을 중요하게 해석하며 전유했다. 구체적인 장면 하나. 2014년 한국 사회에서 보편적인 마음의 구조를 바꿀 만큼 비극적인 사건이 발생한다. 작가는 세월호 참사 이후 몇 년의 고통스러운 변환의 시간을 겪은 후에야 마치 개인과 예술을 압도할 듯한 사회적 재난에 관해 운을 떼었다. 〈구의 전개도는 없다_맷으로 추정되는〉(2018)에서 작가는 인체 형상의 전개도와, 그에 따라 실리콘으로 만든 피부 조각을 제시한다. 이때 제목에서 언급된 구와 같은 추상적인 도형 대신 ‘구체적인’ 인간 형상이 작업에 도입된다. 작품에 사용된 인간 형상은 캐나다의 3D 스캐닝 업체에서 구매한 남성(Matt)의 신체 측정 데이터에서 온 것이다. 작가는 〈맷에게 보내는 편지〉(2018)에서 “곡률 때문에 구를 평평하게 펼칠 수 없는 것처럼 인체 역시 전개도를 만들기 어렵”다고 설명하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최선을 다해 실리콘으로 피부를 만들어 전시장 바닥에 놓았”다고 밝힌다. 인간 신체의 3D 스캐닝 데이터만으로는 인간 형상을 온전히 파악할 수 없다. 물리적인 조각으로 구현하는 것은 더욱더 불가능하다. 이 작업에서 결과물로 제시되는 것은 내부 구조 없이 바닥에 볼품없이 눌어붙은 껍데기이다.

3D 그래픽 이미지는 다양한 산업 분야에서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 대상, 또는 지금 이곳에 직접 보여 줄 수 없는 것을 설명하는 수단으로 자주 사용된다. 미디어에서 재난을 보도하는 때도 마찬가지였다. 마치 거짓말처럼 선박이 바다에 거꾸로 선 현장이 사진과 영상으로 전해져도 제대로 상황을 파악할 수 있는 사람은 없었다. 비극의 속사정이 서서히 드러나고 사태를 이해하고자 하는 시도들 속에서, 언론에는 선박의 전복과 인명의 희생 과정을 분석적으로 보여 주는 3D 시뮬레이션 이미지가 등장했다. 여기서 추상적인 3D 도형이 인간 신체에 환유되었다. 그러나 인체의 망토를 두른 도형은 윤지영이 〈구의 전개도는 없다_맷으로 추정되는〉에서 보여 줬듯이 껍질 속의 인간에 관해 그리 많은 것을 알려 주지 못하며 사실상 아무것도 대표하지 못한다. 이해의 껍데기는 똑바로 서지 못하고 바닥에 허물어진다. 현실의 부조리와 압도적인 폭력이 자아내는 고통은 종종 예술을 가장 작고 사적인 것으로 축소하게 한다. 무력감과 수치심을 안고 자기 비하에 빠지거나, 닫힌 세계에서 찰나의 순간에 위안을 구하게 되는 것도 어쩔 수 없다. 그런 와중에 비명을 삼키고 끝없는 회의와 대결하며 윤지영은 어렵게 운을 뗀다. 세계의 은폐된 지점, 그것이 드러날 때의 충격, 주체의 인식과 삶을 전복하는 계기를 가리킨다. 바라보고 있는 것의 무엇을 왜 어떻게 바라보고 있는지 질문하게 한다.

조각은 신체다. 인간 신체 크기의 추상 조각은 과거 미니멀리즘 조각이 환기했듯이 조각을 마주하는 관객에게 현상학적 현전의 감각을 일으키도록 한다. 윤지영은 암묵적이거나 명시적으로 조각의 요소를 인간 신체에 비해 왔다. 그러면서 미니멀리즘 조각처럼 차갑고 익명적인 산업용 재료를 사용하지 않고, 라텍스나 실리콘과 같이 비정형하고 피부를 연상할 만한 재료를 즐겨 다룬다. 외부로 드러난 시각적 표면에 천착하기보다, 피부 너머를 상상하며 촉각적인 감성과, 그로부터 비롯되는 서사적인 사고를 자극하려는 듯하다. 피부의 감각은 신체적 증상과 같이 내부의 숨은 작용이 드러나는 현상의 인화지 역할을 한다. 인간 신체 부피의 구형 조각 〈계속 밤〉(2019)은, 온도에 반응하여 표면에 새겨 놓은 이야기가 드러나도록 했다. 가려진 내용을 보기 위해 관객은 조각을 끌어안고 조각에 체온을 전달해야 한다. 작가의 설명에 따라, 자기 피부의 열을 계속 견뎌야 한다고도 할 것이다. 〈구의 전개도는 없다〉에서 인체 형상이 환유로서 작용했다면, 신체에 대한 사고를 보다 심층적으로 펼치는 〈계속 밤〉과 같은 작업에서 조각은 신체의 은유다. 조각은 신체의 은유로서 인간 신체에 관한 확장된 성찰을 요구한다. 동시에 신체는 조각에 관한 은유로서 조각 매체의 시각성에 관한 확장된 해석을 요구한다.

윤지영은 무엇보다 여성의 신체에 대해 생각한다. 한국 사회에서 여성의 신체는 차별의 기호가 가장 극단적으로 작용하는 대표적인 전장이다. 지난 십여 년에 일어난 여성주의적 인식의 재부상은 전 세계적으로 보편적인 현상이었다. 그중 한국에서는 2016년부터 문화 예술계 안팎에 ‘미투 운동’과 ‘해시태그 운동’이 일어났다. 온라인으로 확산하는 여성 운동은 그동안 은폐되어 온 여성 차별의 현실을 본격적으로 가시화하고 사회적 논쟁을 주도했다. 여성 혐오 범죄가 연일 중요하게 보도되고, 희생자에 대한 추모와 애도가 끝도 없이 이어졌다. 그러던 중에 전해진 뉴스가 ‘텔레그램 n번방(여성 협박 성 착취 영상물 제작 유포 조직범죄)’에 관한 것이었다. 이 사건은 충격적일 만큼 조직적인 행태와 거대한 규모로 인해 사회의 구조적인 추락을 직시하도록 했다. 여성의 신체가 성적으로 대상화되는 포르노그래피적 시선의 문제를 넘어 인간성의 파괴와 변형을 예감하게 하는 두려운 사건이었다. 이에 대해 윤지영은 갈급하게, 예외적으로 구상의 직설을 빌려 〈레다와 백조〉(2019)를 만들었다. 여성 타투이스트들과 협업하여 만든 이 작업은 제우스의 강간 신화 도상에서 관음증적 시선의 방향을 여성이 아니라 남성에게 돌려준다. 이 무렵부터 작가가 여성의 존재론적 공통 지평에 대한 인식에 더욱 천착하게 된 듯하다.

개인과 예술을 삭제할 듯이 위협하는 것은 개인적 불행이나 사회적 재난의 연속만이 아니다. 하나의 사건보다, 그것의 구조적 핵심에 해당하는 것이 더욱 치명적으로 작용한다. 윤지영은 여성의 신체성에 대한 근본적인 반성과, 또 다른 위기에 대한 맞섬을 통해 조각의 안과 밖에 관한 사유를 심화한다. 코로나19 팬데믹으로 개인 주체가 전 세계적으로 고립되었을 때, 작가는 신체적 감각과 경험의 빈곤에 비례해 비대해지는 고통스러운 자의식과 위화감을 형상화했다. 〈미, 노〉(2021)는 부피는 같지만, 형태가 다른 6개의 도형이 서로 옷을 바꿔 입은 인간 신체 크기의 작업이다. 예를 들어 별기둥 조각은 구형 조각의 외피를 거의 찢어버릴 듯이 걸치고 있고, 하트기둥 조각은 별기둥 조각의 외피를 헐렁하게 입었다. 바깥으로 드러난 검은 속, 조각의 뼈대는 빛을 거의 반사하지 않는 반타블랙이고, 단단한 구조에 간신히 걸쳐져 군데군데 찢겨 있는, 옷이자 피부에 해당하는 겉은 실리콘으로 만들어졌다. 이 작품이 전달하는 비애미는 겉과 속의 엇갈림, 괴리로 인해 빚어진 상처, 여섯 조각이 고요히 모인 사연과 같은 것을 끊임없이 상상하게 한다.


온 힘을 다해

미술의 시각 언어는 종종 모든 사람에게 명백하게 드러나기를 거부하는 것처럼 보일 만큼 은밀하고 시적이다. 그러나 이러한 은밀함은 배타적으로 타자를 소외시키기 위한 것이 아니다. 더욱 깊숙이 연루시키고 비상사태의 사고를 촉발하기 위한 것이다. 지난 십 년, 대체로 조급하고 소모적인 서울의 미술 현장에서, 윤지영은 타협하지 않고 고집스럽게 자기 언어를 추구해 왔다. 한편으로는 언제나 소진과 소멸을 염려했던 듯하다. 조각은 물리적 속성상 조금씩 마모되어 낡을 것이며, 무겁고 까다로운 재료를 다루는 데 필요한 만드는 사람의 신체적 능력도 시간의 경과에 따라 퇴화할 것이다. 일상적으로는 디지털 매체가 확산하며 인간 신체의 감각과 지각이 변형되고 있다. 지구의 생태적 위기를 맞아 물리적 개입으로서의 예술적 창작은 생태주의적 (비)개입의 윤리를 고민해야 한다. 세계의 사정이 이러한데, 조각은, 조각에 관한 매체적 사고는 (어떻게) 살아남을 것인가. 한 가지는 분명하다. 실존적 주체의 운명, 사회적 구조의 일부로서 개인의 운명, 예술 매체로서 조각의 운명은 분리되지 않는다.

윤지영은 예술가로서 고독한 자율성을 추구하기보다, 대화와 협업의 혼란을 기꺼이 감수해 왔다. 한 인터뷰에서 작가는 “제가 [그들의] 생각을 믿는 사람들을 만드는 게 중요”하다며, “믿어야 묻고 듣고 수용”할 수 있다고 말한다.3 팬데믹 시기에 지구 반대편에 사는 동료 작가와 함께 만든 작업 〈온힘을 다해〉(2020, 스티븐 콱과 협업)는 물리적 만남의 한계를 배경으로, 디지털 공간을 통해(서지만) 물리적 속성을 공유하려는 필사적인 노력을 담았다. 그동안 알고 믿던 것이 모두 사라져 버릴 것 같은 불안한 예감 속에서, 작가는 다시 창작과 삶을 가능하게 하는 우정과 연대의 능력에 의지했다. 온 힘을 다하는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벗어날 수도, 벗어날 생각도 없이 겪어 내는 고통은 모든 것을 무(無)로 돌리는 무자비한 힘이다. 그러므로 그는 언제나 모든 것을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듯이 찾는다. 온 힘이 필요할 수밖에 없다. 우리 각자가 무엇을 보는지는 명확하지 않지만, 시각은 공평하게 편재한다. 여기 보이지 않는 면이 존재한다. 조각가의 선택에 의해.



1. 일레인 스캐리, 『고통받는 몸』, 메이 옮김(파주: 오월의봄, 2018), 10.
2. 윤지영이 2023년 ‘DAAD(German Academic Exchange Service) 아티스트-인-베를린’ 프로그램의 일환으로 《코먼 그라운드(Common Ground)》에서 공개한 〈더 백 스토리(The Back Stories)〉(2023) 발표 영상 참조. https://vimeo.com/858739023
3. 윤지영(인터뷰이), 박원재(인터뷰어), “Artist Talk | Jiyoung Yoon | 윤지영 작가와의 대화”, 원앤제이 갤러리(ONE AND J. Gallery) 유튜브, 2022.2.25. https://www.youtube.com/watch?v=D7m2qTO5lQM

Reference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