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과
밖
윤지영의
작업에는 두 가지 차원의 지평이 공평한 무게감을 가지고 교차한다. 한 가지는 작가의 개인적인 체험이나
자각으로부터 시작해서 사회적인 인식으로 이어지는 주제적 문제의식이다. 다른 하나는 조각의 시각성에 대한
이해와 해석으로부터 떠오르는 물질에 대한 개념적 아이디어이다. 결과적으로 나타난 작업에는 사회적이고
정치적인 사건의 기표가 직접적으로 등장하지 않는다. 가장 단순하게는 감각적으로 디자인된 사물로, 좀 더 복잡하게는 조각 매체에 관한 메타 담론을 펼치는 것처럼 보인다. 감상의
해석은 종종 여기서 멈춘다. 그도 그럴 것이, 근대 미술의
역사에서 매체 담론은 자율적인 것으로 논의되었다. 동시대 미술에서는 사회적 실천으로서의 미술이 따로
부상하여 직접 개입을 불사하기도 한다. 그 사이 또는 바깥에 있는 어떤 것들은 개인적이거나 추상적인
것으로 간주하기 쉽다. 여기서 윤지영의 작업에 다시 주목하게 된다. 그의
작업은 미술의 사회성에 관한 이분법에서 벗어나도록 한다. 개인적인 것이 사적인 것에 한정되지 않고 사회적인
것으로 제시되며, 자율적으로 보이는 것에서 의존적인 구조가 드러난다.
그는
사건의 비가시적 구조, 내부와 외부의 관계를 사고하는 과정에서 조각의 ‘몰드 메이킹’을 중요하게 해석하며
전유했다. 구체적인 장면 하나. 2014년 한국 사회에서
보편적인 마음의 구조를 바꿀 만큼 비극적인 사건이 발생한다. 작가는 세월호 참사 이후 몇 년의 고통스러운
변환의 시간을 겪은 후에야 마치 개인과 예술을 압도할 듯한 사회적 재난에 관해 운을 떼었다. 〈구의
전개도는 없다_맷으로 추정되는〉(2018)에서 작가는 인체
형상의 전개도와, 그에 따라 실리콘으로 만든 피부 조각을 제시한다. 이때
제목에서 언급된 구와 같은 추상적인 도형 대신 ‘구체적인’ 인간 형상이 작업에 도입된다. 작품에 사용된
인간 형상은 캐나다의 3D 스캐닝 업체에서 구매한 남성(Matt)의
신체 측정 데이터에서 온 것이다. 작가는 〈맷에게 보내는 편지〉(2018)에서
“곡률 때문에 구를 평평하게 펼칠 수 없는 것처럼 인체 역시 전개도를 만들기 어렵”다고 설명하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최선을 다해 실리콘으로 피부를 만들어 전시장 바닥에 놓았”다고 밝힌다. 인간 신체의 3D 스캐닝 데이터만으로는 인간 형상을 온전히 파악할 수 없다. 물리적인
조각으로 구현하는 것은 더욱더 불가능하다. 이 작업에서 결과물로 제시되는 것은 내부 구조 없이 바닥에
볼품없이 눌어붙은 껍데기이다.
3D 그래픽 이미지는 다양한 산업 분야에서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 대상, 또는 지금 이곳에 직접 보여 줄 수 없는 것을 설명하는 수단으로 자주 사용된다. 미디어에서 재난을 보도하는 때도 마찬가지였다. 마치 거짓말처럼 선박이
바다에 거꾸로 선 현장이 사진과 영상으로 전해져도 제대로 상황을 파악할 수 있는 사람은 없었다. 비극의
속사정이 서서히 드러나고 사태를 이해하고자 하는 시도들 속에서, 언론에는 선박의 전복과 인명의 희생
과정을 분석적으로 보여 주는 3D 시뮬레이션 이미지가 등장했다. 여기서
추상적인 3D 도형이 인간 신체에 환유되었다. 그러나 인체의
망토를 두른 도형은 윤지영이 〈구의 전개도는 없다_맷으로 추정되는〉에서 보여 줬듯이 껍질 속의 인간에
관해 그리 많은 것을 알려 주지 못하며 사실상 아무것도 대표하지 못한다. 이해의 껍데기는 똑바로 서지
못하고 바닥에 허물어진다. 현실의 부조리와 압도적인 폭력이 자아내는 고통은 종종 예술을 가장 작고 사적인
것으로 축소하게 한다. 무력감과 수치심을 안고 자기 비하에 빠지거나,
닫힌 세계에서 찰나의 순간에 위안을 구하게 되는 것도 어쩔 수 없다. 그런 와중에 비명을
삼키고 끝없는 회의와 대결하며 윤지영은 어렵게 운을 뗀다. 세계의 은폐된 지점, 그것이 드러날 때의 충격, 주체의 인식과 삶을 전복하는 계기를 가리킨다. 바라보고 있는 것의 무엇을 왜 어떻게 바라보고 있는지 질문하게 한다.
조각은
신체다. 인간 신체 크기의 추상 조각은 과거 미니멀리즘 조각이 환기했듯이 조각을 마주하는 관객에게 현상학적
현전의 감각을 일으키도록 한다. 윤지영은 암묵적이거나 명시적으로 조각의 요소를 인간 신체에 비해 왔다. 그러면서 미니멀리즘 조각처럼 차갑고 익명적인 산업용 재료를 사용하지 않고, 라텍스나
실리콘과 같이 비정형하고 피부를 연상할 만한 재료를 즐겨 다룬다. 외부로 드러난 시각적 표면에 천착하기보다, 피부 너머를 상상하며 촉각적인 감성과, 그로부터 비롯되는 서사적인
사고를 자극하려는 듯하다. 피부의 감각은 신체적 증상과 같이 내부의 숨은 작용이 드러나는 현상의 인화지
역할을 한다. 인간 신체 부피의 구형 조각 〈계속 밤〉(2019)은, 온도에 반응하여 표면에 새겨 놓은 이야기가 드러나도록 했다. 가려진
내용을 보기 위해 관객은 조각을 끌어안고 조각에 체온을 전달해야 한다. 작가의 설명에 따라, 자기 피부의 열을 계속 견뎌야 한다고도 할 것이다. 〈구의 전개도는
없다〉에서 인체 형상이 환유로서 작용했다면, 신체에 대한 사고를 보다 심층적으로 펼치는 〈계속 밤〉과
같은 작업에서 조각은 신체의 은유다. 조각은 신체의 은유로서 인간 신체에 관한 확장된 성찰을 요구한다. 동시에 신체는 조각에 관한 은유로서 조각 매체의 시각성에 관한 확장된 해석을 요구한다.
윤지영은
무엇보다 여성의 신체에 대해 생각한다. 한국 사회에서 여성의 신체는 차별의 기호가 가장 극단적으로 작용하는
대표적인 전장이다. 지난 십여 년에 일어난 여성주의적 인식의 재부상은 전 세계적으로 보편적인 현상이었다. 그중 한국에서는 2016년부터 문화 예술계 안팎에 ‘미투 운동’과
‘해시태그 운동’이 일어났다. 온라인으로 확산하는 여성 운동은 그동안 은폐되어 온 여성 차별의 현실을
본격적으로 가시화하고 사회적 논쟁을 주도했다. 여성 혐오 범죄가 연일 중요하게 보도되고, 희생자에 대한 추모와 애도가 끝도 없이 이어졌다. 그러던 중에 전해진
뉴스가 ‘텔레그램 n번방(여성 협박 성 착취 영상물 제작
유포 조직범죄)’에 관한 것이었다. 이 사건은 충격적일 만큼
조직적인 행태와 거대한 규모로 인해 사회의 구조적인 추락을 직시하도록 했다. 여성의 신체가 성적으로
대상화되는 포르노그래피적 시선의 문제를 넘어 인간성의 파괴와 변형을 예감하게 하는 두려운 사건이었다. 이에
대해 윤지영은 갈급하게, 예외적으로 구상의 직설을 빌려 〈레다와 백조〉(2019)를 만들었다. 여성 타투이스트들과 협업하여 만든 이 작업은
제우스의 강간 신화 도상에서 관음증적 시선의 방향을 여성이 아니라 남성에게 돌려준다. 이 무렵부터 작가가
여성의 존재론적 공통 지평에 대한 인식에 더욱 천착하게 된 듯하다.
개인과
예술을 삭제할 듯이 위협하는 것은 개인적 불행이나 사회적 재난의 연속만이 아니다. 하나의 사건보다, 그것의 구조적 핵심에 해당하는 것이 더욱 치명적으로 작용한다. 윤지영은
여성의 신체성에 대한 근본적인 반성과, 또 다른 위기에 대한 맞섬을 통해 조각의 안과 밖에 관한 사유를
심화한다. 코로나19 팬데믹으로 개인 주체가 전 세계적으로
고립되었을 때, 작가는 신체적 감각과 경험의 빈곤에 비례해 비대해지는 고통스러운 자의식과 위화감을 형상화했다. 〈미, 노〉(2021)는
부피는 같지만, 형태가 다른 6개의 도형이 서로 옷을 바꿔
입은 인간 신체 크기의 작업이다. 예를 들어 별기둥 조각은 구형 조각의 외피를 거의 찢어버릴 듯이 걸치고
있고, 하트기둥 조각은 별기둥 조각의 외피를 헐렁하게 입었다. 바깥으로
드러난 검은 속, 조각의 뼈대는 빛을 거의 반사하지 않는 반타블랙이고,
단단한 구조에 간신히 걸쳐져 군데군데 찢겨 있는, 옷이자 피부에 해당하는 겉은 실리콘으로
만들어졌다. 이 작품이 전달하는 비애미는 겉과 속의 엇갈림, 괴리로
인해 빚어진 상처, 여섯 조각이 고요히 모인 사연과 같은 것을 끊임없이 상상하게 한다.
온
힘을 다해
미술의
시각 언어는 종종 모든 사람에게 명백하게 드러나기를 거부하는 것처럼 보일 만큼 은밀하고 시적이다. 그러나
이러한 은밀함은 배타적으로 타자를 소외시키기 위한 것이 아니다. 더욱 깊숙이 연루시키고 비상사태의 사고를
촉발하기 위한 것이다. 지난 십 년, 대체로 조급하고 소모적인
서울의 미술 현장에서, 윤지영은 타협하지 않고 고집스럽게 자기 언어를 추구해 왔다. 한편으로는 언제나 소진과 소멸을 염려했던 듯하다. 조각은 물리적
속성상 조금씩 마모되어 낡을 것이며, 무겁고 까다로운 재료를 다루는 데 필요한 만드는 사람의 신체적
능력도 시간의 경과에 따라 퇴화할 것이다. 일상적으로는 디지털 매체가 확산하며 인간 신체의 감각과 지각이
변형되고 있다. 지구의 생태적 위기를 맞아 물리적 개입으로서의 예술적 창작은 생태주의적 (비)개입의 윤리를 고민해야 한다.
세계의 사정이 이러한데, 조각은, 조각에 관한
매체적 사고는 (어떻게) 살아남을 것인가. 한 가지는 분명하다. 실존적 주체의 운명, 사회적 구조의 일부로서 개인의 운명, 예술 매체로서 조각의 운명은
분리되지 않는다.
윤지영은
예술가로서 고독한 자율성을 추구하기보다, 대화와 협업의 혼란을 기꺼이 감수해 왔다. 한 인터뷰에서 작가는 “제가 [그들의] 생각을 믿는 사람들을 만드는 게 중요”하다며, “믿어야 묻고 듣고
수용”할 수 있다고 말한다.3 팬데믹 시기에 지구 반대편에 사는 동료 작가와
함께 만든 작업 〈온힘을 다해〉(2020, 스티븐 콱과 협업)는
물리적 만남의 한계를 배경으로, 디지털 공간을 통해(서지만) 물리적 속성을 공유하려는 필사적인 노력을 담았다. 그동안 알고 믿던
것이 모두 사라져 버릴 것 같은 불안한 예감 속에서, 작가는 다시 창작과 삶을 가능하게 하는 우정과
연대의 능력에 의지했다. 온 힘을 다하는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벗어날
수도, 벗어날 생각도 없이 겪어 내는 고통은 모든 것을 무(無)로 돌리는 무자비한 힘이다. 그러므로 그는 언제나 모든 것을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듯이 찾는다. 온 힘이 필요할 수밖에 없다. 우리
각자가 무엇을 보는지는 명확하지 않지만, 시각은 공평하게 편재한다. 여기
보이지 않는 면이 존재한다. 조각가의 선택에 의해.
1. 일레인 스캐리, 『고통받는
몸』, 메이 옮김(파주: 오월의봄, 2018), 10.
2. 윤지영이 2023년
‘DAAD(German Academic Exchange Service) 아티스트-인-베를린’ 프로그램의 일환으로 《코먼 그라운드(Common Ground)》에서 공개한 〈더 백 스토리(The Back
Stories)〉(2023) 발표 영상 참조.
https://vimeo.com/858739023
3. 윤지영(인터뷰이), 박원재(인터뷰어), “Artist Talk | Jiyoung Yoon | 윤지영 작가와의 대화”, 원앤제이
갤러리(ONE AND J. Gallery) 유튜브,
2022.2.25. https://www.youtube.com/watch?v=D7m2qTO5lQ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