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화를 주된 매체로 사용하는 특별한 이유가 있을까요? 더불어 뉴미디어 시대에 맞춰 새로운 매체들이 전시장에 자주 등장하는 오늘날, 회화라는 매체가 갖는 가치가 무엇이라고 생각하시나요?
회화라는 매체는 정말 오래된 매체잖아요. 그러다 보니까 작업을 하는 과정에서 비슷한 질문들을 계속해서 받았던 거 같아요. 최근 느끼는 것은 모든 매체라는 게, 아무리 뉴미디어라도 올드 미디어성과 뉴미디어성을 함께 갖고 있다고 하잖아요. 그래서 회화도 대표적인 올드미디어이지만, 이 안에도 뉴미디어성이 분명 존재한다고 생각하고, 그것은 시간이 지나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하거든요. 저는 그런 가능성에 믿음이 있기 때문에 회화 작업을 지속하고 있어요.
더불어 회화가 시간의 축적이라든가, 그것에 대한 가치, 실패와 같은 제 작업의 내용을 담아낼 수 있는 적합한 매체라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회화마다 다르겠지만, 제가 회화를 대하는 태도, 그리고 회화 안에서 시간을 대하는 태도는 조금 더 원형적인 시간, 그러니까 어느 곳을 찔러 봐도 거기에 다 시간이 배어 있는, 그런 시간을 바라보는 것 같아요.
많이 이동하면서 흐름이 끊어진 그림들 같은 경우에 그것들을 모아서 전혀 다른 맥락의 새로운 작업을 그 위에 펼쳐 놓을 때가 있는데, 하얀 캔버스라는 완전한 무에서 시작하는 게 아니라 그 전에 시간이 배어 있는 화면 위에 새로운 이미지를 그려 낸다는 점에서도 흥미로운 것 같아요.
함께하는 교육의 빛
본교 조형예술과 예술사를 졸업하셨는데, 그 시절이 지금까지의 작품 창작에 있어 어떤 영향을 주었나요? 배움의 과정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것은 무엇이었는지 궁금합니다.
학교에 입학하자마자 파운데이션이라는 과정을 이론과 그리고 디자인과 친구들과 같이 하면서, 조형예술과뿐만 아니라 다른 과에 있는 학생들과 같은 수업으로 만날 수 있다는 게 흥미로웠어요. 그리고 그 수업 자체가 워낙 인텐스하다 보니까 계속해서 과제들을 수행해 내야 하는 시간을 겪으면서 제가 입시 때 해 왔던 그림은 1년 동안 거의 하지 못했던 것 같아요.
계속 하나의 주제를 갖고 다양한 매체로 표현하는 방법들을 배우기도 하고, 다각도로 작업을 해석하는 크리틱의 시간들이 늘어나면서, 그런 시간들이 제가 지금 회화를 하면서도 왜 회화를 해야 하는지에 대한 질문을 계속 반문하게 하는 시작점이 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요. 또 작업실 안에 있다 보면 혼자서 작업을 하는 일이잖아요.
그렇기 때문에 자기 스스로한테 계속 파고들어가서 오히려 깊어질 수는 있지만, 또 거기서 헤어 나오지 못하고 굉장히 딱딱해지는 일이 발생하는데, 한예종에서 받았던 교육은 그런 것들을 탈피해 줄 수 있는 교육이었던 것 같아요. 그리고 한예종 다니면서 제가 배웠던 교수님들의 탈권위적인 부분들에 영향을 많이 받았던 거 같아요. 편안하게 작업에 대해 얘기할 수 있고, 심지어 놀이라든가 그런 부분에서도 교수님들이 적극적으로 참여를 하셨던 게 굉장히 다르게 느껴졌어요.
이제는 학생이 아닌 교수로 학교로 돌아와 후학을 양성하고 계시는데요. 현재 가르치고 계신 학생들에게 가장 강조하는 부분은 무엇일까요?
예전에 박이소 선생님 회고전을 국립현대미술관에서 본 적이 있는데, 그때 자료집 속에 작가지만 또 교육자로서 강의를 만들기 위해 꼼꼼하게 기록해 두신 부분들이 굉장히 인상적이었어요. 학생들한테 강조했던 부분이 그분의 언어로 ‘비평동무’를 만드는 게 중요하다 이런 이야기가 있더라고요. 저도 학생들한테 너희도 졸업하기 전까지 너의 작업을 온전하게 솔직하게 표현하고 얘기해 줄 수 있는 친구 한 명을 꼭 만들고 졸업을 하라고 1학년 때부터 이야기하거든요.
그게 쉬운 것 같지만 쉽지가 않은 게, 가까이 지내는 친구일수록 작업을 솔직하고 신랄하게, 혹은 따뜻하게 바라봐 줄 수 있는 일이 그렇게 많지가 않아요. 선생님께 배우는 것도 있겠지만 또래 친구들한테 배우는 게 훨씬 많다는 걸 얘기하면서 서로 많은 시간을 보내라고 해요. 그리고 그 시기에 경험할 수 있는 것들을 좀 많이 해 보라고 얘기를 해요. 왜냐하면 1학년 때 파운데이션 수업을 지나고 또 작업하면서 계속 하나에 갇혀 있기 마련인데, 그 외에 조금 더 폭넓은 경험을 많이 해 보라고 하는 편이에요.
교수진으로도 계시지만, 작가로서 왕성한 활동도 펼치고 계십니다. 교육자와 작가의 위치를 겸하는 일이 개인적으로, 혹은 작품 창작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궁금합니다.
장단점이 분명히 있는 것 같아요. 예전에는 작업실에 와서도 온전한 내 시간을 즐기기도 하고 혹은 괴로워하기도 하면서 작업을 했어요. 그런데 가르치는 일을 하다 보니까 상대적으로 작업으로 온전히 쓸 수 있는 시간의 양이 확 줄어들면서, 처음에는 당황스러움 같은 게 있었던 것 같아요. 그런데 다시 돌이켜 보면, 시간이 많았을 때 내가 그것을 온전히 그것을 긍정적으로 다 활용했는가 하고 생각하면 아닌 부분들도 분명히 있었어요.
수업을 하면서 찾을 수 있는 긍정적인 점은, 아까 좀 이야기가 나오긴 했지만 작업을 하다 보면 자신에게 빠지게 되는데, 그것이 작업을 깊이 있게 하는 측면도 있지만 넓어지지 못하게 하는 측면도 있거든요. 그런데 학생들을 가르치면서 혹은 학생들의 작업을 여러 선생님들과 만나서 같이 얘기하면서 새롭게 바라보게 되는 부분들이 있어요.
또 학생들은 지금 스무 살 혹은 그 이상인데, 계속 크리틱을 하고 1대 1로 대면 수업을 하고 하면서 이 세대가 갖는 고민들이라든가 아니면 흥미를 갖고 있는 지점들을 듣게 되고 그것에 대해서 제가 온전히 이해할 수 없지만, 이해하려고 굉장히 노력을 많이 하게 되기도 하고, 공부도 하게 되고요. 그런 부분은 저를 갇히지 않게 해 주는 부분이 아닌가 해서 학생들한테도 굉장히 많이 배우고 있다고 생각해요. 이렇게 병행하면서 좋은 밸런스를 갖게 되는 것 같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