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stallation view of 《Dear morning》 (Space Willing N Dealing, 2025) © Heoang Kim

어떤 여자 얼굴
2020년 초였던가, 약속 장소로 가기 위해 거의 가본 적 없는 한 지하철역에 도착했다. 개찰구를 나서자마자 역사 안을 가득 메운 광고 이미지에 나는 기이한 느낌에 압도당했다. 창백한 피부의 눈이 시릴 것처럼 정돈된 이목구비를 가진 그녀들이 줄지어서 반짝였다. 광고판을 밝히는 푸른 빛이 마치 아우라처럼 그녀들을 감쌌다.

조금씩 다르지만 그녀들의 얼굴은 대체로 하나의 방향을 향하고 있었다. 눈은 크고, 코는 높게, 얼굴은 갸름하고 입술은 도톰한, 피부에는 어떤 얼룩이나 주름도 허용하지 않는 반듯함. 때로는 부위별로 도려진 파편화된 이미지로 드라마틱한 변화를 보여주거나, 얼굴을 구성하는 모든 요소를 재조합해 만든 새로운 얼굴을 전시하는 이미지들의 행진은 당시 보았던 어떤 작품이나 전시보다도 강렬한 인상으로 남았다.

여성의 얼굴을 그릴 때마다, 문득 그 공간이 떠오른다. 사람 크기로 나란히 벽에 걸려, 분명하고도 일관된 메시지를 전하던 이미지들의 힘을 떠올리며, 나는 ‘어떤 이미지를 만들 것인가’보다는 ‘어떤 이미지를 만들지 않고, 전시하지 않을 것인가’를 오래도록 고민하게 된다.


미래의 방식
게임 〈시드 마이어의 문명: 비욘드 어스/지구를 넘어서〉는 위기의 지구를 벗어나 외계 행성으로 이주해서 새로운 문명을 만드는 내용의 게임이다. 플레이어는 도시를 건설하고 미지의 세계를 탐험하며, 여러 방식으로 인류를 새로운 행성에 뿌리내리도록 한다.

게임의 특징 중 친화력(Affinity)이라는 항목이 있다. 조화, 우월, 순수로 분류된 세 가지 항목은 플레이어가 어떤 성격의 문명을 이룩할 것인지에 대해 영향을 끼친다. 간단히 말하면 기존에 살던 외계 생물과 서로를 받아들여 유전적 연결고리를 만들며 진화하거나, 의 Borg처럼 고도의 기술발달을 이룩해 기계인간이 되는 것이다. 마지막 선택지는 인간 고유성을 잃지 않도록 끝까지 노력하는 것이다.

문명의 발전을 선택해야 하는 순간마다 나는 늘 ‘조화’를 선택했다. 외계 종족을 말살하거나 인류의 고향인 지구로 귀환하는 선택지보다는 서로 다른 것들이 함께 살아갈 수 있는 방식을 택했다. 인류세라는 격변의 시간 속에서, 나의 작업은 공존의 가능성을 상상하려는 시도다. 서로 다른 것들이 함께 존재하며 균형을 이루는 가능성을 꾸준히 탐구하는 과정이기도 하다.


추동
미래로 추동하기 위한 동력은 어디에서 얻을 수 있을까? 나는 자연에서 반복되는 것과 변하지 않는 것을 관찰하며 그 실마리를 얻는다. 일설에 의하면 다지류는 바다에서 처음으로 육지로 올라온 생물이라고 한다. 나는 그들의 마르지 않는 생명력과 강인함, 변함없음을 빗대어 과거에서 현재로, 또 미래로 횡단하는 어떤 생물을 그려본다.

인간이 더 이상 우리가 아는 인간의 모습으로 기능하지 않는 멀고 광막한 미래의 장면을 상상한다. 오롯이 상상으로 이루어진 그곳은 익숙하고도 낯선 모습이다. 산과 들판, 꽃과 여러 생물들은 여전히 존재하지만 인간의 모습은 존재하지 않는다. 산의 실루엣, 들판의 꽃 군락, 늪에서 건져 올린 올챙이의 촉감에서 과거에 인간이 존재했던 흔적을 발견하는 상상을 한다.

반복되는 것과 변하지 않는 것이 만들어내는 리듬에서 나는 새로운 미래로 나아가게 하는 힘을 느낀다. 인간 이후의 세계에서, 인간적인 것이 전혀 다른 형태로 나타나기를 나는 기대한다.


Dear morning
모두가 잠이 든 밤이 되면 나는 슬쩍 내일 아침을 생각한다. 무엇을 아침으로 먹을지, 몇 시쯤 집에서 나가야 할지 등. 조용히 오르내리는 아이의 배를 한번 들여다보는 것을 마지막으로 집안의 모든 불을 끈다.

미래에 대해서 상상하는 것은 나의 오래된 습관이다. 아주 오랜 시간동안 나는 폐허와 같은 풍경만 생각해왔다. 개인이 해결할 수 없는 여러 이유들로 부서지고 망가진 어두운 세계를. 거대한 위기 앞에서 무력한 개인으로 침몰하는 이의 모습을 떠올렸다.

거의 이십 하고도 몇 년 만에 드디어, 나는 이런 어두침침한 미래를 생각하는 것에 흥미를 잃었다. 특별한 계기가 있다기 보단 그냥 자연스럽게 그렇게 된 것 같다. 끊임없는 것들과 변하지 않는 것들 사이에서 또 조금씩 변화하고, 그 자리에 있는 듯하면서 머무르지 않는 어떤 순간들을 겪으면서 스르륵 하고.


마음 전송
통장을 정리하다가 문득 생각했다. 이대로라면 나 죽을 때 물려줄 것이라곤 누구 노래처럼 오직 사랑뿐이겠군. 물론 이 글은 나의 망한 주식계좌나 재테크에 관한 이야기가 아니다. 나는 과연 딸에게, 딸의 딸에게, 딸의 딸의 이름 모를 자손에게 무엇을 줄 수 있을까? 내가 아는 지구가 사라진 먼 미래, 광막한 우주로 떠났다가 선조의 별로 다시 찾아온 어떤 인간의 후손을 떠올려 본다. 전혀 친숙하지 않은 고향에서 나를 알아보는 듯한 이름 모를 생물과 조우하는 장면을 상상한다.

현재의 물질적 가치나 사고방식이, 가치관이 모두 의미를 잃어버린 세계로 무엇을 전달할 수 있을까? 아무것도 없거나, 고작해야 무형의 감정 덩어리뿐일 것이다. 사랑이라고 부르기엔 복잡하고 알쏭달쏭하고 미지근한 이것을 나는 마음이라는 단어로 정의 내리기로 했다. 그렇다면 ‘마음’이라는 것을, 어떤 형식과 기호로 전달할 수 있을까?

Reference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