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는 박살 낸다. 아이는 어지른다. 아이는 뒤집는다. 아이는 드러눕는다. 아이는 예의를 차리지 않는다. 아이는 협조하지 않는다. 아이가 다가온다. 아이는 이전에 알았던 삶을 잠식한다. 그렇게 아이는 자란다.
다리가 짧은 강아지는 두리번거린다. 강아지는 먹고 잔다. 강아지는 산책을 종용한다. 강아지는 바깥 공기를 맞으며 똥을 싼다. 그는 아이를 따라다닌다. 그는 아이가 어지른 것을 치운다. 그는 아이를 먹인다. 그는 아이가 흘린 것을 닦는다. 그는 강아지를 산책시킨다. 그는 강아지 똥을 치운다. 그는 털투성이 이불을 턴다. 그는 허겁지겁 먹는다. 그는 불면에 시달린다. 다음 날이 찾아오면 그 전날에 했던 행동을 반복한다.
어쨌든 웃을 수 있어서 다행이라 생각한다. 뚜껑 열린 머리에서 명랑하게 초록색 물질과 더불어 머리칼이 날아가고, 아이가 날아가고, 강아지가 날아간다. 일단 활짝 웃어본다. ^_^. 1) 양팔에 가방을 주렁주렁 메고 앞으로는 아이를 달고 택시를 잡으려 하지만 생각처럼 되지 않고, 영영 길가에 서 있을 것만 같다. 아무렇지 않은 듯 미소를 지어본다. ^∇^.2) 방해받지 않고 밤새 잠들어 본지는 이미 오래고, 지친 손목이 들고 있던 핸드폰이 얼굴로 수직 낙하한다. 그러려니 한다. ◎_◎. 3)
인물은 주로 복잡한 현실 세계를 닮지 않은, 마치 효과음이 들릴 듯한 색면으로 구성된 배경 앞에 서 있다. 영겁으로 되풀이되는 돌봄 노동의 사이클은 밝은 색채와 크고 작은 도형들로 구성된 화면에서 펼쳐진다.4) 장애물 넘기 류의 오래된 비디오 게임을 연상하는 구도 속 캐릭터는 팔이 네 개라도 부족하고, 스태미나를 회복할 기미가 보이지 않지만 어쩐지 리드미컬하게 자리를 잡았다.
무더운 날 유아차를 끌며 끈적하게 녹아가는 분홍색 덩어리 뒤로 마치 이 폭염을 축하하듯 색종이 조각이 휘날린다.5) 장기가 여러 얼굴을 갖고 제각기 주장해댈 때, 그러니까 내 몸이 내 몸 같지 않아 이리저리 꼬여있는 상태조차 알약과 책이 아이템처럼 둥둥 떠다닌다.
김허앵의 페인팅과 드로잉에 등장하는 도식적인 표정과 경쾌한 색면 배경은 주어진 상황을 일종의 시트콤 장르로 도해한다. 신비로울 것 없는 일상과 난해할 것 없는 플롯의 출산-육아 시트콤. 반복된 노동과 고난에도 불구하고 주인공이 난감한 웃음과 함께 어깨를 으쓱이면 방청객이 와하하하 웃음을 터트릴 것 같다. 일종의 약속 묶음으로 구성된 이 장르는, “나도 이 상황이 웃기니까 님들도 웃어도 괜찮습니다”라거나 “이왕 그렇게 된 걸 뭐 어쩌겠습니까”라는 뒤끝 없는 신호를 보낸다.
피노키오의 지미니 크리켓, 뮬란의 무슈, 엘사와 안나의 올라프마냥 장면 속에 적절히 배치된 사이드킥 – 주로 코기가 담당하는 듯하다 – 은 주어진 갈등 양상에 탄력적으로 적응하는 태도를 강화한다. 신체적 한계와 반복된 노동, 목표치 달성의 좌절로 인해 서서히 고조되는 갈등과 축적되는 긴장은 예상치도 못한 엉뚱한 전개로 인해 해소되어 버린다.
단, 이러한 긍정은 실제로 많은 시트콤이 그렇듯 이면의 어둠과 더불어 아이러니를 담아낸다. 이는 이전 드로잉 슬라이드 작업에서도 찾아볼 수 있는 도식적인 얼굴 표현에서 더 직접적으로 드러난다.6) ‘사람’들은 윤곽으로 헐겁게 표현된 몸에 반짝이고 아름다운 눈을 달고 등장한다. 예쁘게 그려 렌즈처럼 쓰고 다니는 것에 불과한 눈을 착용한 사람들은 태연하게 칼을 품고 다니며, 새로운 시도를 하는 개인을 기꺼이 처형한다.
‘나쁜’ 사람들의 ‘아름다운’ 눈은 세상의 추악한 이면을 교조적으로 고발하기보다 그 아이러니를 인정하는 동시에 이를 완충하고자 한다. 언제라도 잔인하게 ‘못난/모난’ 것을 처단할 수 있는 사람들의 빛나는 눈은 잔인하지만, 그것은 일부 극악무도한 사람의 작태가 아니라 충분히 아름다운, 평범한 사람의 것이다.
모두가 칼을 끼고 뒷짐을 지고 있지만, 서로 함께 있어 줄 줄도 알고 때로는 의외의 선행을 베풀기도 한다. 광기는 멀리 있는 것이 아니라 반짝이는 눈이 얼마간 모여 동반 상승할 때 발견되는 것에 불과하다.
어쩌면 의외로 잔인한 세상 속 통제 불가한 상황에서 갖출 수 있는 최소한의 존엄은 이를 담는 배경이나 사운드트랙, 혹은 장르를 선택하는 일일지도 모른다. 시트콤 ‘Mama do’는 일상적인 좌절이 영속된 고통으로 빠져들지 않게끔 하고, 자신을 자신답게 하는 것들을 잃지 않도록 하는 뼈대가 되어준다. 일상의 구체적인 장면이나 여러 관계의 양상을 집중적으로 담은 아크릴 드로잉은 습관처럼 스마트폰으로 찍은 일상의 장면 같지만, 바로 그러한 방법으로 지켜낸 일상의 영역들을 보여준다.
아이가 등장하기 전부터 알았던 친구들과 여전히 삶을 나눈다. 인생의 챕터는 하나에서 다음으로 싹둑 잘려 넘어가지 않는다. 그들은 여전히 예전의 주사7) 나 몇 년 전에 좋아했던 노래를 대동하여 등장한다. 아이를 매개로 만난 다른 양육자들 또한 마찬가지다.
아이와 함께 산다고 해서 이전에 맛있던 것이 떫어지지 않는다.8) 비록 신체의 변화로 인해 담배는 피우지 못하게 되어도 여전히 마음으로 담배를 피운다. 9) 그 사이로 슬쩍 코를 파는 아이가,10) 악어와 큰 고양잇과 동물을 좋아하는 아이가11) 등장한다. 자꾸만 민폐를 끼치고 죄송한 사람이 될 때면 약간 곤란한 표정을 짓는다. 가끔 뜬금없는 것에 웃고, 미처 이루지 못한 것을 아쉬워한다. 그리고는 또 하루를 반복한다.
아이가 없었던 과거의 삶과 지금의 삶, 아이들이 우르르 몰려다니는 장소와 아이들이 환영받지 못하는 장소, 비교적 건강했던 몸과 예전 같지 않은 몸, 오로지 나만의 것이었던 시간과 여러 갈래로 조각난 시간. 김허앵의 시트콤 ‘mama do’는 이 구분을 거부하지 않되 대인배 마냥 웃으며 이리저리 엮는다. 그러는 사이 아이는 요망진 눈으로 당당하게 앞으로 걸어 나간다.
파괴적인 영향력을 끼치며, 양육자를 잔여 가스처럼 뿜어내며 전진한다. 아이가 걸어갈 세상은 여전히 아름다운 눈을 끼운 잔인한 사람들의 것일지 모르겠지만,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져가는 입장에서 더 나은 것, 어쩌면 ‘새로운’ 것을 기대하는 것이 이 시트콤 다음 시즌의 과제일 수도 있겠다.
1)〈부글부글 끊어오른 머리통이 펑 하고 날아가 버렸다〉, 53*33.2cm, 캔버스에 유화, 2019.
2)〈Where is My Fucking Taxi〉, 20*21cm, 종이에 연필, 2018.
3)〈잠이 안와〉, 21*30cm, 종이에 아크릴, 2019.
4)〈Daily Routine〉, 130.3*130.3cm, 캔버스에 유화, 2019.
5)〈한여름의 산책〉, 72.5*116.3cm, 캔버스에 유화, 2018.
6)〈선량한 사람들의 세계〉, 2013.
7)〈초록토 해은이〉, 13*12cm, 종이에 아크릴, 2019.
8)〈자작하는 상희〉, 18*18cm, 종이에 아크릴, 2019.
9)〈마음으로 피는 담배 500개피〉, 27*21cm, 종이에 아크릴, 2019
10)〈당당하게 코파기〉, 21*18cm, 종이에 아크릴, 2019.
11)〈아빠의 미술수업〉, 21*30cm, 종이에 아크릴, 2019; 〈악어매니아를 위한 악어 그리기〉, 21*21cm, 종이에 아크릴, 20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