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텁고 거대한 정신: 우글거리는 생각 덩어리
매너리즘에 빠지지 않기 위해 많은 사람에게 각인된 작업에서 벗어나려는 시도는 모든 예술가가 필연적으로 행해야 할 숙명적 행위다. 큰 틀에서 배윤환의 작업 변화도 같은 맥락이라 할 수 있다. 그래서 그만이 특별하다고 치켜세우는 것은 이상할뿐더러 그리 바람직하지도 않다.
하지만 그가 보여준 변화를 그저 예술가의 일반적인 변화라고 치부하며 살펴보지 않으면, 배윤환이 지닌 예술적 특성을 놓치게 된다. 그래서 변한 것과 변하지 않은 것을 자세히 들여다봐야 한다. 그는 변한 듯 보이지만, 그 핵심은 결코 변하지 않았다.
작가는 초대형 회화로 작가로서의 존재감을 드러냈다. 하지만 근래의 작업에서는 압도하는 크기의 초대형 작업을 찾아볼 수 없다. 왜일까? 그는 끝도 없이 거대한 서사를 펼쳐놓기 위해 초대형 회화를 그린 것이 아니라, 머릿속에 떠다니는 수많은 생각과 감정을 정리할 수 없어 큰 화면에 자신의 생각/감정 지도를 그려보고자 초대형 회화를 그렸던 것으로 보인다.
초대형 회화가 드로잉과 설치 및 클레이아트가 결합된 〈스튜디오 B로 가는 길(Road to Studio B)〉(2018)라는 영상작업으로 바뀌고, 서사를 분절하여 개별 작업으로 완성하는 방식으로 변모한 것을 통해, 배윤환이 초대형 회화를 원했던 것이 아니라, 자신의 수많은 생각과 감정을 담을 공간이 필요했던 것임을 짐작할 수 있다.
수천수만 번의 드로잉과 조소 작업의 변화를 매 컷 촬영하여 수많은 생각과 감정을 시간 속에 압축한 영상작업을 선보인 것만 봐도, 이는 분명하다. 따라서 그의 작업 특성은 거대한 화면 형식이 아니라, 현실과 상상과 욕망이 혼재된 두텁고 거대한 정신이 자동기술법(Automatism)으로 표현되는 방식이라 해야 할 것이다.
그는 언제나 새로운 형식의 이미지 실험을 하지만, 그가 지닌 근본적인 작업 방식은 그대로다. 2014년에 이단지 큐레이터는 작가의 작업에 관해 “잠재의식 속에 남아있거나 축적된, 실체가 없이 떠도는 이야기, 혹은 괴담이나 전설, TV드라마나 정치적 사건, 뉴스, 인터넷 댓글, 새벽에도 울리는 스팸 문자의 이미지를 주워 담아 마치 판타지 동화와 같이 은유적인 장면으로 재구성”한다고 말했다. 이러한 작업 방식은 현재도 유효하다. 그는 이렇게 여러 가지가 복잡하게 뒤섞인 자신의 작업에 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나의 뇌 주파수는 여전히 여러 가지가 뒤섞인 생각, 그 생각들의 교배, 배설 주문을 내렸다. 여전히 내 생각에는 개미와 애벌레가 우글거렸고 쥐들이 드나들었다. 그리고 그것들은 아무런 제어 없이 작업의 형태로 전이됐다.”(작가노트, 2021) 그의 최근 인터뷰에서도 같은 맥락의 말을 발견할 수 있다.
“온갖 것들이 조화를 이루고 와글 와글거리는 그 생태계, 그게 제 머릿속인 것 같고, 지금은 변할 수 없는 제 성격인 것 같아요.”(작가인터뷰, 2022, 이하 인터뷰) 형식과 그 주제는 변했지만, 복잡하게 뒤섞인 사실과 생각을 표현하는 작가의 예술적 본성은 여전히 그대로인 것이다. 여기에 배윤환 작업의 핵심이 있다. 현실과 상상, 욕망과 이성, 생각과 감정을 비선형적으로 시각화하는 것, 우글거리는 생각 덩어리들을 이미지로 구현하는 것, 이것이 배윤환의 예술적 본성이며, 작업의 근원이라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