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우중, 〈Movement 52〉, 2024, 캔버스에 유채, 연필, 73x50cm © 갤러리바톤

#1. In this case: 질문들

이 상황 안에서 떠올렸던 질문들로부터 글을 시작하려 한다. 허우중은 긴 기간 밑색을 수차례 백색으로 덮어 종이 같은 질감을 낸 바탕과 선으로 내면의 불안과 흔들림 가운데의 균형을 현시하는 〈사恖상누각〉, 〈흰 그늘〉, 〈Layers〉 등의 연작으로, 고아하기까지 한 통제적인 화면 제작과 공간 구성이 그의 장기임을 확인시켜왔다. 그래서 아마추어적인 선긋기와 이음매 없이 존재하는 두 가지 연출 방식의 나열로 구성된 《SQUARE》의 초견 이후에 뒤이은 질문은 다음과 같았다.

2019년부터 2차원 평면의 “무게”, “방향”, “깊이”1)에 홀로 골몰해온 작가가 약 5년 후 지인들과 함께 심도를 찾기 어려운 벽화 그리기를 선택한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허우중이 작품을 수식하는 ‘백색 추상’으로 상찬된 표현을 포기해가며 선과 다색의 면으로만 제작된 회화, 종이 한 장으로 이루어진 기초적인 책자 형식의 리플릿이 전부인 전시를 계획하게 한 원인은 무엇이었나?

작가의 기존 행보에 비하면 《SQUARE》는 눌변에 가깝거나, 실없어 보일 확률이 높다. 그가 이제껏 진행해온, 캔버스를 중력의 근원으로 삼아 쌓아올린 회화 및 드로잉 전시하기를 의도적으로 유보한 채 가상의 원형과 ‘상자’에 대한 해석을 사설 없이 내보였기 때문이다.

과단에 가까운 신작 제시 방식은 어긋난 응답을 불러왔다. 요컨대, 전시 기획 단계부터 작품이 모습을 비로소 드러냈을 때까지의 과정을 알지 못한 채 허우중의 구작을 떠올리며 합정지구라는 상황이자 상자 안으로 걸어들어왔을 때, 관성적으로 작가의 작품에 다듬어진 세련됨을 기대해왔던 이들이라면 어리둥절해하며 돌아설 확률이 높다. 작가 역시 이를 각오했을 것이라 짐작된다.

하지만 필자는 페인트와 연필로 구성된 신작 〈Rings〉의 요체인 원초적인 ‘그리기’가 받은 심드렁한 반응에 반하여, 이 회화가 그의 작업 세계를 구성하는 동력 자체를 내재한 숨표였을지도 모른다고 말하고 싶다. 물론 전시의 완성도에 대한 비판으로부터 작가나 작품을 비호할 생각은 없다.

그러나 작가가 ‘이 상자’에서 행한 선 긋기가 다수의 미술 공간들이 너나없이 구현하고자 하는 명상적 연출이 요구하는 그래픽이 아닌 ‘그어진 선’ 자체이자, 완성되어야만 하는 ‘추상회화’이기보다 여실하게 모호한 동시대의 미술 중 일부임을 소탈하게 보여주었다는 데에 가치를 두고 싶다.
 
이에 더해, 필자는 허우중의 회화에 그간 기성의 ‘순수 추상’이나 정적인 모노크롬에 매달려온 수식어가 여과 없이 달라붙어왔으며, 추상회화의 계보 형성 과정에서 굳어진 과거의 담론이 젊은 작가의 ‘그림’을 조로화시킬 수 있다는 문제를 제언하고자 한다. 1987년생 작가를 ‘회고’하는 형태의 개인전은 그렇기에 우려스러웠다. 가까운 사례는 《SQUARE》와 거의 같은 기간에 진행된 《파노라마》에서도 살펴볼 수 있었는데, 이는 대전시립미술관 소장품인 〈사恖상누각〉 연작을 기준으로 허우중의 전작과 현재까지의 ‘변천’을 순차적으로 살피는 기획이었다.

전시는 입구의 정면 중앙에는 신작을, 나머지 세 면에 구작을 배열한 ‘전경’과 함께 정돈된 정보를 전달해주었다는 점에서 유익했지만, 과도하게 엄숙한 분위기로 진행되어 작가의 조형적 유희가 발생시키는 감흥이나 그의 작품이 ‘추상’으로 정의될지언정 다른 뿌리에서 자라난 회화임을 표명하기보다 이를 둘러싼 외적 의미에 집중하게 했다. 다시 말해 《파노라마》 안에서 작가의 작품은 다종의 변화구로서 관습적인 정렬 방식을 언제든지 거스를 수 있는 조형예술이라기보다, 제도권 미술이 배출한 ‘전형적인 추상’의 방식으로 ‘걸렸다’.

정립된 용어들을 오늘의 작품에 적용하는 일은 편리한 작품 읽기와 매력적인 전람의 대상 생성에 기여할 수는 있을지라도, 작가가 기존의 틀을 언제든 박찰 수 있는 동시대 미술가라는 사실을 축소한다. 물론 이러한 형식의 전시는 모든 작가가 언젠가는 필연적으로 거쳐야 하는 단계일 테지만, 젊은 작가가 지금의 문제를 작품으로 옮겨내며 개진시켜온 구상의 과정을 반감시키고 영구히 보존된 선대 작가들의 과제였던 추상의 담론을 그들에게 짊어지우게 하는 부작용의 기제가 될 수 있다.

더불어 같은 작가의 신작을 그의 구작이 독해되어온 방식으로 정의하는 행위도 오류를 발생시킬 확률이 높다. 현시의 방식이 바뀌었더라도 ‘페인터’가 처한 조건 속에서 “전체에 속한 부분을 볼 것이냐, 부분이 모여 만들어가는 전체를 볼 것이냐”2)를 고민해가며 만들어낸 올해의 ‘상황’에서는, 허우중이 작품으로 예술 행위가 내재하고 있는 허탈함과 명확하지 않은 도달점을 그대로 밝혔다는 결단에 주목해야 한다.

필자는 혹여 《SQUARE》가 차후 그의 주요 전시 이력에서 빠지게 되더라도 작가가 스스로의 작품이 팽창하는 자체적인 서사, 심지어는 무엇이라 해석되지 않는 디자인 그 자체로도 홀로 설 수 있음을 증명하는 기간이자 상황으로 기억하자 한다.


#2. In this case: 두 개의 사각형 사이

전시가 사각형을 주요 개념어로 설정한 만큼, 합정지구를 이루는 상자 내외부를 살피는 일은 작품 보기와 동일한 관찰을 요하는 필수적인 행위다. 벽화〈Rings〉는 노랑·주황·빨강·초록·보랏빛의 색면에 연필로 그어진 선의 집합으로, 지상의 투명한 유리 상자에 놓였다. 작가는 벽에 ‘걸리지’ 않는 평면을 활용해 익명의 집단 앞에 작품을 펼쳐놓는 ‘P 씨’로서, 회화의 구성요소에 걸쳐진 문제점을 함께 풀어가기를 제안했다.

한편, 합정지구의 지하층은 핀조명이 드리운 캔버스 한 점이 걸린 블랙박스다. 이 상자는 전형적인 미술관 또는 갤러리의 연출 방식을 상기시키며 〈Rings 3〉을 고전적인 유화의 제시 방식으로 보여준다. 이는 작가가 두 가지의 전시 방식, 즉 합정지구의 공간이나 대전시립미술관 열린수장고 전시실의 공간이 갖는 제도와 특성 모두를 참조하고 경유할 수 있음을 환기한다. 그러니까 《SQUARE》라는 상황 안에서 작가는 동일 단위의 회화들이 부분으로도, 어떤 조합으로도 함께 있음을 내비쳤다.

그럼에도 투명한 상자와 불투명한 상자 두 곳을 오간 관람자는 끝내 이 전시 안에서 두 공간이 이어지는 중간 단계의 상황 또는 상자를 만날 수 없었을 것이다. 개방감을 이용해 시선을 분산시키는 지상층과, 폐쇄함으로써 단일 작품에 시선을 응집시키는 지하층 사이를 이어주는 중간 단계의 상황이 부재하다는 점은 그러므로 자못 아쉽다. 전시는 회화를 매개물로 삼아 유별하기까지 한 감각 전달의 임무는 성공했을지 모르나, 지도 역할을 하는 리플릿을 제외하고는 공간 간의 연결성을 내부의 서사로 충분히 설명하는 장치를 마련하지 못했다.

때문에, 필자는 두 상자를 잇는 이음매이자 그 중간태인 첫 번째 상자가 대전시립미술관 열린 수장고 표면을 덮은 〈큐브 프로젝트: 테〉(이하 〈테〉)라고 주장해보려 한다. 이 ‘상자’ 역시 거대한 원으로 수렴되는, 하얀 선들이 부착된 야외 설치물이었다. 지하에 위치한 〈선들 1-6〉 위에서 비바람을 맞았던 지상의 입방체는 〈사恖상누각〉 연작의 표면을 떠올리게 하는 2차원 그래픽이면서도, 회화의 지지체에 관한 작가의 관심을 드러내는 임시적인 3차원 공간이었다.

이 반투명한 상자는 각기 다른 크기의 원형 5개를, 큐브를 구성하는 개별 유리판의 크기와 개수에 따라 해체한 뒤 재조합한 것으로 전개도를 보아야만 선의 시작점과 끝점을 숨긴 사각형 안의 원형을 온전히 파악할 수 있는 수수께끼같은 작품이기도 했다. 

두 번째 이음매로 고려해볼 수 있는 사각형은 《SQUARE》 제작 방안이기도 했던 ‘사각형’의 척도다. 1✕1m라는, 일정한 사각형의 율척으로 나뉘어 그려진 〈Rings〉는 〈선들 1-6〉과 물리적으로 원거리에 있는 또 다른 ‘선들’로서 또 다른 거대한 크기의 원형을 암시하는 회화이다. 작가가 처음부터 끝까지 그어낸 〈Rings 3〉을 둘러싼 사면의 테두리와 달리, 벽화는 방향이 다른 네 개의 패턴을 2인 1조로 구성된 팀이 그어낸 결과다.

전부 다른 흑연의 번짐과 밀도감, 필압을 형성한 사각형의 실체는 여기에 없으나 분명히 반투명하게 존재하는 사람간의 관계와 감정이 있었음을 암시한다. 이렇게 한정된 사각형의 경계를 채우는 한 명의 작업과 공동의 작업이 교차하는 전시 제작 방식은 두 상자를 잇는 또 다른 이음매다.


#3. In this case: 이 상자 밖에서, 순환하는 생각들

이제는 지난 개인전 및 지리적으로 다른 위치의 상자에서 전개된 방식과 구별되는 형식을 꾀한 개인전의 면면을 내부에서 들여다보기를 마치고, 바깥에서 《SQUARE》를 재고할 때다. 이 상자 밖에서, 허우중과 같은 시각문화를 공유하는 동료로서 우리가 그와 함께 나누어야 할 후일담은 전시의 과와 실뿐만 아니라, 그의 새로운 작품들이 어떻게 구작과 연결될 수 있을지를 화두로 해야 할 것이다. 필자는 ‘이 상황’을 만들어낸 또 한 명의 인물인 임석호와 나눈 대화의 맥을 참조하며 글을 마무리하려고 한다.

허우중은 정형화된 자기반복에서 벗어날 방편으로 약 1년간 캔버스에 직선을 수평으로 쌓아보았지만, 끝내 이 시도가 실패했음을 인정하고 경직되지 않은 유연한 형태의 본을 구현하는 데에 집중했다. 이를 사용해 선을 그어낸 총합은 매끈하고 분방한 감각을 전하는 〈선들〉이 되어 일견 흔적이 지우고 쌓인 자국이 두드러지는 전작과 대조되어 보이나, 마찬가지로 작가가 헛수고하고 망설였던 시간을 증명한다.

쌍생아 같은 〈선들〉과 〈Rings〉는 “공간에 대한 지속적인 생각으로부터 결국 상호 연계되는 대상 간의 모습”3)을 도면으로 한, 하나의 개별 단위이자 다양한 경우의 수로 조합할 수 있는 유닛의 가능태이기도 하다. ‘사각형’이라는 제목을 사용했지만 결국 가상의 원형을 나타내고자 하는 상황 안에서, 그의 회화는 모더니즘 미술로부터 지속되어온 네모난 사고의 윤곽을 관람자의 신장을 훌쩍 뛰어넘는 크기의 원형으로 재고하는 프레임으로서 나아간다.

그중 〈Rings〉는 가로폭이 좁은 가벽 옆면에 칠해진 색은 뒷벽의 면색과 같아 필선이 존재하지 않는 허공이 있음에도 선들이 접합되는 확장의 감각을 느끼게 했다. 이는 세로로 긴 화면에서, 전체의 단위를 겨우 더듬어가게 했던 〈그늘쌓기〉(2020)의 전략이나, 개별 캔버스가 하나의 패턴이자 단위로서 지정된 위치를 차지하며 공간과 회화의 프레임을 연관지었던 2022년작 〈서클〉, 〈커브〉에 기인하고 있는 작품으로 이해되기도 했다. 특히 서로 떨어진 공간들을 작품 안으로 포섭하는 기법은 전술한 연작을 이루는 캔버스 밖의 여백이 실제로 그어진 선이 없더라도 “공백이 아니”라고 알린 방식과 흡사하다.4) 

두 신작은 허우중의 개인전 《소셜 픽션》(2017, 경기도미술관)을 구성했던, 사이파이 그래픽 노블에 비견되는 작업과 더 밀접해 보이기도 한다. 약 10년 전, 허우중은 원형에 가까운 흑백의 테로 비어있는 말풍선을 모자이크처럼 배치해 웅성거림이 쌓이기만 하고 하나의 큰소리로 터지지 않는 상황을 묘사하며 고동을 울렸다.

일련의 연작은 작가가 프랑스에 기거하며 타국의 사회문화에 완벽하게 동화되지 못하는 과정에서 세월호와 같은 자국의 재난이 빚은 극단적인 상황을 인터넷으로 접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느낀 사회적 통사의 무력함을 내재하는 동시에 결국 단 한 번의 ‘보기’로는 그 안에 어떤 이야기가 벌어지고 있는지를 알려주지 않는 고집스러움도 표출한다.

이렇게 전작을 구성하는 내적 동기와 같은 본령으로 비롯된 신작들은 ‘실제의 물리법칙과 상상의 공간 안에 동시에 안착할 수 있을 것’을 법칙으로 구현된 매개물로서 작품에 어떠한 상황이 숨겨지고 나타나는지를 또한 자문케 한다. 따라서 《SQUARE》는 그의 작품 속에서 언제든지 등장할 수 있었던 매체와 작품의 합이었다.

임석호는 여기에서 기획하기보다 1년 전의 허우중이 ‘망친 작업’으로 써낸 기획안 안에서 구작의 “증거물들을 단서로서 잡아”가는 ‘캐쳐(C)’로서 역할했다.5) 그는 작품을 특정 용어로 수식하고 작가를 역사적 도열에 끌어들이는 큐레이터가 되는 대신, 허우중과 서신을 주고받는 주체로서 형체 없는 작품을 함께 키워가는 인물로 동행했다.

《SQUARE》 내외부에서, 그는 작가가 이미지를 각각의 셀로 재구성하는 방식의 명암을 목격하고 작품이 공간의 특성과 요철이 만들어내는 고유한 그림자에 녹아드는 구조로서의 회화라는 점을 부각시켰다. 공유한 얘기를 단단하게 만들어 되던지는 운동으로 기획을 대체하는 방법은 투박하더라도, 작가가 캐내고자 하는 ‘전체’를 운반해내는 역할을 끝까지 완수했다는 점에서 존중되어야 한다.

이렇게 C와 P의 《SQUARE》는 이상(異想)으로 향하는 비물질적인 계획과 실물의 작품이 동반된 상황이었다. 전시는 언제든지 해체되고 다시 화이트큐브로 돌아가야 할 벽면에 그려진 임시적인 선형이 정확한 형태의 근사치까지만 도달해도 성공적이라는 걸 알면서도, 퍽 유희적이었을 제작 과정을 상상하게 했다.

필자는 이러한 연유로 종종 ‘이 상자 안에서’로 오역되는, ‘이 상황 안에서’ 빠져나오며 각자가 소화한 정보를 ‘사각형’에서 원형으로 잇는 전시가 세상을 이해하는 방법과 유사한 감정을 끌어냈다는 점과 허우중이 그의 작품세계 내부에서 어떤 경합의 장이나 “급”을 따져묻지 않고 호기심에 이끌려 작품의 방향성을 결정지었다는 사실6)이 기꺼웠다. 그러니, 걱정 말자. 허우중의 선은 계속 새로운 상자들로 끊기지 않고 옮겨갈 것이다.


1) 허우중·임석호와의 인터뷰, 2024년 4월 13일, 서교동.
2) 허우중의 말, 위의 인터뷰.
​3) 허우중과의 인터뷰, 2024년 6월 8일, 합정지구.
4) 허우중·임석호와의 인터뷰 중 허우중의 말, 2024년 4월 13일, 서교동.
5) 임석호의 말, 위의 인터뷰.
6) 허우중의 말, 위의 인터뷰.

Reference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