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우중(b. 1987)은 선과 면이라는 가장 기본적인 조합에서 무한한 가능성과 절제된 변주를 실험하며, 순수 추상을 구현해 왔다. 작가는 현대 사회에서 일어나는 사건과 사고에 관심을 두고, 떠오르는 다양한 다양한 사물의 이미지를 수집하고 탐구하며 그 속에 다층적으로 담긴 의미와 또 다른 이면을 회화의 형태로 표현하는 작업을 한다.


허우중, 〈Resonance 2〉, 2025, 캔버스에 유채, 색연필, 72.7x50cm © 갤러리바톤

허우중의 작업을 가로지르는 중심적인 키워드는 이면(裏面)이다. 작가는 빛과 그림자, 전경과 배경, 개체와 전체 등 정확히 나누어 질 수 없는 관계를 통해 이면을 드러낸다. 이 키워드를 바탕으로 그는 대상을 안과 바깥에서 바라보고 사각지대를 찾아 표현하는 것, 그리고 표현된 대상이 타자 앞에서 또 다른 이면을 드러내는 모습을 탐구해 왔다.


허우중, 〈관념의 탑〉, 2017, 캔버스에 유채, 116x89cm © 갤러리바톤

초기 작업에서 허우중은 사회 내에 팽배한 냉소와 불신, 불안, 두려움과 같은 감정을 드로잉과 회화, 콜라주로 표현해 왔다. 그 과정에서 만화적인 표현과 상징은 기하학적 요소로 변화하였으며, 2017년도 작업에서부터 시소나 저울을 연상시키는 도상으로 균형감을 드러내 왔다.
 
당시의 작업에 종종 등장하던 요소인 기하학적 도형과 나뭇가지, 솔방울 등은 회화가 구축하는 서사를 중단시키며 자의적이고 능동적인 사고를 촉발한다. 각 형상은 가시적이지 않은 관계를 바탕으로 비전형적인 균형을 형성한다. 이러한 아슬아슬해 보이는 화면은 보는 이의 공간과 사물, 인식론에 질문을 던진다.  


허우중, 〈Hard to See〉, 2018, 캔버스에 유채, 연필, 112x112cm. 《정신적 태도》 전시 전경(갤러리조선, 2018) © 허우중

2018년 갤러리조선에서 열린 개인전 《정신적 태도》에서 허우중은 이러한 도상들을 허물고 선으로만 이루어진 불완전한 형태를 진공과 같은 화면에 남겼다.
 
전시에서 선보인 ‘관념의 탑’(2017) 시리즈에서 작가는 균형을 만들기 위한 발판과 사물, 각 사물의 부피나 무게, 위치와 배열 등을 변형해, 보는 이마다 각자만의 방식으로 균형을 찾을 수 있는 가능성의 화면을 제시한다.
 
나아가 작가는 이러한 관객 각자의 태도를 더욱 자유로이 담기 위해, 단단하게 땅을 딛고 서 있던 도상으로 이루어진 구작에서 벗어나 아스라하고 불완전한 형태만이 남은 하얗고 고른 배경을 제시하였다.
 
이 그림 안에서 무엇을 읽어내고 어떻게 대답할지는 보는 이에 따라 달라진다. 그러나 동시에 각 개인의 답은 묘한 합치점을 보이며 무언의 공감대를 형성할지도 모른다.


허우중, 〈Like My Scale and Your Scale Cannot Be the Same〉, 2018, 캔버스에 유채, 연필, 65x50cm © 허우중

또 사물의 형태가 사라지고 오직 선들의 합으로만 이루어진 화면이 주는 극단적인 단순함은 뜻밖에도 이입감을 가중시키고 대상들 간의 종속 관계를 보다 뚜렷하게 만드는 효과를 나타내게 된다.
 
화면 하단이 암시하는 무게 중심은 이 공간이 우리에게 익숙한 물리 법칙이 적용되는 공간이고, 위태로운 단순한 선과 곡선은 우리 자신 혹은 우리에게 결부된 감정들, 사물들로 치환될 수 있음을 암시한다.


허우중, 〈사(恖)상누각〉, 2019, 캔버스에 유채, 연필, 117x91cm © 허우중

한편 2019년 무렵 허우중은 사물의 상태나 관념적인 낱말의 조합이 주는 모호함과 생경함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다. 그는 이러한 모호한 문장들을 출발점으로 삼아, 이질적인 물체와 도형들이 합심하여 용케 균형을 잡고 있는 화면을 재현해 왔다.
 
이러한 불안정함과 긴박, 균형과 불균형이 공존하는 이미지는 작가가 현대인이 상시적으로 직면하는 불안, 공허, 막막함 등을 회화의 형태로 전달하는 기제로 활용되었다.


《선, 곡선 그리고 다채로운 움직임》 전시 전경(갤러리바톤, 2019) © 허우중

2019년 갤러리바톤에서 열린 개인전 《선, 곡선 그리고 다채로운 움직임》에서 작가는 앞서 ‘무게 중심’으로 표현되었던, 일종의 근거지이자 물리학이 지배하는 공간을 떠나 무지향적인 공간을 전유하게 되었음을 드러낸다.
 
이곳에서는 특정한 지향점에 따라 유기적으로 동조하는 개별적인 이미지들의 총체적인 군집이 사라진 대신, 보다 분절적이고 자유로이 부유하며 필요에 따라 모이고 합쳐지는 군소 집합의 움직임이 두드러진다.
 
예를 들어, 〈타이어 속 공기〉(2019)는 선과 곡선의 합으로 이루어진 기본적인 도형의 형태가 캔버스의 외곽을 크게 에워싸며, 쉼 없이 회전하거나 곧바로 튕겨 나갈 듯한 기세로 도사리고 있는 작은 반원들과 유려하게 휘어진 파상선들을 제지시키고 있는 듯하다.


《잔상의 깊이》 전시 전경(송은아트큐브, 2020) © 허우중

불안과 공허를 비췄던 지난 작업에서 나아가 평면적인 회화 작업에 다차원적 사고를 구현하는 시도는 2020년 개인전 《잔상의 깊이》에서 더욱 심화되어 나타난다.
 
이 전시에서 허우중은 연필로 그려내는 얇은 선들을 훼손하지 않으면서도 유화를 활용해 새로운 도형의 공간들을 그만의 고유한 작업 방식으로 나타냈다.
 
이전에는 주로 흑백으로 작품을 연출하여 검정색 배경에 연필 선만 남겨둔 채 흰 물감으로 나머지 부분을 채웠다면, 《잔상의 깊이》에서는 원색을 더해 주체와 배경의 공간을 더욱 극명하게 나타내고 만들어진 공간들에 일종의 존재성을 부여하는 작업을 선보였다.


《잔상의 깊이》 전시 전경(송은아트큐브, 2020) © 허우중

전시장 입구에서 관객을 맞이하던 파란 회화는 가장 먼저 이목을 끌며 주체로 인식하게 하고 그 후에 보이는 흰 공간을 배경이라 인지하게 만든다. 이로써 비로소 존재성을 갖게 된 대상들에 관객의 시선으로 또 다른 의미가 부여된다
 
그러나 작가는 평소 창작 방식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으며 이 전시에서도 역시 파란색으로 배경을 먼저 구성한 뒤 연필의 흔적을 남겨두고 흰 유화로 주체의 공간을 부각시킨다. 이를 통해 우리가 흔히 이해하는 ‘흰 여백의 공간은 배경이다’라는 관념을 전복시킨다.
 
이러한 작업은 관객으로 하여금 배경과 주체의 차이란 무엇인지 질문을 던지게 만들며, 작품을 관람하는 관객 각자만의 열린 해석을 가능하게 한다.


《잔상의 깊이》 전시 전경(송은아트큐브, 2020) © 허우중

그가 창작해낸 공간 속 각기 다른 도형들은 관객들로 인해 새로운 대상으로 재탄생한다. 이러한 점에서 허우중은 ‘존재’에 대한 고뇌를 표출한다.
 
그가 그려낸 도형은 일반적인 시선으로 바라보면 자연스럽게 온전한 어떤 대상의 일부로 받아들여질 수밖에 없다. 각기 다른 단층의 도형들이 중첩되어 서로 가리고 있다는 생각이 들게끔 만들기 때문에 겹쳐진 대상들이 어떤 모양을 띠고 있다는 우리의 판단은 그저 추측에 불과하다.
 
눈으로 인식이 가능하지만 그 ‘존재’에 대해 온전히 이해할 수 없게 됨으로써 인식한 ‘존재’가 실제 그 대상이라는 사실관계가 어긋나게 된다.


허우중, 〈Awakening From Far Away(2)〉, 2020, 캔버스에 유채, 194x259cm © 허우중

작가는 이 부분을 중점에 두고 특정 대상을 바라보고 쉽게 결론짓는 우리의 인식을 비집고 들어와 가시적 ‘존재’에 대해 질문한다. 볼 수 있는 단면에 의존하여 비가시적인 부분까지 추측해 완전한 모양의 존재로 정의 내린다면 과연 그것은 존재하는 것일까?
 
허우중은 작품 속에 어떤 대상이 가려져 있는지 혹은 육안으로 구별한 모양이 존재하고 있는지, 그 누구도 알 수 없다는 것을 강조하며 새로운 관점을 제시한다.


허우중, 〈Air Stratum(1)〉, 2020, 캔버스에 유채, 45.5x45.5cm © 허우중

이처럼 존재의 근본적인 불확실성에 대해 연구하는 허우중의 작업은 점차 부가적인 요소들이 최소화되고 움직임과 내러티브는 절제된다.
 
철저하게 절제된 캔버스 속 단순화된 선과 곡선만으로 연출한 그만의 화면에서 주체와 배경은 명확하게 나뉘는 듯싶지만 그렇지 않으며, 구성하고 있는 대상들의 존재는 그 자체로 불확실하다. 이는 곧 보는 이로 하여금 인간의 관념에 대한 성찰로 이끈다.


《무게의 궤도》 전시 전경(금호미술관, 2022) © 허우중

한편 2022년 금호미술관에서 열린 개인전 《무게의 궤도》에서 허우중은 하나의 패턴을 공유하는 작품 총 30점을 유기적으로 배치하여 무한한 변주를 상상하게 하는 관념적 공간을 구축하였다.
 
이를 이루고 있던 ‘Curve’(2022) 시리즈는 각 작품 모두 독립적이며 개별적인 특성을 띠고 있지만, 패턴의 질서에 따라 지정된 자리에 위치하면 서로가 서로를 필요로 하는 연대적인 성격으로 탈바꿈한다.


허우중, ‘Curve’ 시리즈, 2022, 캔버스에 유채, 색연필, 130x80cm (detail) © 허우중

그 중심에 있는 패턴은 원의 지름에 따라 4등분해 양 끝 부분을 이어 만든 것으로 파동 또는 흐름의 이미지를 연상케 하며, 예측 가능한 방식으로 되풀이되고 특별한 경계나 제약 없이 무한대로 확장해 나갈 수 있다. 그리고 캔버스 사이의 여백은 온전한 패턴의 모습을 감추는 동시에 패턴을 떠올릴 수도 있다.
 
허우중은 이러한 작업을 통해 그림과 공간의 유기적 관계 속에서 그림들이 하나의 지표가 되어 보는 이에게 이미지 너머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 공간을 어떻게 바라볼 것인지 묻는다.


허우중, ‘선들’ 시리즈, 2024. 《파노라마》 전시 전경(대전시립미술관 열린수장고, 2024) © 허우중

최근 작가는 패턴의 일부를 포착한 것처럼 보이는 선을 캔버스에 담아 보는 이로 하여금 캔버스 바깥의 무한한 선을 상상하게 하는 작업을 선보이고 있다. 대표적으로 ‘선들’(2024) 시리즈는 매끈한 바탕에 식물의 줄기나 붓 자국을 연상시키는 미세하고 반복적인 연필 선이 화면을 이룬다.
 
이 선들은 전작과 달리 화면 바깥과의 적극적인 연결을 시도하는 듯 보이며 거대한 사물의 일부로도 읽힐 수 있도록 함으로써, 개별 작품에서 그 바깥으로 확장되어 다른 무엇과 연결될 수 있는 가능성을 나타낸다.


허우중, 〈Movement 52〉, 2024, 캔버스에 유채, 연필, 73x50cm © 갤러리바톤

이처럼 극단적인 단순함을 통해 이면을 드러내는 허우중의 작업은 전경과 배경, 개체와 전체의 유기적이고 불확정적인 관계를 재현하며 가시적 ‘존재’에 대한 우리의 관념을 비튼다. 또 철저하게 절제된 캔버스 속 화면은 잠재된 움직임과 형상을 품고 있음으로써 그 너머로 확장되고 변주될 가능성을 잠재한다.
 
이러한 그의 작업은 가시적인 단면에 의존해 비가시적인 부분을 유추하게 함으로써 ‘존재’에 대한 우리의 인식에 새로운 관점을 제시하고 무한한 영역의 열린 공간으로 이끈다.

"그림들은 하나의 지표가 되어 보는 이에게 이미지 너머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 공간을 어떻게 바라볼 것인지 묻는다. 나는 이를 통해 '존재'를 전제로 하는 '존재하지 않음'에 대한 인지가 무한의 단면을 유추할 수 있는 출발점이라는 이야기를 전하고 싶다." (허우중, 금호미술관 인터뷰 중)


허우중 작가 © 하퍼스 바자

허우중은 파리국립고등미술학교 조형예술 학사 및 석사 과정을 졸업하고 포스트 디플롬(Post-diplôme) 과정을 이수하였다. 개인전으로는 《Square》(합정지구, 서울, 2024), 《파노라마》(대전시립미술관 열린수장고, 대전, 2024), 《무게의 궤도》(금호미술관, 서울, 2022), 《스코어 오브 스코어》(챕터투/챕터투 야드, 서울, 2021), 《잔상의 깊이》(송은아트큐브, 서울, 2020) 등이 있다.
 
또한 작가는 《반복의 기록》(챕터투, 서울, 2025), 《방향감각》(청주시립미술관, 청주, 2023), 《Summer Love 2022》(송은, 서울, 2022), 《인덱싱 더 네이처: 가까운 곳 또는 먼 곳으로부터》(No.9 코크 스트리트, 런던, 2022), 《Rain Reading》(두산갤러리, 서울, 2021), 《Sharpness_작업의 온도》(일우스페이스, 서울, 2020), 《불안한 사물들》(남서울미술관, 서울, 2019) 등 다수의 단체전에 참여했다.
 
허우중은 금천예술공장(2021), 난지미술창작스튜디오(2020), 챕터투(2019) 등의 레지던시 프로그램에 선정되었으며, 그의 작품은 국립현대미술관 미술은행, 서울시립미술관, 대전시립미술관, 경기도미술관 등 다수의 기관에 소장되어 있다.

Reference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