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작년에 처음으로 개인전을 했어요. 언니를 마지막으로 본 해의, 그러니까 그때 언니 나이가 되어서야 말이에요. 그전에도 물론 전시도 했고 작업도 했지만, 처음으로 잘 갖춰진 갤러리에서 전시를 한 거였어요. 지금 돌아보면 작년 개인전에 아쉬운 점이 많아요. 하지만 어떻게 처음부터 잘하겠어요? 앞으로 잘하면 되는 건데 그 ‘앞으로’가 저에게 얼마나 찾아올지 잘 모르겠어요.
그제야 언니가 당시 제게 했던 말들이 이해됐어요. 작품을 보여준다는 것은 공간을 만들고 맥락을 만드는 것인데, 그건 한순간에 잘할 수 있을 것 같진 않다고 했죠. 그래서 언니는 전시가 끝나면 늘 아쉬웠다고요. 경험이 많아지면 더 잘할 수 있는 것 같고, 또 전시 구성에만 신경 쓰기도 바쁜데 전시에 따르는 부수적인 일들로 인해 힘들다는 말도 했던 것 같아요.
언니, 언니가 꽤 이름난 미술관에서 전시 설치를 하고 돌아온 날 있잖아요. 네 캔에 만 원 하는 맥주를 사 와서 별 시답지 않은 농담을 주고받다 돌아간 그 날, 저는 그날 언니가 조금 부러워서, 언니가 하는 말들을 그냥 투정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아요. 언니의 말을 귀 기울여 들어줬어야 했는데 미안해요.
언니는 어쩌면 그날 이후 조금씩 미술을 하겠다는 마음을 접었던 것일지도 모르는데. 그날 만난 큐레이터가 언니에게 또 다른 전시를 약속하며 접근했던 그윽한 손짓과 눈빛. 그건 그냥 흘려들어서는 안 될 것들이었는데. 그때는 해시태그도 트위터도, 인스타그램도 없었다고 말하기엔 저는 너무 비겁하고 옹졸했어요. 함께 싸워주지 못해 미안해요.
나는 그날 우리의 대화가 엇나간 것이 종종 떠올라요. 언니는 얼마나 오랜 기간을 혼자 싸워야 했을까. 그런 생각이 이제야 들어서, 그때로 돌아가 언니와 다시 이야기를 나눠보고 싶어요. 졸업을 앞두고, 졸업 전시만 하면 모든 것이 잘 풀릴 줄 알았던, 기대에 부풀었고 자신감에 차 있던 저를 보며 당신은 어떤 말들을 삼켰었나요?
저를 보며 짓던 옅은 미소는 과도한 자아를 내뿜던 저에 대한 피로감이었나요, 아니면 후배에 대한 배려였나요? 그것도 아니면, 저의 시대는 다를 것이라고, 그러니 제 앞날은 언니와 다를 것이라 생각해 아무 말도 하지 않았던 것이었나요?
저는 그 이후 졸업을 했고 회사 생활을 시작했어요. 돈을 벌어야 했기 때문이었는데 사실은 언니가 늘 마주하고 있던 현실을 처음으로 느끼고 도망친 것인지도 모르겠어요. 만나는 사람마다 붙잡고 미술계의 불공정함에 대해 토로하며 정작 작업은 다시 시작하지 못했어요. 그 이후로도 꽤 오랜 기간 저에게 일어난 일들에 대해 우울해하고만 있었어요.
도저히 혼자 빠져나갈 수 없다고 생각했을 때, 술자리에서 만난 친구로부터 한 무리의 페미니스트 친구들을 소개받았어요. 그 친구들은 저마다의 이유로 세상에 분노하고 있었죠. 하지만 자기연민에 빠진 저와는 달리 직접적으로 행동하며 목소리를 냈어요. 혼자가 아니라 연대하며 조금씩 세상을 바꿔갔어요.
그 친구들을 만난 해에는 그러고 보면 정말 많은 일이 있었던 것 같아요. 어느 날엔 우리와 함께 암흑기를 버텨온 친구로부터 농구를 하자는 연락이 왔어요. 그러다 농구단까지 들어가게 되었는데, 공을 빼앗고 몸을 부딪치며 팀으로 함께 하는 구기 스포츠를 경험하면서 그동안 제가 경쟁을 피해왔단 사실을 알게 됐어요.
경쟁의 순간이 오면 양보하는 것이 옳다고 알려주면서, 때로는 그에 전력을 다해 경합해야 한다는 걸 알려주는 구기 종목은 왜 남학생들의 전유물로 만들었나요? 저는 이 단순한 걸 알지 못해 너무 많은 순간을 물러서며 살았어요.
또 어느 날엔 드랙(drag)을 하는 친구들을 만나 ‘드랙킹(Drag king) 존 존슨’으로 살아보기도 했어요. 드랙을 하면서 제 안에 있던 우상화된 남성성을 버릴 수 있었고, 다시 태어나지 않는 한 변하지 않을 것이라 생각하며 짓눌려온 좌절감에서 벗어날 수 있었어요.
속도를 조절하는 법, 스스로를 미워하지 않는 법, 자기연민에 빠져있지 않는 법, 선의의 경쟁을 하는 법, 자기를 먼저 챙기는 법은 모두 페미니스트들에게 배웠어요. 저는 하루하루 동료들에게 많은 것을 배우고 있어요. 동료들과 함께하며 시대의 악몽으로부터 조금씩 벗어나 치유해나가는 것 같아요.
저는 생각해보면 계속해서 동료를 찾고 있었던 것 같아요. 그 동료는 지금 함께 하는 존재들일 수도 있지만, 한 번도 만나지 못했지만 언제든 연대할 수 있는 익명의 다수가 될 수도 있어요. 자신의 위치에서 목소리를 내주는 그들이 있어서 저도 힘이 나는 것 같아요. 이제는 아무에게도 이해받지 못한 수업 시간과 같은 악몽은 이제 없어요. 오히려 이제는 퀴어-페미니즘 서사로 작업을 한다고 하면, 그걸 읽을 수 있는 눈이 너무 많아져서 긴장하고 작업해야 해요. 계속 공부하고, 부족한 게 없는지 살펴야 해요.
며칠 전에는 그런 일도 있었어요. 동료들과 앉아 이야기를 나누다가, 난자와 난자가 결합해서 아이를 낳는다면 ‘여자아이’만 나온다며 좋아했는데 그 친구들 중 한 명이 “그 아이가 스스로 정체화할 때까지는 모르는 거잖아요”라고 말해서 다시 한번 저의 부족함을 발견했어요. 예전에 언니는 퀴어 이슈에 관해 이야기하려면 너무 낮은 단계의 이야기부터 시작해야 해서 정작 하고 싶은 이야기는 못 해서 힘들다는 말을 했죠.
이제는 더 나아간 이야기를 할 수 있어요. 그리고 그걸 읽어줄 수 있는 관객도 많아졌어요. 우리는 이제 너무 기울어져서 오를 수도 없는 판 위에 있지 않아요. 언젠가는 평평해질 판 위에서 제대로 경쟁해야 해요. 그 판을 평평하게 만들어 준 건 모두 수많은 연대들이겠죠. 이젠 시대의 탓만을 할 수 없어요.
언니, 어느 날 페미니즘 미술 수업이 끝나고 왜 한국엔 커밍아웃한 레즈비언 작가가 없는지에 대해 한탄했잖아요. 그런데 그건 우리가 잘 몰랐기 때문이었던 것 같아요. 우리는 어쩌면 미술계라는 세계에 갇혀 오히려 바깥을 볼 줄 몰랐던 게 아니었을까요? 레즈비언 미술은 퀴어 인권의 역사만큼 수많은 활동가에 의해 만들어지고 있었어요. 우리가 그걸 몰랐던 이유는 미술 학교 안에서 유명 미술관, 갤러리 전시만 다니고 권력이 있는 미술 잡지만 읽었기 때문이었겠죠.
간혹 퀴어문화축제에서 그들의 작품을 만나더라도 머릿속에서 은연중에 아마추어의 작업으로 폄하했을지도 몰라요. 하지만 활동가 중에는 예술 전공자도 많았고 익명의 활동명을 쓰는 작가들도 있었어요. 그리고 그들은 누구보다 진보적인 작품으로 세상에 그들이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를 담아 목소리를 냈죠.
저는 뒤늦게나마 그들의 작품을 보여주기 위해 작년 《레즈비언!》 전시를 열었어요. 전시 서문을 100장씩 4번이나 출력해두었는데 그 종이가 다 사라질 정도로, 불과 열흘 동안 많은 관객이 다녀갔어요. 이제 우리는 그들의 빛나는 활동을 기억하고 더 많은 작품이 나오도록 지지해줘야 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