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e Vaak, Hoping for a Safe Day, 2009, Acrylic stencil on canvas, 91x116.8cm © Hee Vaak

‘오늘도 무사히’는 1970~80년대 때 흔히 볼 수 있었던 ‘기도하는 소녀’의 이미지에서 시작한다. 조슈아 레이놀즈의 ‘어린 사무엘’(The infant Samuel, Joshua Reynolds, 1776)은 어느 날 한국으로 넘어와 익명의 누군가에 의해 모사되고 “오늘도 무사히”라는 글귀가 추가되면서 한국형 ‘기도하는 소녀’가 완성된다. ¹

영국 화가 조슈아 레이놀즈는 고전 대가들의 회화를 학습하며 특히 렘브란트의 초상화에 천착했는데 렘브란트의 음영 사용 방식을 대입하여 구약에 등장하는 사무엘이라는 어린이 상을 그렸다. 그는 사무엘을 통해 성숙한 어른보다 아이의 순수함을 내세웠다. 어린 사무엘은 한국에 특이하게 이식되어 오래전 기억 속 택시에, 식당에, 가정에 빈번히 걸리고 놓여있었다. 소년에서 소녀로 변신한 이 이미지에 익숙한 세대가 있고 후속 세대에겐 그 위력이 미미할진 모른다.

기복(祈福)이 암암리에 깊숙이 침투해 들었던 시대는 그 시대의 정조와 긴밀히 직조될 수밖에 없다. 요즘도 기복은 삶에 옅게 드리워져 있지만 기도하는 소녀처럼 그토록 통렬하게 시대 이미지로 통용되기엔 변화된 감수성이 허용치 않는다. 간절하지만 소박하게 비는 무사(無事)와 안위(安位)는 하잎(hype)을 앞세우는 시대 정서에는 투박하기만 하다. 대리해서 빌 것이 무언가. 반짝이는 물신(物神)들이 넘쳐나고 이것들을 찬양하기에도 벅찬데 말이다.

그러나 희박은 가장 나중의 것들과 겨루는 대신 기도하는 소녀, 혹은 어린 사무엘을 (다시) 택했다. 그녀는 소녀든 소년이든 간에 대속(代贖)하고 간절히 염원하는 존재를 매개로 투사된 어딘가 비틀린 염원의 속성을 되짚고 있다. 


유사(Pseudo) 예배당으로서의 전시장

그녀와의 대화 중 “믿음은 편견이 되고 또 생활양식이 된다”는 말이 가장 인상적이었다. 믿음은 주로 고양되고 편견은 얄팍하고 넓게 번지는 가운데, 생활양식이라는 특정 시기 특정 방식으로 정제된 이 믿음, 편견, 그리고 종합된 생활양식은 시각적으로 빳빳한 긴장감을 지닌 체 전시장으로 들어왔다. 전시장에는 생활양식의 봉헌식을 연상케 하는 장치들이 동선에 놓이며 마치 유사 예배당이 조성됐다.

전시장 진입로는 두 곳으로 이루어지지만 주 출입구에 드리워진 〈용기없는 삶〉(2017)은 ‘고해성사와 미사에서 성직자가 몸에 두르는 영대²의 형태’에 수집된 말들이 샤에 자수로 수놓아져 있다. 속(俗)을 끊고 성(聖)에 닿았어야 할 세로 천 가득에 속세의 말들이 못내 발설되고 있다. ‘엄마 미워 엄마 미안’, ‘나는 이번 생일에도 존재감이 없다고 느꼈다’와 같이 미움과 미안함이 나란히 붙고 엄마와 아이의 관계항이 설켜 있다.

그 아래 입구 대칭으로 놓인 두 개의 좌대 위에는 깨진 유리컵이 실리콘으로 얼기설기 붙여져 있다. 다시 붙이기는 그간 희박이 몇 차례 반복해 온 시도이다. 〈부개동 기찻길에서 수집한 다섯 개의 잔〉(2015)을 통해 옛 생활상을 재편하고 〈무명의 기억〉(2015)에서도 흩어진 기억을 되짚는, 결국 무능할 행위를 의욕했다. 좌대 위에 성물(聖物)마냥 놓인 이 컵들은 기능을 잃은 대신 의미를 얻었다.

그러나 바람을 간절히 고양시키는 삶이란 또 한편 얼마나 유약하고 취약하던가. 주 출입구로 진입하여 왼편에 자리한 분할된 작은 전시장 안에는 바로 이 성물을 어떻게 복원하였는가에 대한 2채널 비디오가 자리하고, 서로가 기대어 지탱되는 색색의 도려내진 합판이 한편을 차지한다. 견고한 설치 방식 대신 가설 설비 마냥 놓인 이 나무 토막들은 임시적, 임의적이다. 성당의 주(主)제단 아닌 소제단과 같은 의미로 구성된 전시장 초반 공간은 이제 본격적으로 펼쳐질 신념의 배반을 외곽에서 예비시키는 듯하다.


Installation view of 《Hoping for a Safe Day》 (Cheongju Art Studio, 2022) © Hee Vaak

메인 전시장은 예배당의 주된 속성을 변주하며 조성됐다. 제단화가 여러 폭에 걸쳐 기독교의 주요 서사를 장엄하게 펼쳐놓는데 반해, 희박은 제단화 위치에 캔버스에 아크릴로 거듭 처리된 기도하는 소녀(들)을 그린 〈믿음으로 작동하는 세계〉(2022)를 배치하고 있다.

성스러운 빛이 하늘을 뚫고 쏟아져 내릴 자리에는 붉고 파랗고 노란 물감 자국이 대신한다. 삼원색은 빛의 삼원색 아닌, 색의 삼원색을 ‘선택’함으로서 자신의 소임이 성직 아닌 예술가임을 발설한다. (이 지점이 희박에게는 중요하다. 후술하겠다.) 제단화 기능을 하는 회화의 맞은편 천장 공간 높이 다소곳하게 걸린 기도하는 소녀상 위를 삼원색으로 덮은 〈오늘도 무사히〉는 2013년에 제작한 작품으로 2022년에 구현된 《오늘도 무사히》가 실로 얼마나 오랜 시간을 거쳐 구축된 세계임을 증명하고 있다.

아크릴 스탠실로 겹쳐 제작된 〈오늘도 무사히〉 연작 또한 2009년과 2019년에 제작되어 기도하는 소녀가 일회성 프로젝트가 아님을 다시금 상기시킨다. 공간을 채우는 설치 작품들은 아크릴과 스킬자수로 만들어진 다양한 〈기도하는 소녀〉들이고 원형 스킬 자수틀은 미세한 바람에 따라 조금씩 각도를 달리하며 회전한다. 그중 높게 솟구친 스킬 자수틀 하나로부터는 온갖 색색의 실이 〈믿음으로 작동하는 세계〉 속 물감 자국의 흘러내림을 삼차원의 공간에 반복한다.

수직적으로 배치된 모든 기도하는 소녀들의 병치를 거스르는, 원형 좌대 위에 놓인 〈소망하는 세계〉(2022)는 오색실, 팥 등의 기물들을 통해 한국인의 삶에 두루 차지하는 미신적 자취를 연상시키기에 충분하다. 우러러 기도하는 성령의 삶과 고개 숙여 기도할 때 차오르는 세속적 염원은 이다지도 배치되면서 또 얼마나 자주 공명하는지. 희박이 시각적으로 되짚어주고 있지만 이미 내 안을 굳건히 차지하고 있는 믿음과 편견의 뭉텅이임을 그 누구라도 모를 수 없다.


Hee Vaak, A world that works by faith, 2022, Acrylic on canvas, 142x408cm © Hee Vaak

성속(聖俗)을 헤집는 예술

존재로 자신의 소임이 예술가임을 증명하는 건 희박에게 예술가 모두의 존재증명 과제보다 더 특수한 과업이다. 이는 대화를 통해서도, 포트폴리오를 통해서도 드러난다. ‘집안에 성직자가 나오는 것이 꿈이던 할머니’의 염원에 따라 장차 수녀됨을 수순으로 알고 살던, 기도하는 소녀는 십 대를 거치며 거역을 감행했다. 레이놀즈가 성숙한 어른 대신 아이의 순수함에 매료되어 어린 사무엘을 그린 건 결국 때가 되면 이윽고 전복되고 말 순진무구함을 (일시) 봉인하기 위해서였을까.

부서짐이나 약속의 파기 없이 무수한 봉인은 진정한 의미를 획득하지 못한다. 언어화된 봉인이 맹세라면 다음의 말들을 새겨들을 법하다. “법(칙)에 따라 모든 사물(사태)을 동일한 상태로 보존하며 그것들을 안정시키는 것을 우리는 맹세”라고 하며 “맹세는 어떤 것도 창조하지 않고 어떤 것도 낳지 않지만 다른 무언가가 낳은 것을 하나로 묶어주고 보존해주는 것³”이라는 고대철학자들의 말은 의미심장하다.

구약의 사무엘과 70~80년대 한국을 떠돌던 소녀에게 부여되었던 기도하는 삶은 희박에게 부여되었던 수녀로의 삶과 멀지 않다. 대리인과 그 대리인의 도상을 통해서만 이루어지는 염원이란 얼마나 가혹한가. 희박의 개인사를 돌출시키고자 이런 서술을 자극적으로 적고 있는 게 아니다. 믿음과 맹세가 밀접한 만큼 맹세와 거짓 맹세가 삶에서 팽팽하고, 바로 그 이치가 희박이 말한 “믿음은 편견이 되고 또 생활양식이 된다”와 맞물린다.

희박이 의식했든 의식하지 않았든 2022년 《오늘도 무사히》에서 희박의 존재는 전시 ‘안’에 자기 위치를 직접적으로 드러내지 않지만 기도하는 소녀(들)에 자신을 유비하면서 자기 운신의 영역을 구축한다. 여기서 전작이었던 〈옥순의 방〉(2015)과 〈옥순의 실〉(2021)과는 달라진 작가의 위치에 대해 생각해 보게 된다.

할머니-어머니-자기 세대로 이어지는 가족 여성 서사에서 희박의 시선으로 재구축되는 할머니 옥순의 서사 파편들은 고난이 이어져야만 했던 한국 근현대기 여성사이면서도 무덤덤하게 처리되는 작가의 개입과 시선으로 인해 여성 보편 서사로 자칫 쉽게 수렴될 수 있는 여지를 지워가며 만들어졌다. 실로 옥순/춘자 두 개의 이름을 갖은 할머니의 서사는 흥미롭다.

하루 세 번 ‘불란서’ 신부의 커피 심부름을 했다는 할머니, 바로 그 불란서 신부를 위한 심부름에서부터 이어져 온 종교에 대한 굳은 믿음과 전념이 희박에게 수녀의 삶을 부여하는 데 망설임을 거두었으리라. 또한 바느질로 생계를 이은 할머니가 남긴 반짇고리와 재봉틀 등으로부터 이어진, 실이라는 원형(元型)에 대한 촉각은 가족 모두가 공유하는 기억이다.

〈옥순의 방〉(2015)과 〈옥순의 실〉(2021)은 할머니의 생애와 생애 이후로 구조적으로는 쪼개어지면서도 그 속에서 희박은 굳게 가족 유대(ties)를 견지할 수밖에 없었다. 바로 이 유대의 결속 주체가 유대에 의문을 제기하며 판단중지(epoché)를 감행할 때, 그리고 이를 시각예술로 풀어낼 때, 수녀의 삶을 거역한 희박의 삶이 작가적 결단으로 돌출된다. 

삶의 결단이 있었고, 그 결단의 이유와 그 과정에서의 반성, 회의가 시각언어로 번안될 때에야 장애물을 치우고 앞으로 더디게 나아간 그 아이의 결단이 비로소 옹립될 수 있다. 소망을 “차라리 아무것도 하지 않는 목적 없는 상태를 원하는 것”이라 하고 있지만 우리가 본 것은 무엇일까. 너무 많이 보아서 하찮아져 버린 기도하는 소녀를 다시 보게 만든 이가 누구인가.

조용히 부유하기를 희망한다는 그녀의 독백이 도리어 역설적으로 차갑게 온몸을 향해 세차게 덮쳐 내린다. 그런데 한기보다 더운 기운을 느끼게 되는 건, 보았던 것보다 생각해 볼 것들이 많았던 《오늘도 무사히》 때문이다.



¹희박, 《오늘도 무사히》(청주미술창작스튜디오, 2022.9.14.-9.25.) 작가노트에서 발췌함
²희박 포트폴리오(2023) 중 〈용기없는 삶〉에서 인용함.
³조르조 아감벤, 『언어의 성사』, 정문영 옮김, 새물결, 2012, p. 16.

References